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작은 오해
“형, 어머니 만나시지 않았어요?”
“새끼. 집이 좁으니까 그러지. 집 살 때까지만 부탁하자.”
아무리 서울 땅값이 떨어졌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민과 같은 서민들에겐 꿈도 못 꿀 돈이다. 집 살 때까지 부탁한다는 건 아예 빌붙어 살겠다는 거겠지?
복잡한 표정의 재민을 보며 우진이 낄낄 웃었다.
“금방 나갈 테니 걱정 마, 임마. 형이 오늘 하루 번 돈이 1,300이야. 거기에 아직 못 받은 돈이 400 더 있어.”
“그, 그게 아니라 주말이면 저희 누나 오거든요.”
“아, 그래?”
“제가 내일 전화해 볼게요. 아참, 형 저희 누나 아세요? 누나는 형 이름 알던데.”
“어? 누나 이름이 뭔데?”
“도지원이요.”
우진은 도지원이란 이름을 곰곰히 생각하다 눈을 크게 떴다.
“도지원? 그 3반 전지현?”
“음. 친누나라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렇게 불렸던 거 같아요.”
“허허, 네가 지원이 동생이었단 말야?”
우진이 도재민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놈이 잘생겼다 싶었더니 도지원이 누나였을 줄이야.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남매가 둘 다 미모가 좋았다. 도지원은 20년의 의식 나이가 흐른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에서 가장 예뻐서 유명한 것이 도지원이었다. 우진도 남몰래 지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그때는 왜 그리 숫기가 없었는지…….
지금이면 그냥.
“누나는 어디서 사는데 주말에 오냐?”
“공장에 있어요.”
“뭐? 공장? 도지원이? 돈이 필요하면 차라리 연예인을 하지.”
우진은 도무지 지원과 공장이 연상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재민이 조금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그, 그럴 사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형 휴대폰 바꾸셨어요?”
“어, 오는 길에 바꿨어.”
“우와, 이거 정말 비싼 건데.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래? 좋은 거야?”
“헐, 이거 크레이지레드잖아요.”
“크레이지레드?”
“혈석기술 적용돼서 정말 비싼 거예요. 형 돈 정말 많이 버셨나 봐요?”
혈석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신물질. 5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차츰 현실의 물건에 그 기술이 적용되고 있었다.
혈석을 이용한 배터리 기술은 요즘 IT 시장의 핫이슈였다.
“공짜로 바꿔주더라고.”
“예? 이걸 공짜로요?”
“뭐, 이벤트지. 이벤트.”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목숨을 건 이벤트.
“헐, 좋겠다. 이거 정말 비싼데.”
우진은 폰팔이가 그래도 양심은 있는 듯해 조금 꽁하던 마음을 털어버렸다.
재민이 한창 휴대폰의 신기능에 대해서 주인인 우진보다 더 신나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데 문자가 왔다.
띠링.
재민은 화면의 상단에 미리보기로 뜨는 문자 내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xx은행
2015. 9. 13. 21:13
입금 40,000,000
잔액 51,230,000
xx은행 홍성구]
“허, 이거 0이 몇 개야.”
재민은 문자를 한 번 보고 우진을 한 번 보았다. 각성자 카드에는 F급이었는데 하루만에 1,300만 원을 벌어오더니, 지금 또 4천만 원을 벌었다.
우진이 달라 보일 수밖에 없는 재민이었다.
“혀, 형. 능력 있으시네요.”
우진은 휴대전화를 뺏어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이 자식이 네 장 보내랬더니.”
우진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난 니 문자가 신경 쓰여, 문자가 신경 쓰여.]
컬러링의 한 소절이 지나기 전에 성구가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형, 입금 확인하셨어요?]
“야, 임마. 누굴 거지로 아나? 내가 그냥 4장만 보내랬지? 이거 뭐야?”
[역시, 그 네 장이 그 네 장이었나.]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듯 작게 들렸으나 청각이 예민한 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혀, 형님. 제가 지금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소 하나만 불러 주십시오.]
“뭐? 굳이 왜 찾아와?”
[제가 가서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다급해 보이는 성구의 목소리에 우진은 얼떨결에 주소를 댔다.
[거기 엔젤엔젤이라고 큰 카페 있습니다. 10분 안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급하게 전화를 끊는 성구의 반응에 우진은 전화기를 보았다.
“이놈, 뭐지?”
그냥 계좌번호만 불러주면 3,600만 원을 돌려줄 생각인데 왜 만나자고 할까.
“술도 떨어졌는데 나 잠깐 나가서 사올게. 치킨 먹고 있어.”
“네, 형.”
“현관문 번호 원래대로 바꿔놔라.”
“…네.”
우진이 떨어진 소주도 살 겸 성구를 만나 돈을 돌려줄 생각으로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재민은 컵에 남은 소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크, 이런 걸 왜 마셔.”
아직 따지 않은 콜라를 열어 입가심하고는 심심하여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비쌀 텐데.”
재민은 화장품의 브랜드와 모델을 검색하곤 입을 딱 벌렸다.
‘이, 20만 원?’
고등학생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부담되는 가격. 애초에 향수를 잘 뿌리고 다니지도 않는다. 담배를 피우면 몰라도.
“허, 이 형 기분파인가? 돈 번다고 막 쓰네.”
우진이 쥐여준 50만 원의 돈을 보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누나는 지금도 힘들게 공장에서 일할 텐데 연봉이라 봐야 우진이 오늘 하루 벌어들인 5,300만 원보다 적었다.
우진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심심했던 재민은 자신이 자주 드나드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글을 작성했다.
[형들. 나 향수 선물 받음. 한 3일 전에 우연히 만난 아저씨인데 자취방에서 하루 재워줬다고 향수도 사주고 50만 원도 줌. 리얼 횡재? 지금 치킨에 한잔하다가 그 형 지금 술 떨어져서 술 사러 나감. 돈 겁나 많음. ㅋㅋㅋ 선물자랑 ㅇㅈ?]
재민은 향수의 인증사진까지 올리고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띠링, 띠링.
댓글은 폭발적이었다.
[ㅋㅋㅋ. 님 등짝 조심하셈.]
[향수, 자취방, 성공적.]
└ [리얼 오늘 합방각 ㅋㅋㅋ]
└ [ㅋㅋㅋㅋ 이 형 내일부터 옆 동네에 입갤할듯.]
[술이 아니라 콘돔 사러 갔을 듯.]
└ [병시나 임신도 안 되는데 콘돔을 왜 사.]
└ [뭐, 이 병시나. 그럼 관장약.]
└ [ㅋㅋㅋㅋㅋ 관장약이래.]
[님, 늦지 않았음. 자취방을 버리고 후방을 지키셈.]
[근데 누가 바텀?]
[ㅋㅋ 돈 쓴 놈이 탑이지.]
[에널개통축하!]
└ [에널이 뭐에요?]
└ [니 똥꾸멍 병시나.]
[후기 부탁. 모니터 앞 대기 중.]
재민은 인상을 팍 썼다.
“쯧쯧,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괜히 게이 드립은.”
재민은 계속해서 달리는 댓글들을 보며 슬쩍 현관문을 향했다. 음,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 맛있는 치킨이 고무줄 씹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아, 아닐 거야.
***
홍성구는 전화를 끊자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 네 장이 4억이었어.”
어쩐지 목숨 값이 2천이면 정말 싼 거 아닌가 싶었다. 역시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그래도 2억은 되는구나.”
두 번 구해주었으니 네 장. 4억이다.
“하, 이럴 때가 아닌데.”
성구는 한숨을 쉬었다. 능력을 각성한 지 2개월. 그동안 쉬지 않고 던전을 돌아 마련한 돈이 3천이었다. 거기에 모자라는 돈은 주변에 빌려 융통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3억 6천이나 되는 거금을 마련해 간단 말인가.
“역시, 이 수밖에 없어.”
혹시나 싶어 준비해 두었던 것이 있었다. 성구는 서류뭉치를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사당역 인근에 도착해 엔젤엔젤이라는 큰 카페를 찾아 다급히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우진이 한편에 앉아 있었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점심 때쯤 던전을 나와 헤어졌던 둘이다. 고작 몇 시간 됐다고 잘 지내기는.
“왔냐? 그런데 뭐 직접 찾아오고 그러냐.”
“찾아오는 게 맞지 말입니다.”
“됐고, 계좌번호나 불러주고 가.”
“허윽.”
성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돈을 돌려주겠다는 건가? 그럼 결국 돈도 필요 없으니 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인가?
성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배도수 일행을 죽여 버린 우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일 뿐인지라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상당했다.
성구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형님, 살려주십시오.”
“응? 왜 이래.”
“모자라는 돈은 반드시 드릴 겁니다.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성구의 반응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뭐야, 뭐야? 조폭인가?”
“무슨 사채 같은데.”
“쯧쯧, 사채 끌어다 썼나 보네.”
주변인들의 수근거림에 우진이 인상을 썼다. 주변의 관심을 끌어 뭐하려는 짓일까? 우진의 음성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뒤지기 싫으면 그냥 앉지?”
“넵!”
성구가 즉시 우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형님, 지금은 4억을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4억?”
“넵.”
“하아….”
우진이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똑, 똑.
그와 함께 성구는 마른침을 삼켰다.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앉아 있는 성구를 보며 우진은 인상을 구겼다.
아무래도 400만 원 보내라고 네 장을 보내라고 했더니 그걸 4천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4억으로 오해하고 있고 말이다.
‘요즘 애들 참 통 커.’
어떻게 한 장을 1천이나 1억으로 생각을 할 수 있지?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
오해를 했다면 응당 그 오해를…
“언제까지 기다려 줄까?”
…이용해 주지.
성구가 재빨리 말을 쏟았다. 자신이 언변에 이렇게 재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른 말이었다.
“여기 이걸 보십시오.”
성구가 내밀어준 종이서류를 쥔 우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 능력 각성과 그 발전에 따른 수입 보고서.
성구가 처음 능력을 각성하고 하루 벌었던 수입과 능력이 익숙해지고 점점 진화하면서 차츰 높아져 가는 수입들.
그것들을 그래프까지 동반해 정리해 두었다. 거기에 아래에는 자신이 여태 공략했던 던전의 목록과 상대해 봤던 몬스터의 수까지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이를테면 성구 자신의 포트폴리오.
“2개월 동안 모은 돈이 3천입니다. 앞으로의 수입은 늘어날 것이고 빠른 시일 내에 나머지 돈을 채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25개월 안에는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너무 긴데?”
우진의 부정적인 말에 성구가 빠르게 말을 받았다. 자신의 처세술이 이리도 능했던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되자 자신의 또 다른 특기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두 번째 방법입니다.”
- 던전 공략 사업 계획서.
우진이 인상을 구기며 서류를 테이블에 던졌다.
“그냥 말로 하지?”
성구가 즉시 혀를 놀렸다.
“형님의 능력이시면 1성이나 2성 던전보다 상위의 던전을 충분히 공략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던전 공략 1회당 벌어들이는 수익이 지금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저와 함께 파티를 이루고 수익성이 좋은 던전을 골라 이용하면 금방 4억의 돈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구가 본 우진의 각성등급은 절대 F등급이 아니었다. 2성 던전도 솔플로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인데 어찌 F등급일 수 있겠는가.
보다 상위의 던전은 수익 자체가 다르다. 금방 4억의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성구로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혼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상위의 던전도 우진과 함께라면 가능했으니까.
문제는 하나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빌붙겠다? 편하게?”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한 세 번째 방법입니다.”
성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 번째 방법을 제시했다.
“기간을 정해 제가 형님의 매니저를 하겠습니다.”
“매니저?”
“네. 조금 등급이 높은 각성자들은 전부 데리고 다닙니다. 길드에서도 지원부서가 따로 있지요. 던전 선정부터, 예약이나 혈석 판매 같은 걸 전부 대행합니다. 운전도 합니다.”
“머슴이네.”
어라,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기분 나쁘지?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형님.”
성구의 말에 우진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매니저라는 것이 진짜 연예인의 매니저와 같은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진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돈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는 거네.”
아, 맞긴 맞는데.
“정확하십니다, 형님.”
우진이 잠깐 생각해 보다 말문을 열었다.
“좋아. 기간은?”
“형님이 정해 주십시오.”
“1년. 무보수는 좀 그러니, 따로 돈은 주도록 하지.”
성구가 벌떡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어우, 야 내가 고맙지.”
그냥 3,600만 원만 돌려받으면 되는 일인데 알아서 머슴살이 해주겠다고 하니 말이다.
***
재민은 목을 타는 갈증에 잠에서 깼다.
“으윽.”
어질한 머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 위였다. 기억의 편린들이 합쳐지며 점점 떠오르는 기억들.
술을 산다고 나간 우진이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한 모금 한 모금씩 마셨던 소주에 그만 식탁에 엎어져 잠이 들었는데….
왜, 침대지?
“헉!”
윗옷은 입고 있다. 재민이 서둘러 이불을 들춰보니 바지도 입고 있었다. 괜히 엉덩이를 만져 봤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휴.”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
긴장이 풀리자 오줌이 마려워 일어서려는데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우진이 보였다. 식탁에 소주병이 두 병 더 보이는 것을 보니 홀로 마시고 잔 모양이었다.
“착한 형 맞네.”
재민이 안도하며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우진이 신음했다.
“으으으.”
잔뜩 웅크린 채 누운 우진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아픈 거야?”
재민이 웅크린 우진을 바로 눕히려 손을 뻗는데 닿기도 전에 따끔한 충격이 전해졌다.
“앗, 따거.”
재민이 화들짝 놀라 침대에 다시 앉았는데, 충격 때문인지 헛것이 보였다.
우진을 감싸고 서서히 유영하듯 돌고 있는 희끗한 물체들. 어떤 것은 검었고, 어떤 것은 형체가 없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고, 실체 없이 존재했다.
눈이 풀린 재민이 그것을 멍하니 보았다.
귀신? 도깨비? 아니면 환각?
생명에 대한 짙은 증오와 원망, 보다 근원적인 악.
본능적인 두려움.
재민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눈을 까뒤집고 침대에 다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으으으.”
신음하는 우진의 몸은 식은땀이 가득했고, 잔뜩 찡그려진 그 얼굴은 악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네크로맨서.
순리를 거슬러 죽음을 거부하는 자.
결국 죽음의 저주에 시달리는 자들.
우진은 그렇게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