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한 하루를 마무리 할 겸, 오천 원짜리 레드와인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지금부터 22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01428343434..."
또박또박한 여자의 라디오 방송에 와인이 뿜어져 나왔다.
불길해..!
한국에서만 한 보안통역을 중국에서 하게 된 것도,
비행기결항과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 공항에서 대기한 것도,
폰이 고장 난 것도.
호텔의 실수로 캔슬 된 방까지.
첫 단추부터 잘못 풀린 하루는 머피의 법칙처럼 끝날 때까지 엉망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바닥에 흘린 와인을 닦으며,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아닐 거야”
***
"뭐해?"
바스가운을 여미며 걸어 나오던 권욱의 상사 자기애가 물었다. 하지만 욱은 초조한 듯 담배필터를 씹으며 폰을 보기만 했다. 기애는 입을 삐죽이며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욱에게 걸어갔다.
“우리 자기, 그렇게 계속 폰만 볼 거야?”
단번에 와인 잔을 비운 기애가, 손등으로 욱의 관자놀이에서 뺨, 턱까지 주욱, 손등으로 쓸어내린 뒤 폰을 뺏어들었다.
“내놔”
“안돼~ 나랑 있으면 나만 봐야지.”
기애는 욱의 무릎 위에 앉아, 그가 보던 폰 화면을 내려 봤다.
“여기 와서도 일이야?”
“문제 있는 지 확인 중이야”
“오늘은 그만. 그만큼 완벽하면 됐지! 쟈긴 일중독이야. 일중독. 그거 알아?”
끈적끈적하게 쳐다보는 기애를 외면한 욱이 막, 담배를 한 모금을 빨았다.
“날 봐야지!!”
신경질 부리며, 기애는 욱이 피던 담배를 뺏어 재떨이에 비벼 껐다. 기애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서서히 인내의 한계를 느낀 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애는 욱의 기분 따위 상관없다는 듯, 그의 미간에 쪽. 입을 맞추고 배시시 웃었다.
“우리가 사귄다는 거 언제 말할 생각이야?”
“글쎄. 난 최대한 비밀로 하고 싶은데?”
치. 기애는 욱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의 목을 양팔로 감곤 두어 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금 더 깊은 스킨십을 원한다며 더욱 파고 들려고 할 때, 기애는 피곤한 듯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피곤하네..”
“그만 자는 건 어때?”
“아쉽잖아. 오늘은 쟈기랑 이런저런거 해볼려고..했..”
기애는 미처 다 말을 잊지 못하고 그대로 꼬꾸라졌다. 웅얼웅얼 기애가 잠결에 중얼거리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욱은 자신의 몸 위에 않아 있던 기애를 짐작 마냥 바닥에 던졌다. 이 상황이 짜증이 난 욱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붙박이장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이제 해도 될까요?”
어두워 보이지도 않는 붙박이 장안에서 진이와 지훈이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 그 좁은데서 뭘 하기에 숨소리가 거친가 했더니, 실뜨기라니. 어이없는 후배들의 모습에 미세하게 입 꼬리가 떨렸다.
“저거 정리해”
어서 하라고, 재촉하듯 바닥에 널브러진 기애를 눈으로 가리켰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지훈이 벌떡 일어나 여자에게 향했고, 진이는 다리에 난 쥐 때문에 일어나다 엎어졌다. 아픈 후배 앞에서도 욱은 아무렇지 않게 진이의 등을 밟고 욕실로 가버렸다.
“어우 저 개싸가지”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진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간신히 여자의 앞에 당도했을 땐, 지훈이 앞섶이 열린 여자의 나체를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대체, 저 순진한 놈을 왜 같은 팀으로 넣은 것인지. 진은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는 욱을 보며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댔다.
“내가 저 놈의 정체를 박하사탕한테 다 까발릴 꺼야”
진이는 여자의 앞섶을 수습하고, 지훈을 불렀다. 어서 침대위로 고이 모셔놓으라고. 지훈은 옙. 짧게 대답을 하고 기애를 침대에 고이 눕혔다. 지훈은 기애의 목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준 뒤, 계속 괴로워하는 진을 침대에 앉힌 뒤 쥐 내린 다리의 마사지를 시작했다.
“저렇게 졸피뎀 막 먹여도 되요?”
“내가 알게 뭐야”
“그리고 여잔데, 바닥에 던지다니..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박하사탕이, 아니면, 개똥이라잖아 개똥!”
“개똥이랑 이것저것 잘도 하시나 봐요”
속닥속닥.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는 욱의 귀에 들리지 않게 진과 지훈이 욱의 뒷담 화를 했다.
“저거봐”
진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양치를 끝내고 가글까지 하는 욱의 모습을 보곤 그렇구나 싫겠지. 지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진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조심히 주사기를 꺼냈다. 그리고 여자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목 뒤를 찬찬히 살핀 뒤 주사바늘을 넣었다.
“티 안 날까요?”
“다행스럽게도 이 분이 이 부분에 문신을 하셨으니 티는 나지 않겠지만..”
“않겠지만?”
“잘 작동해야겠지?”
안 그럼 또 12시간동안 붙박이 장안에서 권욱이 저 여자와 이런 저런 일 하는 것을 봐야할 테니깐. 으. 진이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손으로 몇 번 매만져 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사기를 주머니에 넣었을 때, 화장실에서 나온 욱이 들고 있던 폰을 지훈에게 던졌다,
“그거 신호 좀 잡아봐”
“신호요?”
“그래. 신호가 공항에서 끊겼어”
도망간 거 아닐까요? 지훈이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고, 진이 역시 지훈과 똑같은 생각을 했던지 서로 바라보며 영구같이 씩, 웃었다.
***
설마가, 역시라니..
A4에 메모 하며 왼쪽을 힐끔, 오른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하얀 백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라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이상한 분장을 한 백인이 오른쪽에는 북한국기뱃지를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아 정말이지,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얼마나 긴장한 것인지 손끝이 다 저려왔다. 단기에 큰돈이 들어오는 일이기에 수락한 일이지만, 이런 일일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거기다 방금 메모한 제품명 ‘UGM-13X’는 탄도미사일이라는 것은 책 번역을 통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하라는, 눈앞의 북한사람과 이 이상한 백인의 거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NO”
북한사람은 테이블 위의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방안은 매캐한 시가 냄새가 났고, 그 냄새 때문인지 아님 제시한 가격을 거부당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백인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백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안 것인지, 함께 대동한 경호원인지 군인인지 모를 이가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분명 저 재킷안의 총을 쥐고 있는 거겠지?
식은 땀 한 방울이 등에서 엉덩이 골 까지 쭈욱. 타고 흘렀다.
그냥 사지 왜 싫다는 거야!!
속에서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 아우성이지만, 겉으로 들어나는 표정만큼은 이 자리 그 어느 누구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때, 띵동 하는 차임벨이 들렸다.
순간, 경호 겸 따라온 이들이 서로 긴장을 한 채 문을 잠시 보다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겨둔 총을 꺼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하라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나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백인과 북한사람은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총질을 해도 빨리 도망가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인데, 기꺼이 허락해주니 다행이었다. 스위트룸답게 제법 먼 곳에 위치한 현관을 향해 걸어가 인터폰을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누구인지 확인 차든 인터폰으로 들리는 것은 하악하악. 하는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만 들렸다. 단지 잘못 누른 거구나. 생각하고 다시 몸을 돌아가려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어떻게 하지? 라는 잠깐의 망설임과 아직도 서로 대치상황인 안을 보다, 결국 체인을 건 채 문을 열었다.
“무슨..”
문이 열림과 동시에 두 남녀가 열렬히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 좁은 틈새로 보였다. 역시나. 자신의 생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알고, 다시 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쪼옥쪼옥, 쩝. 거리는 외설적인 마찰음과 남자의 손 여자의 한쪽 다리를 끌어 올리는 순간 스치듯 보이는 옆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저 얼굴이 누구지? 굳은 채로 남자의 옆모습을 보다 슬쩍 머리를 트는 통에 보게 된 남자의 얼굴에 너무 놀라 새된 비명이 나왔다.
“권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