“에게. 내 스케줄 표잖아. 이게 뭐 어쨌다고?”
기대에 차 있던 자인은 곧 실망한 표정을 보였다.
용수가 씩 웃더니 자인의 손을 꽉 잡으며 종이 끝부분을 가리켰다.
“어허. 여기 자세히 좀 읽어보지?”
“이미 예전에 본거야. 뭘 또 보래.”
자인은 시답지 않다는 듯 종이 끝부분을 건성으로 훑었다.
순간 뭔가 이상했다. 자인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이게 왜 있어? 야! 취소 안 했어? 좋은 소식이라며?”
“그러니까 좋은 소식이잖아. 네가 오랜만에 드라마를 하는 날이니 팬들에게 어마하게 좋은 소식이지.”
오늘 분명 화보촬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스케줄 표를 다시 보니 화보촬영이라고 적혀 있던 부분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드라마 티저 영상 촬영]이라는 문구가 새로 적혀 있었다.
“취소한다며? 대표님아, 이건 실수라고 했잖아. 취소했었어야지!”
“배우님아. 그건 네 사정이고. 회사 사정은 취소 못 하지. 위약금이 열 배거든.”
“아, 그놈의 술….”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냐? 덕분에 꼬인 스케줄 조정하느라 나도 고생 좀 했잖니.”
용수가 화풀이하듯이 자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렸다. 자인은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용수는 아빠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 좀 귀엽다.”
용수가 장난처럼 자인의 어깨를 감쌌다.
“아, 그놈의 술….”
그러거나 말거나 자인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민지였다. 민지는 가슴에 먹을거리를 잔뜩 안고 있었다.
민지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놀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베란다 창에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던 용수가 자인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모습에 또 놀랐다.
더욱이 용수는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뭐야? 분위기 왜 저래?”
민지는 가슴에 안고 있던 먹을거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진짜! 나 눈 버린 것 같아요. 못 볼 꼴을 봤어….”
그 순간 용수에 대한 자인의 처절한 응징이 있었다.
“이 자식이, 네 족발, 무겁댔지!”
자인이 살벌하게 웃는 얼굴로 용수의 발등을 콱 밟았다.
“감히 그런 표정으로 언니를 보다니, 맞아도 싸요!”
민지가 바닥에 떨어뜨린 먹을거리를 주워들어 용수에게 던졌다.
“아, 콩가루 회사인 게 분명해. 저기요들. 나 대표예요. 당신들 회사 오너!”
용수가 항의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자인의 주먹이, 민지가 던진 과자봉지가 용수에게 향했다.
“아, 나 대표 그만둘래….”
* * *
자인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한류스타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다양하게 이해했다. 팜므파탈, 요염한 여인, 십대 소녀 같은 청순미 등이 그녀에게 붙어다니는 꼬리표였다.
한마디로 그녀는 다양한 매력을 지닌 진짜 배우였다. 그것도 아름다운 배우.
자인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연기를 시작했다. 빼어난 미모만큼 연기실력도 뛰어나 무명시절도 없이 금세 유명 스타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또 그만큼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렇게 성장한 탓에 자인은 항상 자신만만했고 어디를 가나 당당했다.
일찌감치 스타가 된 사람들 중에는 스타병에 걸려 이기적이거나 오만한 사람도 제법 많은데, 자인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선후배는 물론 팬들에게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성격도 솔직하고 시원시원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솔직한 것은 아니었다.
* * *
자인은 메이크업 샵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인을 알아본 실장이 얼른 달려와 반갑게 인사했다.
“자인 씨!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그러셨어요? 죄송해요. 요즘 일이 없어 쉬다 보니 한동안 올 일이 없었어요.”
“자인 씨가 쉬어요? 어머! 농담도 잘해.”
실장이 농담 말라는 듯 살짝 눈을 흘기고는 까르륵 웃었다.
실장은 자인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은은한 조명과 금빛 대리석이 빛을 내는 실내장식은 한눈에 봐도 이곳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예약시간보다 좀 일찍 오셔서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지금 유나 양이 다른 손님을 받고 있어서요. 아니면 다른 스탭으로 배치해 드릴까요?”
“기다릴게요. 오늘은 머리도 좀 다듬어야 해서요. 헤어는 유나 양 솜씨가 최고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매니저. 자인 씨, 룸으로 안내해드리세요.”
“네.”
실장의 부름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얼른 자인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자인님.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자인이 안내받은 곳은 VVIP 전용 대기실이었다.
방에는 책들과 TV, 에어컨, 음료와 간식이 들어 있는 냉장고가 있다. 그리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소파와 침대까지 배치되어 있어 잠시 대기하고 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민지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냉장고에서 음료 하나를 꺼내 자인에게 건네주곤 룸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 여긴 호텔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다만….”
단점 하나가 있다면, 벽이 얇아 큰소리로 말하거나 웃으면 옆방까지 들린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벽 건너편 젊은 여자들이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 호호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민지는 거슬려했지만 한두 번이 아니기에 자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잡지책을 보던 민지의 표정이 점차 변하더니 자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빠져들 듯 폰을 보던 자인 역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썹을 까딱거리며 벽 쪽을 바라봤다.
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다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루머로 시작하여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이야기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 그 주제가 자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자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언니, 아직 안 불렀는데요?”
“알아.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화장실은 여기도 있는데….”
혹시나 사고를 칠까 싶어 겁이 난 민지는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자인을 바라봤다. 자인은 그런 민지를 향해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어 보이곤 방을 나섰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열성적인 팬이 있으면 안티팬도 있기 마련이다.
자인이 아무리 잘나고 유명한 스타여도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중 심한 이들은 모든 기사에 악플을 달거나 왜곡된 정보를 퍼 나르는 등 사생활까지 침해했다.
단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정신적 폭력. 자인은 그 모든 걸 묵묵히 참았다.
하지만 참으면 참을수록 근거 없는 비방과 악소문이 도를 넘기 시작했다.
결국 자인은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선언을 함과 동시에 악플러들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어떤 이들에겐 심심치 않는 보복을 하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자인은 화장실로 가다가 갑자기 몸을 멈췄다. 밖에서도 잘 들리는 자인에 관한 이야기.
“기분 나쁘게 너무 잘 들리네.”
자인은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올리더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방 쪽으로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야기를 하셨으니, 제가 누군지는 잘 아시겠죠? 한류의 대세, 전 세계를 휘어잡은 스타 자인이에요. 반갑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꽤나 놀랐는지 방금까지 자인을 험담하며 웃고 떠들던 여자들이 한순간 동상이 된 듯 몸이 굳었다.
자인은 조용히 문을 닫으며 여자들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그 얼굴로 날 깠니?’라는 눈빛이었다. 자인은 여자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기까지 했다.
“있죠. 저는요. 당신들보다 백! 배! 예쁜 만큼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매력인 여자랍니다. 저만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라던데…. 직접 보셨으니 아시겠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자들이 자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자인은 여자들이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긴 팔로 출입문을 막았다.
“모르시겠어요? 왜 대답이 없죠?”
자인의 웃음 띤 미소와 다르게 죽일 듯 노려보는 눈빛에 여자들은 제자리에 앉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알 것 같아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여자들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자인이 천천히 TV를 틀어 노래방시스템을 맞추며 말을 더했다.
“매일같이 찬양만 받으며 살고 있는 완벽한 저 자인이지만 저에게도 상처가 있답니다. 방.금.처.럼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데 지들은 날 안다는 식으로 막 떠들어대는 그 수군거림! 나 정말 싫어해요. 특히 직접 들으면 더욱더 말이죠.”
자인은 한 여자 한 여자 눈을 마주치며 최대한 불쌍한 듯 보이도록 눈물연기까지 선보였다. 여자들은 미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어찌할 바 몰라 했다.
“그렇지만 전 상처 받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오직 노래를 부르며 저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는 것뿐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도 노래를 부르려고 해요.”
“네?”
“어머! 마침 여기 노래방 기계도 있네요.”
여자들은 자인의 마지막 말이 무슨 소린가 싶은 찰나 자인은 시작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음악소리가 들리고 목을 가다듬은 자인은 여자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그런 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난 모두를 알고 있지. 닥쳐!”
자인은 탁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록 스타처럼 발광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 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 있으면 빨리 가지. 닥쳐!”
클라이맥스가 다가오자 두 손가락을 자신의 눈에다 한 번, 자신을 욕하던 여자들에게 한 번 그리고 목에다 손을 쭉 긋기를 번갈아 보였다.
“저기요, 자인 씨. 잠시만….”
“닥쳐!”
“….”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말 달리자! 예!”[원곡: <말 달리자>(크라잉 넛) ]
힘차게 노래를 부르던 자인은 간주가 흘러나오자 마이크를 한 여자의 손에 꼭 쥐어주며 말했다.
“노래 잘 부르시네. 가수해도 되겠어요. 수고하셨어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매니저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자인의 노랫소리가 문밖에도 울려 펴졌는지, 각 룸에서 대기하던 손님과 직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자인이 있던 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손님들. 무슨 일이신가요? 문제라도…?”
매니저의 물음에도 마이크를 손에 들고 멍하니 있는 여자들.
반면 자인은 꽤나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울먹거리며 매니저에게 다가가 여자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기 매니저님. 저 여자분들 미쳤나 봐요. 나 초대해놓고 갑자기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닥쳐? 어머! 망측해라. 매니저님, 여기 관리 잘 안 하시나 봐요? 좀 하셔야겠어요. 내가 다 민망하잖아요.”
“저기 자인님….”
“쉿!”
매니저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으나 자인이 먼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자인은 표정을 싹 바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이제 내 차례 되었겠죠? 우리 유나 양 기다리겠네. 나가볼게요.”
아무리 문이 닫혀 있어 보지 못했다지만 항상 TV로 보는 연예인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고 방에서 나온 자인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내뱉는 민지에게 브이를 그려 보였다. 그리고 VVIP실로 우아하게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