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여정의 마무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돌아갈 것이다.
“그대 궁극에 이른 네크로맨서여….”
도깨비불처럼 붉은빛의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차원 관리자의 그 묘한 생김새만큼이나 묘한 음성이 웅웅 귓전을 때렸다.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백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참고 견딘 삶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한시도 잊은 적 없었던 그곳.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어디긴, 당연히 서울이지.”
아르펜 행성에서의 20년,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1. 지구 귀환
차원 관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몸을 감쌌다. 온몸이 세포 단위로 쪼개져 부유하는 신기한 경험과 함께 암흑이 찾아왔다.
시간마저 잊을 정도의 아득함에 겨우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강우진! 정신 차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이 흐르고 어둠에서 빛이 자라났다. 빛이 다가와 집어삼켰을 때, 세상이 밝아지며 쓰레기 냄새가 진동했다.
‘으으.’
신음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겨우 눈이 떠져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손끝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만져보니 재활용 마대 자루 위였다. 정체불명의 쓰레기 냄새는 거기서 나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가라앉았던 기억의 편린들이 떠올랐다.
‘학교 소각장.’
20년 전 이곳에서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쨌든 그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20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구나.’
조금 더 낡아 보인다 뿐이지 소각장은 그대로의 모습인 것 같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을 느끼며 조금씩 몸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야, 시발. 빨리 와, 개새끼야.”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교복의 학생들이 소각장으로 몰려왔다.
‘교복도 똑같네.’
20년이나 지났으면 교복의 디자인이 바뀔 만도 하건만 아직도 그대로인 모습에 반갑기만 했다.
사람을 보니 정말 지구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괜히 울컥한 기분이었다.
교복의 학생들은 척 보기에도 일진 같은 셋이 다른 한 명을 끌어오고 있었다. 찐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하고, 잘생긴 학생이었다.
“개새끼, 일단 맞고 시작하자.”
“내가 왜 맞아?”
“뭐? 이 새끼가.”
다짜고짜 날아오기 시작한 주먹에 둘이 뒤엉켜 개싸움을 벌였다. 옆에 있던 일진들이 가담하자 싸움은 일방적인 구타가 되었다.
“이 시발, 좆만이가 어디서 대들어?”
“존나 거슬리게 지랄이야. 조용히 학교나 다니지.”
일진 셋이 신나게 학생 하나를 밟는 걸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왠지 모르게 옛날 생각도 나고, 20년간의 참혹한 경험을 해서인지 애들이 귀엽게 보였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때리던 일진들이 숨을 헐떡이며 멈췄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꿈틀거리던 학생은 여기저기 긁히고 터져 상처가 생겼으나 눈빛만큼은 아직 죽지 않고 있었다.
일진들의 리더인 이수혁은 그런 도재민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 애들이 다 자기를 보면 무서워서 피하기 바쁘거나 선망의 시선으로 보게 마련인데 이 새끼는 저따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하, 시발. 재민아, 아프지? 존나 아프지? 그러게 누가 거슬리는 짓 하고 다니래? 학교 조용히 다니자, 응?”
“좆까. 시발.”
거슬리는 짓? 그저 조용히 공부만 하는 재민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잘생겼다는 것뿐이다.
이수혁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재민이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그가 맞고 있는 이유다.
“하, 이 새끼가 진짜 뒤져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이 새끼 못 움직이게 잡아.”
일진들이 재민을 붙잡아 누르는 사이 수혁은 허공에 대고 위협적인 발차기를 날렸다. 꼴을 보아하니 그대로 머리에 사커킥을 날릴 모양이었다.
그때, 우진의 감각이 모두 돌아왔다.
“아, 그쯤 해둬.”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수혁을 위시한 아이들이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활용 마대 자루 위에 웬 이상한 옷을 입은 남자가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발.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허, 시발? 애새끼들이 하늘 같은 대선배님을 뵙고도 한다는 말이, 시발?”
우진이 마대 자루를 타고 내려와 넘어 섰다. 아, 지구의 땅. 20년 만에 밟아보는구나.
일진이라도 어른 앞에선 그저 애들. 당황한 녀석들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일진들이 원래 학교 족보를 더 엄히 여겨….
“시발. 선배면 뭐?”
…기는 개뿔.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 가지? 웬 거지새끼가 끼어들어 지랄이야. 아저씨, 요즘 고딩 무서운 거 없어. 걍 가던 길 가세요.”
수혁은 거침없었다. 눈치 보던 일진들도 그의 기세에 당황했던 기색을 쫓았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이 시간에 선생도 아닌데 학교에 있는 놈이다. 그것도 소각장에. 동네 모자라는 형이 틀림없었다. 옷도 엄청 낡았고 말이다.
“허, 요즘 애들 싸가지들이 왜 이래? 20년 위의 대선배님 앞에서.”
우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수혁은 확신했다. 고작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놈이 20년 운운하는 것을 보니 정신 나간 놈이 틀림없다.
확신이 섰다.
“맞기 싫으면 꺼져, 이 새끼야.”
덜떨어진 인간은 겁 좀 주면 도망가게 마련. 그런데 위협적으로 추켜올린 손에 겁을 먹기는커녕 우진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이 새끼들 안 되겠네.”
우진이 앞으로 손을 뻗자 수혁이 움찔 놀랐다.
“…….”
“…….”
우진은 팔을 뻗고 당황했다. 왜 속박 마법이 발현되지 않지? 당황한 그를 향해 수혁이 인상을 구겼다.
“시발. 뭐야?”
“어? 왜 이러지? 속박!”
당황한 우진이 연달아 손을 뻗으며 시동어까지 외쳐 봤지만, 마법의 발현은 없었다. 수혁이 욕설을 뱉었다.
“시발. 쫄았잖아. 이 오타쿠 새끼가.”
확실하다.
동네 모자란 놈에게 잠시 쫄았다는 게 자존심 상해 수혁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주먹을 휘둘렀다.
수혁의 주먹이 머리에 닿기 전 우진이 고개를 까딱 옆으로 피했다.
부웅.
“허, 시발. 피해?”
붕.
“이 개새끼가. 뒤지려고. 이 새끼 조져!”
수혁의 발악에 일진들이 달려들었다.
‘허, 뭐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우진은 20년 동안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마력이 반응하지 않아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법을 잃었다고 해도 고작 고삐리들의 주먹에 맞을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전사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쪽 세상에서의 이야기다.
이곳에서 비교하자면 마법사도 특공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좋았다.
괴물이 버글거리는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체력은 되어야 하니까.
우진은 귀찮게 달려드는 일진들의 주먹을 한 번씩 피하곤 가볍게 주먹을 뻗어 명치를 한 대씩 때려주었다.
퍼퍼퍽.
“윽.”
정확히 세 번의 공격에 셋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도재민이 아픈 몸을 추스르는 것도 잊고 멍하게 우진을 보았다.
“쩌, 쩐다.”
우진은 귀찮은 것들이 쓰러지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무심결에 하던 그의 버릇이었다.
“뭐, 상관없으려나?”
차원 이동의 여파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법을 잃은 것인지 봉인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렴 상관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곳은 서울.
더는 괴물의 위협도, 생존을 위한 사투도 필요 없는 곳이니까.
아마도…?
일진들은 몇 번 컥컥거리다가 슬금슬금 일어서더니 눈치를 보곤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우진은 쫓을 생각도, 쫓을 이유도 없기에 내버려 두었다.
“가, 감사합니다.”
도재민이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상한 차림새의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을 도와줬으니 말이다.
“아, 별거 아냐. 그보다 뭐 하나만 묻자.”
재민은 우진의 말에 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일진에게 두들겨 맞는 아이를 구해주고 던지는 질문이라 봐야 ‘왜 맞았냐?’ 정도 아니겠는가.
보통의 어른이라면 말이다.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냐?”
“예?”
“오늘이 며칠이냐고?”
“아, 9월 10일인데요.”
“몇 년도?”
“2015년이요.”
“뭐?”
강우진은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저쪽 세계에 ‘소환’당한 것이 2010년. 그가 고3이던 시절이었다.
“하, 뭐가 어떻게 된 거지?”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왔건만 지구는 5년이 흘렀을 뿐이었다. 우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생각을 정리했다.
“오히려 잘 된 건가?”
아무런 의심 없이 20년이 흘렀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다시 찾을 일이 막막했는데 5년이라면 가족들이 아직도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쁠 게 전혀 없는 상황.
주위에 거울 될 것이 있나 찾아봤지만 없었다. 우진의 눈에 재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내가 몇 살처럼 보이냐?”
“예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이때 쓰는 것인가? 일진 피했더니 미친놈에게 잘못 걸린 것은 아닐까.
재민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답했다.
“스물둘 정도요.”
“그래?”
‘몸도 젊어졌다는 건가? 마법을 모조리 잃고 젊음을 되찾았다? 아니, 몸이 재구성되었다?’
고민은 차차 해보기로 한 우진은 일단 급한 것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20년 만의 귀환. 하지만 지구는 5년이 흘렀을 뿐이다.
가족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집 전화번호는 물론,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행히 이곳은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인지라 집까지 가는 길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오늘 중으로 가족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집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걸어갈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지하철 일곱 정거장 정도의 거리. 우진의 눈에 불안한 눈초리의 재민이 들어왔다.
“돈 좀 빌리자.”
“예에?”
“차비 좀 빌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