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카멜 사립학교 학생회
격돌! 리나와 로지스트니!
3#
소년의 말에 순간, 하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미간을 구긴 채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은지 자신의 앞에 널브러져 있던 차넬의 다리를 밟고 지나갔다.
하지만 차넬은 눈을 질끈 감고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하영은 벌떡 일어나 소년에게 소리 질렀다.
“야! 너 미쳤어? 사람 다리는 왜 밟고 지나가?!”
그러자 걸음을 멈춘 소년이 몸을 돌려 하영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린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소년이 미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실로 어마 무시한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하영은 개의치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빨리 차넬한테 사과해!”
그때, 주저앉아 있던 차넬이 하영의 손을 붙들며 애원했다.
“리나, 그만 해. 나 진짜 괜찮아. 응?”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소년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영에게 물었다.
“네가 리나인가? 아아, 알만해. 끼리끼리 논다더니 보잘 것 없는 가문의 벌레들이 늘 시끄러운 법이지.”
‘벌레?’
하영은 그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소년은 말을 멈추지 않고 이어나갔다.
“하여간 분수를 몰라, 태어날 때부터 자리는 정해져 있는 걸 모르고 기어오르는 꼴이라니. 마나 발동? 그딴 걸로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너희는 그냥 벌레일 뿐이야.”
‘벌레일 뿐이야.’ 그 말에 하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성의 끈을 놓았다. 그녀는 냅다 달려가 소년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렸다. 그러자 소년은 갑자기 당한 일격에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이 ‘어떡해, 쟤 미쳤나봐.’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영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같은 놈들 많이 봤어, 자기 능력이 안 되니까 늘 남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놈들! 내가 벌레라고? 너는 벌레만도 못한 새끼야!”
“뭐, 뭐라고?”
소년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분노의 얼굴로 하영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순간 그 기세에 눌린 하영이 몸을 움츠렸다. 소년은 이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목에 걸려있던 영롱한 검정 펜던트 목걸이가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그의 오른손에 작은 바람이 모여들어 구를 형상화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앞 다퉈 도망을 쳤다. 마치 그때처럼.
‘내가 파이어 볼을 날렸을 때랑 똑같아. 혹시 저것도 마법인가? 어쩌지?’
하영은 마치 누군가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는 것처럼 몸을 쓰지 못하고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죽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싸움인가요?”
그 목소리에 아직 남아있던 학생들이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에리스다! 죽음의 사자다!!”
그러자 소년의 오른손에서 커지고 있던 구(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운이 좋군.”
그 말과 함께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하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소년은 그녀의 작은 턱을 잡아 쥐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마 상상도 안 될 거야, 그치?”
소년이 하영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기대해, 상상 그 이상일 테니까.”
하영은 소년의 시선을 마주하며 느꼈다. 이것은 분명한 살기라는 것을.
그리고 소년은 하영의 턱을 놓고서 자신이 가려했던 방향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마침내, 소년이 눈에서 멀어지자 하영은 멈췄던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뒤에서 차넬이 달려와 하영을 안았다.
“리나 괜찮아? 어디 다치진 않았어?”
“응, 괜찮아. 너야말로 몸 괜찮아? 다리 안 다쳤어?”
하영이 차넬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넬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더니 눈을 반짝였다.
“응응, 나 괜찮아! 리나가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다!”
차넬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하영은 살짝 당혹감이 들었다.
‘확실히 어린애 같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스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어머, 싸움이 끝났나 보네요.”
에리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샤샥!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라, 어디 갔지?”
하영이 사라진 에리스를 찾고 있자 그녀의 배에서 또다시 꼬르륵 소리가 요동쳤다.
‘윽, 역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했어.’
그 소리를 들은 차넬이 다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하영의 손을 잡았다.
“밥 먹으러 가자!”
****
하영과 한바탕 설전을 치룬 소년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학교의 호수가로 발길을 옮겼다.
털썩
나무에 기대앉은 소년은 그제야 터진 입술을 매만졌다.
“제기랄. 그딴 여자애한테…….”
그때,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소년의 앞에 다른 소년이 나타났다.
연한 갈색의 머리칼과 푸른 달빛을 녹여낸 듯한 눈동자, 탄탄한 어깨와 매끄럽게 이어지는 허리는 소년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역삼각형 몸매를 이루고 있었다.
로지스트니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세이가르였다.
미소를 머금은 세이가르가 로지스트니에게 물었다.
“로지, 무슨 일이야?”
그를 발견한 로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또 어딜 갔다 온 거냐? 매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니 내가 이런 꼴을 당하지.”
그 말에 세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곁에 앉았다.
“이 학교에 너를 건드릴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운데, 일방적으로 맞은 거야?”
세이의 물음에 로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반격을 해보지도 못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더 얘기하면 죽여 버린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로지의 눈엔 살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을 바라보던 세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저하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군요.”
세이의 농담에 로지는 반응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자신에게 주먹질을 한 하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시선, 건방져…….’
로지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하영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아버지 말곤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용납할 수 없다.
“가만 놔두지 않겠어.”
로지스트니 드가 카트리샤. 제국의 황태자인 그가 하영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
차넬의 손에 이끌려 식당으로 들어간 하영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고기 덩어리와 산처럼 쌓여있는 베이컨과 소세지. 각가지 싱싱한 샐러드와 빵이 식당의 기다란 식탁 이곳저곳에 널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파티가 열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저기서 먹자.”
식당의 구석자리로 간 하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베이컨과 빵을 입에 넣었다.
‘이럴 수가, 너무 맛있다!’
가히 충격적인 맛에 하영은 더욱 속도를 내 음식을 해치웠다. 차넬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배고팠나 보다. 리나가 이렇게 많이 먹는 모습 처음 봤어.”
“그래? 원래는 소식했나봐?”
“음,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리나는 항상 세 숟갈을 넘기지 않았어.”
‘세 숟갈?!’
차넬의 말에 하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사람이 그렇게 먹고 살 수가 있어?”
그러자 차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먹으면 오히려 속이 더부룩하다고 했는걸.”
하영은 갑자기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긴, 이런 몸을 유지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할 텐데… 하, 자신이 없다. 미안합니다, 리나!’
하영을 두 손을 모아 사죄의 뜻으로 리나에게 사죄를 했다. 차넬은 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데 아까 그 싸가지 없는 놈은 대체 누구야? 아는 사이야?”
하영의 물음에 갑자기 차넬의 표정이 굳어져갔다. 아까의 공포를 떠올리는 듯 했다.
“로지스트니 드가 카트리샤… 이 학교의 학생회장이야.”
“에? 그런 녀석이 회장이라고? 그럼 우리보다 학년이 높은 거야?”
하영은 좀 전에 보았던 중간고사 시험지에 적혀있던 1학년을 기억해냈다. 하영의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리나는 1학년이었다.
차넬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와 동급생이야.”
그 대답에 하영은 의문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2학년은 돼야 학생회장의 자격이 생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1학년이 학생회장이라니?
“그게 가능한 거야? 1학년이 학생회장이라니…….”
다시 차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카트리샤의 황태자는 가능하더라구. 로지스트니가 입학하고 나서 그가 학생회의 룰을 바꿔놨어. 이제는 1학년도 학생회장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됐어.”
‘황태자?’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출마한다고 다 뽑히는 건 아니잖아.”
그 얘기에 차넬이 씁쓸하게 웃었다.
“로지스트니 말고는 아무도 출마하지 않았어. 감히 카트리샤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야.”
‘뭐야… 그 정도로 대단한 놈이었어?’
마주 앉아 있던 차넬이 고개를 푹 숙이며 흐느꼈다.
“미안해… 내가 바보같이 앞도 안보고 뛰어가는 바람에……. 리나까지 곤란하게 돼버렸어.”
그 말대로 하영은 이제 앞날이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차넬이 풀 죽어있는 모습을 보니 하영은 그녀답지 않게 허풍을 떨었다.
“뭐가 걱정이야, 괴롭히면 파이어 볼로 다 쓸어주지 뭐! 걱정하지 마.”
겉으로는 의기양양 웃고 있었지만 하영은 자신이 없었다. 그 엄청난 힘을 다시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까지 의기소침해지면 차넬이 계속 슬퍼하겠지.’
하영은 환하게 웃으며 차넬에게 말했다.
“배부르다, 우리 이제 방으로 올라가자.”
하영과 차넬은 식사를 마치고 같이 별관의 기숙사로 향했다. 하지만 갑자기 차넬이 무언가 깜박했는지 하영에게 먼저 방으로 가 있으라 하고는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갔다.
때문에 먼저 방에 도착한 하영은 할 일이 없어 구석구석 방을 구경하다 리나의 사진이 걸린 책상을 발견했다.
“리나의 책상인가?”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은 하나의 흠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영은 그 옆에 붙어있던 작은 책장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책장 중앙에 이상하게 눈길이 가는 책이 하나있었다. 하영은 무의식적으로 그 책을 꺼냈다. 그러자 그녀의 손길이 닿은 책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결계 마법인가?”
대체 어떤 책이길래 결계 마법까지 있는 걸까, 하영은 의아해하며 그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보통의 책이 아닌 리나의 일기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