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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두려움을 품고 잠을 설치던 중에 원래 살던 곳의 꿈을 꿨다.
아니다. 원래 살던 곳의 꿈이라기보다는 친구들이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엿봤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둘은 내가 사라진 것을 모르는지 안중에 없는 것인지 홍대 거리를 활보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카페에서 차와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잘생긴 카페 종업원을 힐끔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사극 드라마 속 주인공에 카페 종업원들을 마음대로 집어넣고
달짝지근한 로맨스를 상상하고 키득거리는 모습은 우리 세 명의 평소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 명이었던 우리가 두 명이어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나는 여기 있는데……. 여기서 언제 어떻게 죽을까 두려워하며 잠을 설치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즐겁게 있는 거냐고. 씁쓸한 입술을 핥았다.
그런 슬픈 눈으로 친구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들이 카페를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 희빈은 우리가 뽑았던 벌칙 수행을 하려는지 연습 삼아 입을 몇 번 달싹이며 안면운동을 해 나갔다.
잠시 후,
전하께서는 소인을 죽이고 싶으신 겁니다. 이젠 더 이상 향긋한 꽃이 아니라고, 더는 색다른 꽃이 아니라서 다른 꽃을 향해 가시려는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과거에 잊었던 꽃을 향해 날아가시려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 꽃은 가시도 독도 없는 꽃이라, 향기만 맡으면 되니까요.
오랜 세월 놔뒀어도 오래 피는 꽃이 아니옵니까? 그 오랜 세월. 풋풋하게 이슬마저 가득 품은 그 꽃이 어찌 탐나지 않겠습니까. 암요, 그렇고말고요! 다른 꽃은 어떻습니까. 빨간 꽃, 파란 꽃, 연분홍 꽃, 색색의 고운 꽃에 벌 나비가 꼬여듭니다. 전하의 꽃인데 다른 이가 자꾸 탐을 냅니다. 질투가 나시는 겁니다. 참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소인이 더 거슬리고 징그러운 겁니다! 참을 수 없어지셨지요. 정이, 이젠 없으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눈앞의 종업원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명의 종업원이 앞에 나서서 왕의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짐이 그대를 죽이고 싶어 한다 하였소? 짐이 그대를 거슬려하고 징그러워한다고 하였소.
그것이 그 오랜 세월 짐과 함께 해 온 그대가 할 말이오? 짐을 그렇게 모르면서 어찌 그 세월을 함께 살았소. 한편으론 지겨워진 것이 맞소. 나는 지겨워 진 것이오. 그대가 투기하고 의심하며 짐의 마음을 곡해하는 그 행동이 지겨워진 것이오. 허나, 그대가 말하는 그런 이유로
죽이기엔 그동안의 세월이 짧지 않소. 그동안 함께 해 온 날들이, 정이, 그렇게 간단히 끊어질 수 있는 일이오? 다른 꽃을 찾아다니는 벌 나비 같이, 짐이 그리 쉽게 변심하리라 믿소. 그렇다면 그대는…….대체 그동안 짐의 무엇을 보아 온 것이오. 무엇을 위해서 그 모진 세파를 견디시었소!
희빈은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장희빈 대사를 연기했고, 종업원은 재치 있게 사극 속 왕의 연기로 맞받아쳤다. 격렬하게 부딪히는 시선. 애틋한 눈빛. 뜨겁고도 차가운 분위기. 모든 것이 연기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희빈은 단 한 번에 사귀게 될 가능성이 보이는 남자를 찾았다.
엉뚱한 희빈의 행동에 당황하지 않고 맞받아치고 미소 지을 만큼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패기도 있는 남자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지 않을 만큼 강한 아우라를 갖고 있는 남자 또한 흔치 않다.
그런데 희빈은 단숨에 찾아내었다.
그것에 질투가 일었다.
남자는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에 모델처럼 가는 골격을 가진 연약한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당한 왕과 같은 기백으로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짐은 여전히 그대를 연모하오.
종업원이 마지막 대사를 내뱉은 순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던 손님들에게서 산발적인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둘은 민망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통성명이나 하죠. 장희빈이에요.
아, 그렇소? 나는 이순이오.
예?
이……. 순이오.
종업원의 익살스러운 웃음에 그녀가 정색했다.
장난하지 말아요.
종업원도 똑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진짜로 이 순이오. 이 씨 집안의 순이라 하오.
예?
종업원이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민증이라도 까 보이라면 까 보이겠는데……. 그럴까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어떻게 당신이 숙종의 이름일 수가 있어요?
그러자 종업원이 사극 말투를 쓰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그쪽도 희빈 장 씨의 이름이지 않나. 그런데 어째서 내 이름은 거짓이라 하지? 설마, 당신. 가짜 이름인 거요?
아뇨! 내 이름은 진짜라고요.
그럼 나도 진짜입니다.
아니…….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민증을 깔까요?
예?
하나, 둘, 셋 하면 까는 겁니다.
지, 진짜 까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할까.
종업원이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자 희빈도 어쩔 수 없이 주민등록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종업원은 숫자를 다 세기도 전에 자신의 주민등록증과 그녀가 들고 있던 주민등록증을 동시에 뒤집었다.
그 순간,
종업원의 나이는 정확히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었다. 희빈이 황당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 초선에게로 시선이 머물렀지만 초선은 그런 희빈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에 화가 난 희빈이 까칠하게 소리쳤다.
너……. 고딩이었니?
그러자 숙종의 이름과 같은 남자가 얄밉게 웃는 것이었다.
연상이시군요.
너, 너, 어른을 놀리고…….
희빈이 손으로 때리려 들자 이순이라는 이름의 종업원이 그녀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숙종도 엄연히 희빈과 연상 연하 커플이었는데, 뭐가 그리 잘못입니까?
뒷장면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둘이 잘 됐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그 모습을 본 이후라서인지 몸에선 힘이 쭉 빠지고 괜히 슬퍼졌다.
‘희빈은 저렇게 즐겁게 놀다가 한 번에 어린 남자친구까지 생길 판인데, 난 이게 뭐야.’
괜히 배도 아프고 화가 났다.
“이게 다, 희빈이 벌칙 종이를 빼앗아 간 것 때문에 그래!”
남자가 아직 열아홉 살이라 정말 사귀게 되더라도 최소 1년은 더 기다려야 함에도 배가 아팠다.
벌칙을 가져갔다곤 해도 그다지 희빈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음에도 화가 났고, 희빈과 숙종의 이름과 같은 이 순이 그림 같이 어울려서 나와는 별 상관이 없었을 거라 생각 하면서도 뭔가를 억울하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이건 평상시 내 감정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이씽~ 배 아파!”
짜증스러운 칭얼거림이 튀어나왔다.
“큭큭큭.”
“누구야?”
방 안에서 한줄기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대체 누구기에 숨어만 있는단 말이더냐! 귀신이면 돌아가고, 사람이면……. 사람이어도 물러가거라!”
나는 두려움을 누른 채 허공을 향해 소리쳤고, 허공에서는 연신 숨죽인 키득거림이 들려오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자 나는 누군가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궁 안에선 누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간다.
그것은 궁안에 심어져 있는 귀들에 의해서 벌어진다.
말로 인한 자멸.
참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이가 부딪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역시, 궁은 눈과 귀가 많은 곳이구나. 좀 더 긴장해야겠어!’
***
이틀 후.
황궁 안으로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황족들이 속속들이 입궁하며 이번 혼인식에 관한 이야길 속닥이고 있었다.
“황제가 이번에 후궁으로 들이게 된 여인은 뒷배가 하나도 없다면서?”
“뒷배가 없는 것도 모자라 출신 성분도 미심쩍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던데?”
“그런데도 굳이 혼인을 강행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쑥덕임이 거세지자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그 이유에 대해 설명 했다.
“그게 다~ 이번에 궁으로 들어 온 무당 때문이 아니겠소.”
“무당 때문이라니. 뭐, 아는 거라도 있는 것이오?”
“물론이지요.”
헛기침 끝에 대답한 이는 청룡의 그림자 심복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무당이 그랬다더군요.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는 가장 고귀한 여인을 얻으신다면 천하를 얻게 되실 거라고요.”
“천하는 이미 황제의 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황족들이 쑥덕이기 시작했다.
“황제께서는 지금 몹시 불안해하십니다.”
그림자 심복이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황족과 신하들은 많지만 황제께 믿을 만한 충신 하나 없었으니…….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이들이지 않겠습니까.”
“황제께서 충신 하나 없다니, 대체 누가 그런 망발을 한단 말인가!”
백발이 성성한 노왕야가 다그쳤다.
“그거야 모르지요. 항간에 떠도는 말이 주인이 따로 있습니까. 말의 진위가 있고 도리를 따르겠습니까. 그저 빠르게 천하로 퍼져 나갈 뿐이지요.”
“이런, 불경한 자들을 봤나!!”
그림자 심복은 몰려드는 황족들을 스쳐 지나가듯 걸으며 무심하게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다들 조심 하시지요. 괜히 말 한 번 잘못 했다가 황제의 눈에 밉보이진 말라, 이 말입니다.”
심복은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잠시 후,
황족들 사이에서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황제가 우리를 철썩 같이 믿는 줄 알았는데, 믿지도 않으시면서 이렇게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참에 혼인식을 빌미로 모아놓고 우리를 도륙이라도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황제를 위해 도와 온 일들이 얼만데, 어찌 황제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대로 황제를 믿을 수 있을까?”
“괜히 움직이다가 황제에게 발각 되기라도 하면 정말 역적으로 몰릴 것입니다.
황족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이대로 죽을 것인지, 싸울 것인지. 그러나 황족들 중 누구도 불안의 씨앗을 뿌리고 간 그림자 심복을 의심하거나 그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은 없었다.
황족들 중에는 진짜로 황위 찬탈을 계획 중이던 이들도 상당했다.
그들은 대부분 황제가 그동안 자신들을 종친으로서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라고 여겨왔다.
여태껏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이들이 골육상잔을 벌이거나 황족의 힘을 약화 시키는 것과는 다르게 이번 황제는 그런 일이 없어서 만만히 여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쉽게 황위를 찬탈 할 수 있을 거라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각자 자신들만이 황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허나 이 모든 것을 황제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정확히 간파 하고 있었다는 것에 상당수의 황족들은 지레 발을 절었다.
또 몇몇 황족들은 그런 황족들을 보면서 이 일이 멸문을 당할 만큼 크나큰 사안이란 것을 체감 하고 있었다.
황제의 후궁을 알현 하는 혼인식에 가는 것은 그야말로 자진해서 머리를 내놓는 꼴 밖에 안 되는 듯 보였다.
황족들은 하나 둘, 혼인식이 열릴 대화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며 이를 갈았다.
‘그 자리에서 편안히 호의호식만 하는 것이 다 누구 덕분인데, 꼬투리를 잡아서 날 죽이려는 것인가.’
‘날 아무리 죽이려 해도 쉬이 죽이진 못할 것이다.’
황족들 중에 반역을 도모하지 않았던 이들도 이번 황제의 행보엔 단단히 실망해 버렸다. 자신이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이들임에도 의심하고 죽이지 못해 안달인 것을 보니 애초에 싹이 글러먹었다.
몇몇 황족들은 황족에게서 실망한 것을 역심을 공고히 다지는 데 활용했다.
또 몇몇의 황족은 황제를 끌어내리고 새 황제를 세울 흉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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