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인식이 피의 숙청으로 끝난 이후로 많은 이들이 황제 앞에서 더욱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황궁은 처음 왔을 때보다 팽팽해진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처럼 몰래 쑥덕거리는 궁인들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대화원에서 죽어나간 기십 명의 신하들을 대체하기 위해서 황태후는 재야에 묻혀 있던 귀향 관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또한 황궁 안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아주 살벌한 입단속이 이어졌다.
나 또한 몇 번이나 황태후에게 불려가 단단히 주의를 들었다.
소문이 새어나갈 시에는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황태후 앞에서 확실히 대답했다.
벙어리인 듯, 귀머거리인 듯, 조용히 있겠나이다.
소문이 돌지 않도록 죽어 나간 신하들과 궁인들의 시신은 새벽에 산중턱에서 은밀히 태워졌다. 궁인의 가족들에겐 이들이 출궁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관리들의 가족들에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긴 했지만 그것은 입을 다물지 않는다 뿐이지,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을 막을 수 있는 단속은 아니었다. 대화원의 숙청 이후로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독 날카로워 진 것을 보면, 사람들은 분명 다 알고 있음에도 두려움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날카로운 시선들 중에서도 유독 참을 수 없는 시선은 황족과 신하들의 눈빛이었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당이 나에 대한 이야기로 황제가 황권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가질 수 있게 할 여인이라 칭한 것은 많은 이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알려진 이후로 황제와 있었던 내가 얻게 된 것은 지독한 오명뿐이었다.
숙청을 감행한 것은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마음을 주고 혼인하려 했던 여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악녀가 되어 버렸다.
그들의 시선은 나를 완벽하게 의심하고 있었고, 그들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네가 무당을 사주해서 그 자리에 앉으려 한 것이 아니더냐.
황제를 눈을 가려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게야.
네가 황권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얻게 할 여인이라니. 개가 다 웃을 이야기로구나.
너는 절대 그런 고귀한 여인일 수 없음이야. 너는 결국 경국지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테지.
어찌 너 따위가 천하를 흔든단 말인가.
들리지 않아야 하는 말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확실하게 다 들리는 듯 했다. 그들은 내게서 아주 강한 살의를 품고 있다.
죽은 신하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내게서 받고자 한다. 그러나 누구도 섣불리 나를 건드릴 수 없다.
혼인식이 제대로 이어지진 못했어도 내가 황제의 관심 아래에 있는 황제의 여인이라는 사실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혼인식 이후로 황제와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알력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 손을 놓고 피를 부르거나, 힘겹게 현 상황을 유지하며 끝끝내 화해를 이끌어내야만 하는 알력 싸움 이다. 그러나 상황은 역시 녹록치 않다.
양쪽 모두가 잠시 휴전을 한다는 분위기 말고는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는다.
황제나 남아있는 이들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했고, 그렇게 서로를 탐색하는 동안에도 야속한 시간은 무작스럽게 흐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대로 익숙하지 않던 빨래와 청소가 익숙해져서 간간히 휴식 시간을 뺄 수도 있게 되었다. 무수리라곤 해도 황제의 눈에 든 무수리기에 다른 이들이 일감을 몰아주지 않은 탓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한결 숨이 트인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나는 또 간절히 바랐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서 내가 아주 빨리 노인이 되어버리기를. 그러면 이 세계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한 달 가량 맘 졸이며 지낸 후로는 더 이상 현실 세계에서의 암울한 상황이 두렵지 않다. 이곳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이 나를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기에 충분할 만큼 단련 시킨 것이다.
몸을 써서 사는 사람은 무인도에 버려둬도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어머니들의 말씀을 더욱 더 절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현실은 역시 암울하고 헤쳐 나가기 버거운 것들이 산적해 있다.
나는 여전히 그날 청룡을 본 것을 함구 하고 있었고, 여전히 황제가 두렵고 싫다.
황제와 신하들의 싸움이 벌어지든, 황제와 청룡의 싸움이 벌어지든,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칠 거라는 사실도 나는 이미 느끼고 있다.
곧. 어쩌면 아주 근시일 내에 그 일은 벌어진다.
아직 황제가 그의 동태를 완전히 파악하진 못한 듯 했지만 어디서 어떤 식으로 증거가 발견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사실을 함구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러웠지만 나의 마음 속 어딘가 에서는 이런 마음도 조금씩 삐져나오고 있다.
‘차라리 그가 황제가 되면 어떨까? 어차피 그도 수일 내에 황위를 찬탈하려는 것 같은데.’
내가 돕는다면 그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어차피 사극 드라마에서도 정변은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일상 중 하나였다. 현실의 역사도 그렇게 흘러갔으니, 내가 이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상은 이 삶이 편안할 거란 기대 자체를 말아야 한다.
***
이미 암투는 시작되고 있었다.
황제의 움직임은 미미했지만 황태후의 움직임은 오히려 도드라졌다.
얼마 전에는 황태후가 친히 황제를 대신해 잠행 길에 올랐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잠행에서 누구를 만날 거라는 사실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황태후가 이전에 황위 서열 두 번째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보아 넘길 일이 아니었다.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중간에 원로원 감사 태유원이라는 자가 황제를 알현하고 갔다. 원로원 감사가 무엇인지 궁인들에게 물어보니 황제와 맞먹는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칭하는 이름이란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쯤 되는 것 같다.
황제와 신하들의 다과상을 준비했던 궁녀들에게서 들은 말을 종합해 보니 혼인식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거야 내가 너무나 바라는 일이긴 했지만 이것 역시 황궁의 입지가 약한 나에겐 위협이 될 수 있다. 황궁의 좋은 방에서 기거하고 보호를 받을 만큼 타당한 이유는 황제의 여자라는 것을 인정받는 길 말고는 없는데, 그 길이 무한정 미뤄져 버렸으니 앞으로 누가 날 공격하게 되더라도 오롯이 나 혼자만이 날 지킬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것이 신하들의 뜻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내가 황제를 이용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것을 막고 싶어 했으니까. 당연한 수순이다.
원로원의 감사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지.
황족이면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유일한 자라고 한다. 그들은 20년에 한 번 씩 황족 원로들 중에서 선출 된다.
이것도 요즘의 정치인들과 별반 다르진 않지만, 이들이 선출 되어서 활동하는 기간은 그보다 긴 20년이다. 이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이것도 짧다면 짧겠지만.
그들은 황제와 황족들을 감시하고 올바르지 못한 길을 가려 들면 강제로라도 그들을 막는, 이른 바 견제 세력이다. 견제 세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원로원 감사에겐 병권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이 집중 되어 있어서 그들이 마음먹으면 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요. 황제를 갈아 치우는 것도 가능한 자이기에 부패한다면 아주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이 나라의 건국 이래로 한 번도 어기지 않는 이 세계의 법칙이었고, 그동안 원로원은 견제 세력 이상의 월권을 행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원로원 감사는 이미 황제에게 도전 했다. 더 이상 삐딱하게 나간다면 황제를 바꿀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황제가 될 사람은 청룡 말고는 없다고 짐작 할 수 있다.
황제라고 그걸 모를까.
황제는 청룡이 가만히 있어도 그를 향한 감시를 강화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실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일 또한 어제 이미 경험했지 않은가.
황제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를 불러들인 것이 황제라는 것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살벌한 황제의 표정에서. 능글맞은 눈빛을 갖고 있지만 속내를 감추는 청룡의 얼굴에서.
그리고 내가 간파했다는 것을 그 역시 간파 해 버렸다.
‘이미 나를 간파한 것이더냐. 내가 무얼 할지, 눈치 챈 것이냐?’
청룡의 눈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더이상은 이대로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봐야겠어.’
나는 그길로 청룡이 참선수행을 가장해 기다리고 있는 동굴로 찾아갔다. 그가 벌이려고 하는 짓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위해.
***
청룡은 이번에도 참선 수행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일반적인 참선 수행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돌 같이 딱딱해.’
청룡은 서리가 낀 것처럼 온 몸을 덮고 있는 하얀 가루 속에서 딱딱해진 몸을 가부좌 한 채 앉아 있었지만 기괴하게도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며 내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기민하게 움직였다.
“살아 있어요?”
청룡의 눈이 웃는 듯이 보인다고 느낀 순간, ‘얼음 땡.’ 주문을 따라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움직이듯 그의 몸도 천천히 풀어졌다.
“진짜 돌인 줄 알았네. 이거 뭐예요?”
그의 몸에서 바스러져 나온 돌가루를 털어내며 물었다.
“음, 이거? 나만의 보호색이니라.”
청룡이 뻐기듯 중얼거렸지만 그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고 목소리 또한 과도하게 낮아서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완벽한 진심 같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정신이 팔린 채 있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무엇을 하려는 것으로 보이느냐?”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청룡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질문 이외엔 답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하라는 듯이.
“조만간 누군가를 움직일 것입니까?”
나는 또다시 질문을 했다.
“내가 누구를 움직일 것 같으냐?”
그는 또 이렇게 질문했다.
“그 사람이 원로원 감사입니까?”
“내가 원로원 감사를 부릴 수 있는 위치로 보이느냐?”
그의 질문은 여지없이 이어졌다.
‘이거 완전 스무고개나 다름없잖아?’
하지만 난 여기서 이미 답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었다.
“원로원 감사 말고도 여럿 있으신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사람이더냐.”
“황자 전…….아, 아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위 왕 이라고 불러라.”
“위 왕…….”
“땅도 직책도 없는 이름뿐인 자리지만. 어쨌든 황제가 있는 이상, 내가 위 왕으로 불리는 게 맞지 않겠느냐.”
“그, 그렇습니다.”
“그래. 네가 궁금한 것은 그것뿐이더냐.”
위 왕으로 칭해 달라는 그가 또다시 질문을 해 왔다.
“더는 묻고픈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말에 청룡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미 답은 다 알았겠지.”
“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는 원로원 감사와 황궁 안에서 그를 도울 사람을 움직일 생각이다.
이미 그의 스무고개 같은 질문 안에서 답을 찾았고, 그 역시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가 알아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려라. 내, 너 또한 자유롭게 해 줄 터이니.”
나는 그의 말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읍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