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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작가 : 라한
작품등록일 : 2016.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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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편지
작성일 : 16-09-24     조회 : 515     추천 : 1     분량 : 1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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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욱의 편지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안녕! 참, 너도 내 이름을 모르고 나도 네 이름은 모르는구나. 내 이름은 민욱이야. 김민욱. 너는 이름이 뭘까?

  오늘부터 나는 떠돌이야. 집을 나왔거든. 사실 집이라고 할 것도 평생 없었어. 아버지랑 매일 고시원이나 여인숙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거든. 고시원에 살 때는 아버지 혼자인척 1인실에 먼저 들어가고, 새벽에 몰래 나도 들어가 살기도 했어. 돈을 아꼈어야 하니까.

  우리 아버지는 못생기고 덩치도 작아. 그런 몰골로 막노동 자리도 거의 얻을 수 없었어. 글도 거의 읽을 줄 몰라. 정말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인간이야. 물론 그런 인간의 피조물인 나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학교에는 발을 붙여본 적도 없어. 거기에 아버지처럼 나도 저주스럽게 못생겼고 왜소해.

  어머니는 어딨냐고? 내가 적어도 기억이란 것을 머리에 쌓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어머니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어.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본 적도 없었어. 아버지와 함께 나를 낳은 사람이면 그 사람도 분명 신으로부터 끔찍한 저주를 받은 인간일테니까. 그게 분명하니까.

  내가 아버지를 떠난 건 오늘 새벽이야. 그저께 신림동에 있는 고시원에서 쫓겨나고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야, 이 세상은! 그 넓은 서울역 안에 우리 몸뚱이 하나 붙일 곳이 허락되지 않는 더러운 세상!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와야 했어. 하늘에선 오라질 눈까지 내리고 있더라. 아버지는 그냥 서울역 계단 구석에 쓰러져버렸어. 난 정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꼴을 보고 말았어. 너무 화가 났어. 더는 앞으로 이런 꼴을 보고 싶지도 않고 나도 그렇게 되기는 싫었어. 그래서 무작정 아버지를 버려두고 발길이 가는 곳으로 걸었어. 아버지는 나를 잡지 않았어. 아니, 그럴 힘도 없었어.

  눈물이 났어.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울었어. 정신을 차려보니까 충무로까지 걸어왔더라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고 정신도 없었어. 거기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어.

  먹을 것 좀 얻을 곳이 없나 주위를 둘러 봤어. 은행 앞에서 토스트를 팔더라. 그래서 그 앞에 서서 2시간이나 지켜보고 있었어. 혹시나 팔다 남으면 나를 주지 않을까하고 말이야. 결국 아줌마도 내가 불쌍했는지 이리로 와서 이거 하나 가져가라고 하셨어.

  토스트 받고 극장 앞에 있는 의자로 갔어. 근데 커피도 없이 앉아있는 건 눈치가 보이더라. 더군다나 나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인간이 거기 앉아 있으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도 싫어할 테니까. 그래서 그냥 골목 구석에 앉았어. 최대한 천천히 토스트를 아껴 먹으면서 사람 구경이나 했어. 거기 앉아있으면 롯데리아 2층에 있는 사람들이 훤히 보이더라. 나도 거기 있는 사람들처럼 예쁜 옷 입고 무언가 사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직원들처럼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했어. 한 끼에 5000원 넘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 먹는 상상. 유니폼 같은 거 입고 일하는 상상.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들. 매일 혼자 지하철 계단에 앉아서 구걸 하고 있을 때면 하던 상상들.

  얼마나 멍청하게 오래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어. 네가 온거야. 네가 와서 따뜻한 햄버거가 들어있는 봉지를 내밀었어. 내가 얼마나 불쌍하고,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으면 그랬을까. 그래도 처음이었어. 구걸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나한테 뭔가를 준 사람은.

  나한텐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 살 돈도 없어. 돈이 있다고 해도 너한테 편지를 써서 줄 용기와 그 명분은 더더욱 없어. 그래서 진짜 편지를 쓸 수는 없어. 그냥 속으로, 마음속으로 쓰는 편지야.

  고마워. 안녕.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나한테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 둘이나 더 생겼어. 규선이 형하고 민이 형.

  규선이 형은 동국대 후문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이야. 아버지를 떠난 날에 밤이 돼서 너무 배고프고 지친거야. 그래서 구걸을 하기 시작했어. 밤에 구걸해봐야 천원이라도 주는 사람이 없더라. 술에들 취해서 비틀대는 학생들 밖에 없고. 그래서 어쩌다보니 대학교 후문까지 가게 됐어. 너무 추워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 어디든지 일단 들어가고 봐야했어. 그래서 그냥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지. 시계를 보니까 12시가 넘었더라. 한 30분 정도 그냥 안에 있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어. 그 때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는데 규선이 형이 친절하게 직접 따라다니시면서 물건들 골라주시고 바깥에까지 배웅해주시더라. 그래서 혹시나하고 규선이 형한테 가서 구걸을 했어. 제가 돈은 없고 배가 너무 고픈데 혹시 남는 음식 없냐고. 분명히 쫓겨날 거라 생각하고 물어본 거였어. 그런데 뜻밖에 규선이형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하시는거야. 그러시고는 오늘 유통기한 1시간 지난 김밥이랑 도시락들이라면서 맘대로 먹으라고 그것들을 주셨어. 그리곤 계산대 옆 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먹으라고 담요가 깔린 자리도 내주셨어. 나는 고맙단 말도 못 하고 규선이 형 옆에 앉아서 허겁지겁 도시락 까먹기 시작했어. 규선이 형이 물도 갖다주시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나이도 어려보이는 데 무슨 사정이냐고 물어보셨어. 그래서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지. 규선이 형이 그럼 주중에 형이 일할 때는 밤에 와서 남은 것들 먹고 가라고 하셨어. 정말 고마우신 분이야. 그래서 오늘까진 밥걱정이 없었어. 지금도 규선이 형 옆에 앉아있어.

  그리고 민이 형. 그분은 오늘 아까 편의점에 오셨던 분이야. 규선이 형이 9시부터 일하시니까 나도 그 시간에 맞춰서 편의점에 와 앉아있었어. 10시가 좀 넘었을 때였어. 어떤 대학생 쯤 돼 보이는 형이 들어오더니 규선이 형한테 고개 숙이면서 인사하고 몇 마디 주고받더라. 그 형 이름은 민이였어. 윤민. 풍채도 좋으시고 얼굴도 잘생기셨더라. 옷도 목에 털이 달린 가죽잠바에 재질이 좋아 보이는 잿빛 바지였고, 좋은 구두까지 누가 봐도 부잣집 아들 같으셨어. 밖에는 자기 차까지 끌고왔고.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민이 형은 이 학교 다니는 여자친구를 데리러 거의 매일 오시는 거 같아.

  2, 3분 쯤 안부를 묻다가 갑자기 날 보고 이 꼬맹이는 누구냐고 하시는거야. 그래서 규선이 형이 15살짜리 앤데 여기 자주 놀러온다고 하셨어. 그러셨더니 민이 형이 날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으셨어.

  “이봐 꼬맹아, 집 없냐? 부모님이 안 찾냐? 이 늦은 시간에 뭐하는거냐?”

  별로 친절하신 분은 아닌 거 같으셨어. 난 형님의 기에 눌려서 한 마디도 못하고 있었어.

  “꼬맹이, 보아하니 집 나온 거 같네. 뭐 다 그럴만한 일이 있겠지. 내가 니

  친형이 아니니 집에 처넣지는 않겠다만 기왕이면 여기서 규선 형님 괴롭히

  지 말고 다른 데라도 가 있어라.”

  그러시고는 지갑에서 2만원 꺼내서 나한테 주시더라. 그러시곤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담배 하나 꺼내 무시고는 규선이 형한테 이제 서영이 나올 시간 됐으니 가보겠다고 하시곤 나가셨어.

  규선이 형은 쟤가 말은 좀 저렇게 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시곤 그냥 여기 있으라고 하셨어. 그래, 민이형님도 나쁘신 분은 아냐. 내가 뭘 구걸하지 않았는데 도움을 준 두 번째 사람이니까.

  나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해가 떠있는 동안엔, 너 만났던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어. 혹시 너 다시 올까봐. 뭘 또 줄까봐 이러는 건 아냐. 그냥 너 보면 고맙다고 하고 싶어. 내일도 앉아있을게. 꼭 다시 와줘. 기다릴게.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규선이 형이 아침 7시에 퇴근하실 때 같이 나왔어. 본래 주중에만 일하시는데 주말에 일하시는 분이 그만두셔서 당분간은 주말에도 일하신대. 나한텐 정말 다행이야.

  규선이 형은 이제 눈 좀 붙이러 가신다고 집에 가셨고 난 언덕을 내려오면 있는 파리바게트 사거리 24시 감자탕집에 들어갔어. 식당에 들어가 본 건 정말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랜만이야. 널 기다리면서 상상했던 대로 5000원 넘는 한 끼도 먹을 수가 있었어. 민이 형 덕분이야.

  오늘도 8시 쯤 부터 거기 앉아있었어.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지 춥지도 않고 졸음도 왔어. 그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어디서 네 목소리가 분명한 음성이 들렸어. 저번에 별로 많이 듣지는 못했지만 네 목소리는 확실히 기억에 남아있었거든. 전화를 하고있는 거 같았어. 가서 말이라도 하고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뒤도 못 돌아보고 앉아있었어. 그리고 당치않게도 네가 왠지 말을 걸어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거든, 그래서 네가 전화하는 걸 듣고만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네가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야! 뭐? 그 다운증후군 환자나 돕고 있으라고? 야! 야! 끊었냐?”

  그 때 깨달았지. 네가 나를 다운증후군 환자로 생각하고 불쌍해서 날 도와줬다는 걸. 다운증후군이라는 병, 나도 잘 알고 있어. 책에서 읽었거든.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근처에 있는 아무 도서관이나 매일 들어가곤 했었어. 더위와 추위를 피하려고. 거긴 다른 곳처럼 누구 눈치 안 보고 앉아있어도 되거든. 도서관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다 책 읽고 있는데 나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어서 나도 매일 책을 읽었어. 게다가 책을 읽으면 배고픈 것도 잊을 수 있었거든. 그러다가 우연히 읽게 된 책 중에 <우리 누나>라는 책이 있었어. 화자가 다운증후군에 걸린 누나를 서술하는 내용이야. 책의 내용에 따르면 다운증후군에 걸리면 3살 정도의 지능에서 두뇌 발달이 멈춰버리고 얼굴도 이마와 입이 튀어나오고 원숭이처럼 변하게 되는 병이랬어. 그래, 넌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봤던거야.

  조금 비참해졌어. 하지만 별로 화도 나지 않는 건 내 몹쓸 꼬락서니가 그 이하이면 이하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그리곤 별 생각도 하기 전에 네가 나한테 다가와 말을 걸어버렸어.

  “안 추워요?”

  순간 나는 생각했어. 이제부터 정말 다운증후군 환자처럼 행동해야겠다고 말이야. 그래야 네가 나 따위에게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미안한 감정이 너에게 못 오게 될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네가 앞으로도 나를 찾아와 줄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너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최대한 바보처럼 말했지.

  “추!어!”

  그리곤 나이를 물어봤을 때에도 최대한 어린 아이들처럼 나이를 손가락으로 세는 척 하면서 대답을 했고. 이어서 네가 긴 질문을 했을 때엔 못 알아듣는 척 다시 춥다는 말을 반복했지. 그리고 네가 이름을 물어봤을 땐 최대한 바보처럼 민욱이란 이름을 얘기했어. 그런데 넌 내 이름을 민우라고 들었더라. 그래, 내 이름이 뭐가 됐던 어때? 다시 만나게 됐는데 말이야.

  네가 내 손을 잡고 날 일으켜줬어. 그리곤 내 손이 차다며 꼭 잡은 내 손을 네 주머니에 같이 넣어줬어. 그리고는 천천히 같이 걸었어.

  점심을 먹자고 네가 나를 데려간 곳은 스테이크를 파는 식당이었어. 평생에 들어가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책에서나 가끔 본 듯한 그런 곳에 나를 데려 온거야. 네가 익숙하게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난 네 얼굴만 빤히 쳐다봤어. 아니 그 이후에도 네가 내 앞에 있으면 네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어. 이 연극에서 이 한심한 배역을 맡은 자의 특권이었거든. 그리고는 음식이 나오자 한심한 연기를 또 시작했지. 빵을 손에 쥐고 최대한 흘리면서 먹고 스프도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그릇째로 마셔버리고. 그런 내 연기에 속아주고 있는지 너는 직접 나한테 스테이크도 썰어주고 손에 포크도 쥐어줬어. 밥을 다 먹고는 네가 멋지게 카드로 계산을 했어. 나도 너에게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는 다시 내 손을 잡아 이끌어줬지. 내 손을 잡고 명동을 돌아다녔어. 길바닥에 널브러진 옷이 아닌, 네가 날 데리고 들어갔던 옷가게의 진열 된 옷들은 나 같은 놈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었겠지. 그런 넌 그저 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한숨만 내쉬었어. 그래도 난 그냥 네 얼굴만 빤히 볼 수밖에. 액세서리들을 몸에 해 보면서, 말도 못 하는 병신에게 웃으며 예쁘냐고 물어보는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으니까.

  항상 아버지의 바리캉에 밀려나가던 내 덥수룩한 머리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용실 가위를 만나봤어. 멋있고 예쁜 옷을 줘 봐도 민이 형처럼 입을 수도 없는 병신이긴 하지만, 그런 멋진 옷은 아니라도 이번 겨울을 내 삶의 그 어떤 겨울보다 따뜻하게 만들어 줄 깨끗한 옷들도 걸쳐 주었어.

  저녁 먹을 때, 네가 나한테 잘해주는 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했어. 그 말이 잠시 망각했던 내 처지와 네 위치를 상기시켜줬어. 고귀한 신분 그리고 그 신분에 따른 책임일 뿐인 놈. 난 그냥 묵묵히 밥을 먹었어. 너와 네 친구가 말다툼을 할 때에도 난 어떻게 하면 더 병신같이 굴까 그 고민만 했어. 바보처럼, 아니 나는 병신이니까 오늘 몇 끼 먹었냐는 네 질문에도 틀린 답을 말했어.

  밥을 먹고 나와서 네가 손에 쥐어 준 도넛들. 난 그냥 도망갈 수밖에 없었어. 왜 그런지는 나도 몰라. 정말 그냥 달아나고 싶었어.

  달아나버려서 이젠 네가 나를 찾아와주지 않을까 두려워. 너무 무서워.

  그래도. 내일도 그 자리에서 기다릴게. 안녕.

 

 2010년 12월 15일 수요일

  오늘도 네가 오지 않았어. 그래도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진 계속 거기서 기다렸어. 이젠 더 이상 예전만큼 춥지 않았어. 날은 더 추워졌어도 네가 사준 옷들이 날 지켜주고 있거든. 낮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너를 기다리기만 해도 괜찮아. 네가 와줄 거란 생각만 하고 있어도 배가 부르고 온 몸이 따뜻해져. 나는 심심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아. 아니, 이미 이골이 난걸까? 나란 놈은 살아온 내내 거리에서 가만히 있던 놈이니까.

  그래도, 그러니까 다시 와줘. 기다릴게.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오늘도 오지 않는구나. 괜찮아. 내일은 올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매일매일 내일은 올 거라는 희망은 있으니까.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오지 않았어.

  해가 지고 규선이 형에게로 갔어. 앞에서 검은 색의 긴 더블코트를 입고 계신 민이 형이 검은색 담배를 피우면서 형 차에 기대 계셨어. 민이형이 날 보시고는 물으셨어.

  “어, 꼬맹이. 너 정말 매일 와서 형님한테 폐 끼치는구나? 농담이고, 너 낮

  에는 뭐 하면서 돌아다니냐?”

  “저, 저요? 그냥 누구 기다려요.”

  “기다린다고? 하루 종일? 이 새끼 꽤나 감상적인 놈이네. 하긴… 너 몇 살

  이지?”

  “열다섯이요.”

  “그래, 좋을 때다. 중학교 2학년…. 그 땐 좀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이어야지.

  난 그 나이 땐 커서 지구도 정복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리고 그 때 아니

  면 언제 한없이 누구 기다려 보겠냐?”

  “왜요? 형도 거의 매일 형 여자친구 기다리시잖아요.”

  “이 새끼…. 달라. 너도 여자 기다리는거지? 꼴에…. 씨발, 그 땐 진짜 하루

  종일 눈 펑펑 오는 데서 서있어도 기분 좋지. 아, 물론 지금도 여자친구 기

  다리면서 기분 나쁘고 하진 않아. 기분 좋지. 근데 말이야…. 느낌이 다르단

  다, 꼬맹아. 뭔가 달라. 뭐랄까, 너 때는 아마 이 여자랑 다 될 거 같은 느

  낌? 우리만 사랑을 할 줄 알고 우리만큼 예쁠 수 없고 앞으로 누구도 우리

  처럼 사랑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세상에서 우리만 영화 찍고 앉

  아있는거야. 막, 우리 얘기로 영화 찍고 소설도 쓸 수 있을 거 같지. 안 그

  래?”

  “글쎄요… 저는…….”

  “다 그래. 글쎄요는 무슨. 하긴…, 살면서 그런 생각을 가끔 들게 하는 사람

  을 또 만날 때도 있어. 서영이가 내게는 그런 사람이야. 근데 정말 뭔가 느

  낌이 다르지. 느낌이 다르다는 말이 맞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좀 더

  현실적인 사항들이 섞여서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여

  튼, 그 때 잘 해둬. 나중에 추억 뜯어먹고 버텨야 할 그 날이, 그 시간이 올

  테니까.”

  민이형은 담뱃불을 구두 뒷 굽에 끄고는 다시 한 가피를 더 꺼내서 불을 붙였어.

  “꼬맹이, 추운데 안 들어가냐? 나한테 돈이라도 필요해?”

  “아, 아녜요. 그런 거.”

  “아, 이 새끼, 그냥 말로 해라. 그런 병신 같은 표정으로 뚫어지게 보지 말

  고.”

  민이형이 지갑을 여셨어. 돈을 세시더니 5만원이나 주셨어.

  “들어가서 뭐 따뜻한 거 사먹어. 형님한테도 뭐 사드리고. 매일 이러면 미

  안하잖냐? 아껴쓰고. 아 저기 오네. 그럼 나 간다.” 민이형은 후문 계단에서 내려오는 서영이라는 형님 여자친구한테 달려갔어. 형은 다른 사람들 다 보는데도 신경도 안 쓰고 달려가서 여자친구를 안아서, 두 팔에다 들고 차까지 오셔서야 내려주셨어. 서영누나는 사람들 다 보는데 왜 이러냐고 소리는 지르셨지만 웃고 계셨어. 많이 행복해 보이셨어. 서영누나는 정말 미인이셨어. 민이형도 정말 미남이시고. 형님의 말씀대로, 사실 니체의 말대로, 두 분의 모습은 세상에서 그들만이 사랑을 하고 있고, 세상 누구도 그들만큼 예쁠 수 없으며 앞으로 그 누구도 그들만큼 사랑할 수 없을 거 같은 모습이셨어. 그런 형님도 품안에 숨겨두셨다 꺼내 뜯어 먹어야 할 무언가 갖고 계신 걸까?

  민이형님이 가시고 한참 앞에 있고나서야 규선이형에게로 갔어.

  “뭘 그렇게 보다 온 거야? 민이 여자친구 미모에 놀랐냐?”

  “아뇨, 그냥 두 사람 모습이 너무 예뻐서요.”

  “다 끼리끼리 노는거지. 배 안고파? 뭐 먹을래? 아차, 아직 재고 정리 할

  시간은 좀 더 남았고…. 그냥 뭐 하나 집어 먹어. 사줄게.”

  “민이형이 돈 주셨어요. 오늘은 사먹을게요.”

  “민이가? 에이…, 그래도 괜찮아. 그냥 먹어 그 돈 아꼈다가 주말에 나 없

  을 때 써.”

  나는 그냥 아무것도 고르지 않고 규선이형 옆에 앉았어. 그리곤 그냥 규선이형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했고.

  벌써 11시나 됐구나. 규선이형은 아까 편의점 앞에서 대학생들이 어질러 놓고 간 술판을 정리하고 있어. 난 계산대 옆에 엎드려 있고. 오늘따라 너무 졸려. 거의 잠을 안 자도 별 탈 없이 살았는데 오늘은 너무 졸려.

  안녕. 지금 자면 꿈에서 니가 날 보러 와줄까? 난 꿈에서도 기다릴까?

 

 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오늘도 기다렸어. 오늘도 오지 않았어.

  해가 지고도 한참 있다가 편의점으로 갔어. 편의점엔 규선이형이랑 민이형이랑 서영누나 셋 다 계셨어.

  “어, 꼬맹이. 오늘은 나랑 좀 가자.”

  “네?”

  “잔말 말고 따라와. 그럼, 형님, 안녕히 계십쇼. 서영아, 가자.”

  어쩔 수 없이 규선이형한테 인사하고는 민이형 차 뒷자리로 끌려갔어.

  “어디 가시는데요?”

  “뭐 별건 아냐. 그냥 너 좀 씻기고 따뜻한데서 재울려고. 우리 지금 신촌

  가는 길인데 그냥 잔말 말고 따라와.”

  형님은 나한테 잘해준다. 대체 왜 그럴까? 한참을 말없이 실려가다 물었어.

  “형…,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가요?”

  “…… 집나온 꼬맹이가 잘도 아는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요?”

  “그렇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저는 책임이군요.”

  “꼬맹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노블레스인 사람에게 따르는 책임인거야.”

  “…”

  “노블레스. 귀족. 그래, 여긴 대한민국이고 자본주의 경재체제야. 그러니까

  돈 있는 놈이 귀족이지. 근데 말이다. 난 귀족 아냐. 귀족은 귀족집안에 태

  어난 놈이 귀족인거야.”

  민이 형은 분명 돈이 많아. 그런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됐어.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유, 이 오빠 또 어려운 소리 한다.”

  “꼬맹아, 서영아, 난 돈 많아. 그리고 의대생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많을

  거야.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돈 많고 배운 집에 태어난건 아니었어. 우리

  아버지 평생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도 박봉이나마 맞벌이 하셨어. 아, 물론 힘들게 살았다곤 못 하지. 지방에서 그정도면 평범함 보단 좀 나은거지. 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 주신 집도 있고. 그래도 난 어릴 때 그게 너무 싫었어. 그래, 귀족. 자본주의 귀족. 돈 맘대로 쓰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거기다 학벌까지 좋고. 나

  도 어릴 때 그게 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죽어라 공부했고 또 정말 우연찮게

  벤처투자로 나이에 맞지 않게 돈도 넘치게 벌었어. 근데 그렇게 하고 나서도

  난 귀족이 아니더라. 그냥 돈 많고 많이 배운 중인(中人) 신분일 뿐이었어.

  대학 가서, 또 사회생활 하면서 정말 귀족인 놈들 보고 느낀 거야.”

  “에이, 오빠도 참….”

  “태생 귀족인 놈이 귀족이야. 족보 샀다고 양반이 되는 게 아니라고. 내 신

  분은 영원히 보통 버는 집에 보통 자식놈인거야.”

  “그래도 오빤 이제 돈도 많고 배운 사람인데?”

  민이형이 피식 웃고는 말했어.

  “그래, 서영아, 너하고 나하고 결혼해서 애 낳으면 걔는 귀족이야. 태생 귀

  족. 서영아, 그럼 우리 얼른 걔 만나러 갈까? 얼른 도련님, 아가씨 하나…”

  “아, 참! 오빠는 애도 있는데….”

  “히힛, 장난이야. 아무튼 태생 귀족이 귀족이야. 태생은 불변이야.”

  이후로 말없이 신촌까지 갔어. 가는 내내 생각했어. 무슨 말이었을까.

  신촌에 다 도착해서 유플렉스 사거리 큰길에 차를 세웠어. 민이형이 서영누나한텐 나 데려다 주고 온다고 하시곤 나보고 얼른 내리랬어.

  “가자.”

  골목길로 조금 들어가니까 늘어선 모텔들 사이에 큰 찜질방이 보였어. 민이형이 앞장서서 들어가셔서 나도 따라 들어갔어.

  “어른 하나하고 학생 하나요.”

  민이형이 찜질방 옷이랑 열쇠 받아들고 남탕으로 갔어. 계단을 올라가다가 내가 물었어.

  “형, 그럼 저는 왜 도와주시는 거에요?”

  형이 걸음을 멈추시고 날 보셨어.

  “…사람이니까. 너도 네 자식 귀족 만들 기회는 받아보고 죽어야지.”

  “……”

  “자, 너 열쇠랑 옷이다. 난 이제 갈게. 너 미성년자라 나 없으면 지금 여기

  이 시간에 못 들어오니까 내가 같이 와 준거야.”

  민이형이 지갑에서 10만원이나 주셨어.

  “서영이네도 이제 방학이라 나는 당분간 편의점에 갈 일이 없어. 그러니까

  받아두고 아껴 써. 그리고 아버지 찾아 들어가. 내가 내년에 너 학교 들어

  가게 도와줄게. 돈 없거나 나한테 연락하고 싶으면 규선 형님한테 말하고.”

  민이형은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시고는 다시 내려가시면서 말했어.

  “잠도 푹 자라. 그래야 큰다.”

 

  정말 오랜만에 목욕탕에서 따뜻한 물로 씻었어. 그리고 오랜만에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있어. 깊이 잠들진 않을게. 내일 다시 충무로 그 자리에 가서 널 기다려야 하니까.

 안녕.

 

 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큰일났어. 오늘 내가 늦잠을 자버렸지 뭐야. 난 분명히 아침에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고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그게 꿈이었어.

  12시가 다 돼서야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어. 미친듯이 지하철로 가서 충무로로 달려갔는데도 이미 2시가 넘어버린거야. 그 때부터라도 계속 기다렸어. 혹시 내가 오기 전에 니가 왔다 가버린거 아냐?

  오늘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어. 그냥 여기서 밤새 기다릴게.

  안녕.

 

 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어. 해가 떴고 아마 1시 쯤일거야. 드디어 네 목소리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어. 네가 저번에 나를 만났을 때처럼 너는 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지. 너는 나를 앞에 앉혀두자마자 민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했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니가 말했어.

  “민우야!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그 사람도 나 좋아하는거 같고말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기 시작했어. 왜 그랬을까? 나란 놈이, 이 병신새끼가 널 좋아하기라도 했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너는…, 너는 ‘태생 귀족’인 아이인데, 이 병신이 뭐라고.

  이젠 아픈 사람인 척 하기도 힘들어졌어. 그래서 그냥 끌려다니면서 배시시 웃기만 했어. 그래도 너는 눈치 채지 못 해. 난 정말 병신이니까.

  너는 태생 귀족. 나는 병신. 추한 병신.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왔어. 나는 또 그 자리에서 기다렸고. 병신처럼 앉아서. 아니 병신이니까 기다렸어.

  똑 같아. 어제와 같아. 너는 사랑에 빠졌어. 같은 귀족한테.

  너는 태생 귀족 나는 병신. 추한 병신.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오늘도 같아. 병신은 기다렸고 넌 와줬고. 너는 고귀하고 난 천박해.

  태생 귀족. 병신

 

 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같아. 너무 똑같아. 오늘도. 귀족과 병신.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오늘도 넌 왔어. 오늘 넌 조금 더 활기차보였어. 인사를 하고는 청계천까지 가자고 했지.

 

  우린 지금 손을 잡고 걷고 있어. 언제나처럼 주머니 속에서 네 손은 내 차가운 손을 잡고 있어. 둘이 함께 차가운 거리를 걷고 있어.

 

  청계천이야. 물이 다 얼어버렸네? 이게 신기하다면서 넌 웃고 있어. 너무 아름다워.

 

  청계천 다리 아래를 보고 있어. 아래 얼음에 일그러진 내 얼굴이 문득 비추고 있어. 저 일그러진 모습이 오히려 내 진짜 모습보다도 잘생겼어. 비참해. 너는 귀족이고 나는 병신이라서.

 

  언젠가 니가 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일기에 적는다고 했어. 나, 민우에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내 마음 속으로만 이런 닿을 수 없는 편지를 쓰지만 너는 직접 펜을 들고 일기에다 쓴다고 했어. 너의 비밀을 말해도 좋은 내가 일기만큼 고맙다고 했어.

  속으로만 쓴 이 내 편지들을 너에게 전해주고 싶어. 이제 와서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나를 경멸할거야. 그리고 나를 다시 찾지 않겠지. 너를 속였으니까. 차라리 내가 니 일기라면 좋겠어. 하다 못해서 정말 니가 아는 민우가 되어버렸으면 좋겠어.

 

  지금 청계천 다리 난간에 위태롭게 걸려있어. 민이형은 내 자식이 귀족이 될 기회를 주고 싶어 하셨지. 하지만 나는 안 돼. 민이형은 처음부터 나처럼 천민으로 태어났던 건 아니셨거든. 하지만 나는 병신 상놈이니까. 그런 기회조차 가져서는 안 되는 바닥에 깔린 신분이니까. 차라리 난 네 일기장이 되거나 정말 민우가 되어버리는 편이 좋을 거 같아.

 

  아래에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있어. 저기에 내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진짜 민우가 되어버리겠지? 이제 그렇게 할 거야. 혹시 죽는다면? 그럼 다음 세상에선 태생 귀족, 아니 하다 못해서 이런 병신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라도 태어났으면 좋겠어. 귀족인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떨어지고 있어. 자유로워. 민서야, 너도 민이형하고 서영누나처럼 세상에서 너와 너의 연인만 사랑을 할 수 있고 너희들만 그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앞으로 그 어떤 누구도 너희들만큼 사랑할 수 없을 것처럼 사랑하면서 살아.

  내가 정말 민우가 되어버리면 가끔 나를 찾아와서 니가 사랑하고 있는 얘기도 들려주고.

 

  모든 게 환해졌어.

 

 

 

 

 

 

 

 

 

 

 

 

 

 

 

 

 

 

 

 

 

 

 

 

 

 

 

 

 

 

 

 

 

 

 

 

 

 2010년 12월 25일 토요일 크리스마스-민서의 일기

 

  안녕 민우야!

  어제 정말 깜짝 놀랐어. 민우가 갑자기 난간 아래로 떨어져버린거야!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말이야. 민우가 어제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그냥 민우가 떨어지는 거 보고는 기절해버렸으니까. 오늘 아침에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옆에 있던 아빠한테 민우가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했어. 그리곤 더 알아볼 틈도 없었지! 민수오빠랑 만나야 했으니까.

  아빠는 어디 가지 말라고 계속 말렸는데 그냥 링거 바늘 뽑아버렸어. 어쩔 수 없이 아빠도 그럼 얼른 퇴원하자면서 퇴원절차들 다 처리했고 12시 전에 일단 집에 들어갔어. 집에 가자마자 씻고 옷들도 막 입어보고 화장도 해보고 난리도 아니었어!

  민수오빠한테 2시에 코엑스에서 만나자고 했어. 오빠 집이 그 근처거든. 그래서 오늘 오빠랑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완전 재밌었어. 자세히 더 말해주고 싶은데 오늘 너무 피곤해서 얼른 자야겠어.

  안녕~~~~~!

 

 

 

  ……덩어리는 없다. 항상 그래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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