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등장한 젊은 여자.
내 또래 여자의 등장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나처럼 휴일 아침 대충 찾아 걸친 듯 검정 재킷을 입은 여자는 곧 빈소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 남동남 아저씨 지인들은 다 젊네."
내 시선을 따라 여자의 뒷모습을 쫓던 신용숙이 중얼거렸다.
여자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무소유>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그러면 그때 지하철역에서 책만 돌려주시고는 연락이 끊긴 건가요?"
"며칠 뒤에 다시 전화가 오긴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감사하다고, 과일이라도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는 거예요. 뭐 그런 일로 과일씩이나. 괜찮다고 사양했지, 뭐."
"퍼플레인님은, 남동남 씨는 그 책을 아직 갖고 있을까요?"
"그렇겠죠? 그렇게 아끼던 책인데."
"그분 유품은 어떻게 처리될까요? 가족도 아무도 없는데."
"가족이 없대요?"
"네. 무연고자라고 들었어요."
무연고자라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문득 잊고 있던 문자 메시지가 생각났다. 이곳에 온 진짜 이유가 사실은 그 문자 때문이 아니던가. 이분은 뭔가 알고 있는 게 없을까.
"혹시, 최근에 그분한테서 문자 받은 거 없으세요?"
"없는데. 그 뒤로는 별다른 연락 없었고 그게 벌써 1년도 전이죠, 아마."
"사실 제가 며칠 전에 그분한테서 이런 문자를 받았어요."
나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프린스는 살아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본 신용숙은 눈만 깜박거렸다.
"이게 뭔데요? 프린스는 살아있다? 발신 퍼플레인. 남동남 아저씨가 보낸 문자네?"
"네. 그런데 이게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온 거예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문자만 쳐다보던 신용숙은 프린스? 가수 프린스? 프린스 죽었다는 기사는 봤는데?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쇼핑몰 사장님은 아는 바가 없구나. 살짝 가졌던 기대감이 사라지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이 문자를 보내시고 나서 이틀 후에 돌아가셨대요. 가수 프린스랑 같은 날."
"어머! 정말?"
"올드팝을 좋아하셨거든요. 특히 프린스요. 프린스 팬이 프린스랑 같은 날 돌아가신 것도 신기한데 프린스가 죽기 이틀 전에 프린스가 살아있다는 문자를 보내신 거죠. 아무 설명도 없이, 별 친분도 없는 제게."
"뭔 소리지? 아무튼 프린스 죽기 이틀전에 프린스가 살아있다는 문자를 보냈다는 거죠? 왜에?"
그러게요. 제가 묻고 싶고 궁금한 게 그거거든요.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데 조금 전 빈소로 들어갔던 여인이 전화 통화를 하며 복도로 나왔다.
곧이어 검은 양복 차림의 한 중년 남성이 복도로 들어서서 여인을 흘낏 보더니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고 남동남 님 빈소에 오신 분들이십니까?"
"네."
"저는 장례지원단장 박인수라고 합니다. 제가 상주 역할도 하는데 이렇게 일찍 손님들이 오실 줄 모르고. 실례지만 고인과의 관계가?"
"그냥 한두 번 본 사람들이에요."
신용숙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단장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희 지원단에서는 장례랑 화장, 납골당 안치까지 진행하고요 이후 처리는 구에서 합니다. 무연고자 사망 공고가 나갈 텐데 연락처 파악된 지인분들에게 따로 연락이 가기도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무슨 공고... 무슨 연락이요?"
"무연고 사망자 공고가 나가죠. 상속인을 찾아야 하니까."
"가족이 없다고 하던데요."
"네. 법적으로 무연고자인 건 확인됐대요. 그런데 관련법에 따라 공고는 해야 합니다. 또 어딘가 숨겨진 상속인이 있을 수도 있고."
"상속인을 찾아야 할만한 재산을 남겼나요, 그분이?"
"저는 모릅니다. 국가가 자산, 부채 파악하고 상속자나 채권자 찾고, 상속자 못 찾으면 상속재산관리인 선임하고 뭐 그렇게 진행돼요. 따로 남긴 유언장이 없으면 아무래도 좀 복잡하죠."
"만약 그렇게 해도 아무도 안 나타나면요?"
"음. 특별연고자 제도가 있어요. 가족은 아닌데 말 그대로 특별히 연고가 있는 사람. 병환으로 돌아가신 분이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돌봐준 요양사가 있다던가, 그런 분들이 상속재산 일부를 청구할 수도 있을 걸요."
"그런 사람도 없으면요?"
말을 멈추고 빙긋 웃는 단장의 모습에 나는 너무 쓸데없는 질문이 많았나, 괜히 움찔했다.
"그러니까...고인이 남긴 재산은 있는데 그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게 궁금하신 거죠?"
"아…. 네, 사실 궁금하긴 해요. 어차피 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서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져서."
궁색한 변명 같은 내 말에 단장은 당연히 그럴 수 있죠, 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공고 기간 포함해서 1년인가? 그 정도 지난 후에도 아무도 안 나타나면 고인의 모든 자산은 국가로 귀속됩니다. 만약 남긴 자산이 있다면요."
"어머, 말 그대로 사회 환원이네요."
신용숙의 말에 나는 괜스레 하하 그러네요, 과한 웃음으로 응수하며 거 참 별일도 아니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군, 이라는 뜻을 애써 어필했다. 젠장.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프린스는 살아있다>라는 문자가 떠나질 않았다.
고인이 사망 당일에 보낸 문자. 이게 만약 혹시라도... 숨지기 직전의 유언 같은 거라면? 이 짧은 말 속에 만약 엄청난 비밀이라도 숨어 있다면?
한참을 통화에 매달리던 여인이 통화를 끝내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단장은 잠시만요, 하고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여인은 다시 빈소 안으로 들어가고, 단장은 우리 쪽으로 오며 빈소를 가리켰다.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들어가시겠어요? 음료수도 드시고. 점심때가 지났는데 육개장이라도 같이 하시죠. 어차피 여기 일하는 분들 식사도 해야 하니까요."
뭘 또 마셔요? 이미 두 잔의 음료수를 연거푸 비운 나는 하마터면 볼멘소리를 입 밖에 낼뻔했다.
잠시 망설이던 신용숙은 그러죠, 뭐, 라며 일어섰고 내게 들어가자는 눈짓을 보내고는 앞장섰다. 아 씨. 하지만 마음 뿐, 보이지 않는 목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나는 또 졸졸 여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들어가 빈소 구석에 앉아 있던 여인은 우리를 보더니 엉거주춤 일어섰다.
"조문 와 주신 분들입니다."
단장의 소개에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어색한 눈인사를 나눴고, 엉거주춤 서 있던 여인이 다시 앉는 것이 신호라도 되듯 모두 음료수 주변에 하나둘 모여 앉았다.
단장은 잠시만요, 하며 다시 복도로 나갔고 세 사람은 멀뚱멀뚱 시선을 애써 피하며 앉아 있어야 했다.
뻘쭘한 침묵을 깬 건 마지막에 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종이컵 세 개를 나란히 꺼내놓고는 탄산음료 뚜껑을 열었다. 푸쉭. 경쾌하게 김빠지는 소리에 나와 신용숙은 음료수에 주목했고 여인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석 잔의 음료수를 만들었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참 어색하네요."
음료수를 받는 신용숙의 너스레에 비로소 숨쉬기도 답답한 공기가 약간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젊은 여인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장례식장도 참 소박하고 빈소도 작고. 얼마나 지인들이 없으셨으면 제가 이 자리에 와 있나 싶기도 하구요. 다들 서로 잘 아는 사이신가요?"
"아니에요. 저랑 이쪽 대리님도 10분 전에 처음 본 거고, 저나 대리님이나 고인하고 아주 깃털 같은 인연에 불과해요. 저는 돌아가신 분이 분실한 책 찾아준 게 다인 사람이라 인연이랄 것도 없고."
신용숙의 말에 여인이 당신은? 하고 묻듯 나를 쳐다봤다.
"저하고는 같은 카페 분이었어요. 중고책 거래하다가."
"그러고 보니 대리님처럼 남동남 씨도 대리님 실명은 모르고 아이디로만 알고 계시다가 돌아가신 거네요. 카페 회원들이었으니까."
갑자기 끼어든 신용숙의 말에 생각해보니 퍼플레인님한테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가물가물했지만 만나서도 아이디로만 부르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겠죠. '조조'로만 알고 계셨을 거예요."
"조조. 대리님 아이디가 조조구나."
"조조 님?"
날카로운 목소리. 신용숙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여인은 정확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제 아이디가 조조인데. 그런데 저를... 아세요?"
"저 모르시겠어요?"
질문인가 대답인가. 멍청한 표정을 짓는 내게 여인은 아, 당연히 모르시지, 하며 자기 이마를 툭툭 쳤다.
"몇 년 전에 저한테 남 이사님 소개해주신 조조 님 맞죠?"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여인은 음, 하며 미간을 잠시 찡긋했다.
"그 카페, 아 이름이 뭐더라. 같은 카페 회원이라면서요. 저요, 저 막내작가요. 올드팝 기획물 자료 찾는다고 책 읽는 거기 카페에 도움 요청하는 글 올렸더니 쪽지로 남 이사님 블로그 소개해주셨잖아요?"
"제가요?"
"네. 조조라는 분이요."
"남 이사님이 누군데요?"
"...저분이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여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퍼플레인님의 영정사진이었다.
자료를 찾는다는 막내작가라는 사람에게, 조조라는 아이디의 인간이, 즉 내가, 퍼플레인님의 블로그를 소개해줬다, 는 이야기를 하는 여자.
퍼플레인님 블로그를 소개했다고? 내가? 언제?
"저 아닌 것 같은데."
"맞는데요? 쪽지 주신 분 아이디가 조조였는데? 지금 저분 조문오신 거 아닌가요?"
"제가 조조라는 아이디를 쓰는 것도 맞고 퍼플레인님, 아니 저기 남동남 씨 조문 온 것도 맞긴 하는데."
"맞아요, 퍼플레인! 남 이사님 아이디가 퍼플레인이잖아요."
아는 분 맞구먼, 이라는 신용숙의 참견에도 내 눈동자는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전 퍼플레인님 블로그가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들었는데요."
"마이클 잭슨!"
"??"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그만큼 정리 잘 된 글을 본 적이 없다고, 올드팝에 관한 논문 수준의 글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분 블로그가 자료 조사에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저한테. 프린스 글도 그렇고요.
"누구요?"
불에 덴 듯 놀라는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던 여인은 다시 또박또박 대답했다.
"프린스요. 가수 프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