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냐?”
누가 와 있는지 알 것 같았음에도 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천정에 매달린 채 실긋 미소 짓고 있는 빡빡머리의 인영이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착지했다.
“뭘 그리 낑낑거리고 있는 것이냐.”
“아아…….누구신가 했네요.”
“나 말고 누가 올 사람이 있더냐?”
“아니요.”
괜스레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그가 황족과 멀어지라곤 했지만 개고생을 하라고 지시를 내린 건 아니었음에도 울화가 그 쪽으로 치밀었다.
“무엇에 이리 뿔이 났을꼬.”“바쁩니다.”
“에에? 뭐가 그리 바쁘더냐.”
자꾸만 솟아나는 화기에 냅다 청룡의 앞으로 옷 무더기를 던졌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화기를 참지 못했다.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다 무엇이냐.”
“무엇이긴요. 어느 무책임한 황족께서 하신 명령 덕에 힘없는 무수리 하나가 죽어나는 광경이지요.”
“황제와 멀어지는 대가로 이 일을 한다는 말이더냐?”
확연히 재밌어하는 그의 모습에 다분히 뿔이 난 얼굴로 대거리를 하고 말았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래?”
“일각이 될 때까지 이걸 다 하라는데…….소녀는 바느질을 못 하옵니다.”
“뭐라? 무수리가 바느질을 못 해? 그거, 참 괴이쩍구나.”
“무수리라고 다 바느질을 잘 해야 합니까?”
청룡이 별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만, 그래도 무수리라 하면…….바느질과 빨래에 이골이 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
“그런 걸 보면, 너는 참 별난 무수리로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자꾸만 빙글거리는 청룡의 모습에 기어이 눈물이 핑 돈다.
“어, 어? 또 우는 것이냐? 생김새는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것이, 참 많이 울기도 하는구나.”
“소, 소녀의 어디가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습니까!”
낮은 목소리로 꽥, 소리치니 청룡이 얼굴의 특정 부분으로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보통은 이렇게 이마와 턱이 좁고 눈매가 사나운 이들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다고 한다.”
“이런, 얼굴이요?”
“그래. 하여, 궁에서는 이런 여인들을 최고의 미인으로 꼽기도 하지.”
“정말 미인이라서가 아니고…….”
“미인의 기준이 정치적이라고 봐야겠지.”
“그런 것입니까?”
청룡이 낮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허나, 미인의 기준이 정치적이라고 해서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정말 그런 얼굴의 미인이 강한 성정을 타고 났다면, 황궁의 사람인 내 입장에서도 도리어 복이라 봐야만 하겠지.”
“…….그게 어째서 복입니까? 정말 미인인 게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미인이란 것인데.”
“정치적 입장의 미인이지만, 너는 꽤 귀여운 구석이 있으니 딱히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옵니까?”
“네겐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황궁의 미인들처럼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스하게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나는 네가 진짜 미인이 아니라 해도 마음에 든다.”
“치. 제가 청룡님의 마음에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황제보다는 청룡이 낫다고 생각 하면서 겉으론 이렇게 툴툴거렸다.
“그럼, 황제의 마음에 들겠느냐?”
“에에?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됩니까?”
“그러니 말이다. 황제의 마음에 들려는 것이 아니라면, 내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앞으로 네 목숨 줄을 틀어쥐고 움직일 사람인데.”
“…….”
유구무언이다.
“아, 아무튼. 소녀는 아직 누구의 마음에 들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
‘앞으로 일이 어찌 돌아갈지 알고 상대를 마음에 품겠어? 상황 돌아가는 걸 봐서 발이라도 재빨리 빼려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 일이지.’
청룡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뜩치 않으면 발을 빼겠단 말로 들리는구나.”
“소, 소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건 그렇다.”
“그러니 말입니다. 소녀가 무얼 하든, 그것은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서가 아니라…….온전히 소녀의 안위를 위한 것이니, 착각 하지 마십시오!”
톡 쏘듯 대답하자 청룡이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래. 그렇겠지. 허면…….”
청룡이 다가온다.
“어, 어? 어…….오지, 마십시오! 소리를 지르겠습니다.”
“소리? 질러 보아라.”
“예?”
“소리, 질러 보라는 말이다.”
“…….”
“쯧. 넌 아직 멀었느니. 적군과 아군도 제대로 몰라보고. 제대로 활용도 못하니. 눈빛이 좋으면 뭘 하겠느냐?”
“그게, 무슨…….”
“이리 줘 보거라.”
청룡이 쥐고 있던 옷 보따리를 강탈하듯 빼앗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게 다…….청룡님의 솜씨가 맞습니까?”
“왜. 새삼 반할 것 같으냐?”
청룡은 말싸움으로 잡아먹은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단시간에 모든 옷감 수선을 끝마쳤다. 커다란 남자의 손으로 작은 바늘에 실을 꿰어 섬세한 바느질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건 오산도 대단한 오산으로…….’
“경기도 오산이었어.”
“뭐?”
“아, 아닙니다.”
‘긴장이 풀리니 장난질이 하고 싶었던 거냐? 거기서 경기도 오산은 왜 튀어나와. 바보 같이!’
청룡의 도움으로 말끔해 지다 못해 새 옷처럼 보이는 옷을 보니 기분이 자꾸만 묘해지고
있었다.
“황족인데…….참, 바느질을 잘 하시네요. 게다가 여인도 아닌 사내가…….”
“내가 좀, 잡기에 능하니라.”
“아…….”
어쩐지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이 납득이 되어버린다.
“감사합니다.”
“그래. 많이 감사 해야지. 그건 그거고……. 조만간 네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제게 무엇을요?”
“황족들이 토사곽란에 이르도록 해야만 한다.”
“황족…….언제요?”
“수일 내로 연통을 줄 터이니, 그때가 되면 은밀히 황궁 수라간에 미량의 뱀독을 풀면 될 것이다.”
위험하다. 아무리 황제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라 해도 이건 절대적으로 목이 달아날 일이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청룡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말았다.
“무슨 짓을 저지르시려는 것인지 몰라도, 이렇게 대놓고 소녀를 쓰시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까봐 겁이 나느냐?”
“하나 뿐인 목숨이니까요.”
청룡이 히죽 웃으며 볼을 톡톡 두드린다.
“아, 하지 마십시오!”
“귀엽구나. 귀여워. 하지만 걱정 말거라. 내, 네게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니니.”
“예?”
“궁에 너 말고도 심복이 많다. 네가 생각 하는 것보다 아주 많이. 너는, 그들과 때를 같이하여 움직이는 것뿐이니……. 언젠가 그 일이 탄로 나더라도 죽는 것은 네가 아닐 것이다.”
“그게 무슨……?”
‘나 말고 죽을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야?’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봤을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넌,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널 단발성으로 쓰고 버릴 생각이 없으니”
믿어도 되는 걸까? 이 사람을…….
“믿어라. 이 일로 내가 무언가 갖게 된다면, 너는 적어도 그것의 반은 갖게 될 것이니. 그날은 모후가 돌아오는 날로부터 시작이니라. 그러니 미리 준비하고 있어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청룡은 거듭 어깨를 다독였다. 너는 나를 믿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듯이. 앞날은 그때가 되어봐야 알 것이라는 단호한 표정에 나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날이 도래했다.
[낮게 풀피리 소리가 들리면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밀서는 녹색의 실뱀으로부터 배달 되어왔다. 뱀은 똬리를 틀며 아가리를 열어 밀서를 토해냈고, 나는 밀서를 받은 후로부터 약 삼십 여 분이 흐른 뒤에 그 풀피리 소리를 들었으니.
***
황궁 수라간에 몰래 들어가니 궁인들이 은밀하게 눈을 찡긋 하며 신호를 보내왔다.
‘저 사람들이 청룡의 사람들인가?’
궁인들의 묵인 하에 은밀히 음식에 뱀 껍질과 꽃가루를 소량 뿌려 넣었지만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양이 초과 됐으면 어떡하지? 소량을 넣어야 토사곽란에 미약한 괴질이 일어날 텐데.’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어느 정도가 소량인지 알 수 없어서 눈대중으로 넣긴 했지만 실제 황족들은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어디선가 국의 구수한 냄새를 맡고 들어 온 쥐 한 마리를 잡아 몸소 실험을 해 봤다.
일전에 뱀도 잡아 본 손이라 그다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커다란 쥐의 꼬리를 답삭 잡아들고 일시에 쥐의 아가리 안으로 국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이 놈이 순식간에 내 손을 물고 격렬히 저항하는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지만 나는 힘겹게 비명을 입 속으로 삼켰다.
“아야!”
나는 여전히 저항 중인 쥐를 사납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찍찍찍찍.
“곱게 죽여주려고 했더니, 네가 명을 자초하는구나?”
나의 목소리가 낯설은 서늘음으로 가득찼다.
찍찍찍찍
내 이 목소리를 들은 듯, 쥐 역시 온 몸을 떨며 서서히 저항을 멈춰갔지만 고약스러운 짓을 벌인 쥐를 용서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동안 비명을 삼키고 쥐를 노려보고 있으려니 점차 쥐의 몸에 두드러기 비슷한 것이 생기며 온 몸을 뒤트는 쥐의 움직임이 포착 되었다.
찍찍찍
“반응이 오는 중인 건가?”
‘됐어.’
얼마간 발악을 하던 쥐는 서서히 싸늘한 주검이 되어갔다.
나는 괘씸한 쥐에게 벌을 주기도 하면서 완전범죄를 꾀하고자 그 사나운 쥐의 몸통을 미련 없이 아궁이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 했다.
‘지독한 년. 이 세계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 포악한 세상에 익숙해진 거냐?’
나는 내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이미 뱀을 죽이기는 했지만, 뱀보다 유순해 보이는 쥐까지도 아무 거리낌 없이 아궁이 안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 스스로를 보며 내 안에 있던 잔인함에 새삼 진저리를 친 것이다.
쥐는 순식간에 잿더미에 뒤섞여 형체를 잃어갔고, 나는 내게 진저리를 친 것과는 별개로 그 광경을 보면서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하나의 작은 생명이 또 죽는구나. 그런 무덤덤함 뿐. 그래서 나는 어쩌면 이 세계의 여자들처럼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곳에 떨어졌을 때, 적응 기간 동안에 느꼈던 미약한 죄책감조차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런 내가 점점 무서워졌다. 이 세상에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악녀가 된 후에,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원래 있던 세상으로 타임 슬립 하게 되면 원래의 내 모습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이미 알다시피, 이 세상은 사극 드라마가 아니라 실재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두려울 뿐이었다.
***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빨래터로 향하던 나는 권능전 근처로 달려가는 검은 옷의 무리들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 전역으로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옥새가 사라졌대.”
“옥새가?”
“그게 사라지면 황제는 정통성을 잃게 되는 거지 않아?”
“그렇지. 누군가 황위를 찬탈 하려고 수를 쓴 게 분명해.”
지금 권능전 근처의 별채에는 토사곽란으로 쓰러진 황족들이 병구완 중이고, 황태후 역시 그 일로 쓰러졌다. 이런 와중에 황제의 정통성이 의심 받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황제는 대단히 크나큰 곤경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궁인들과 달리 황제가 걱정 되지는 않았다. 옥새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라는 걸 이미 짐작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굳이 짐작하는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현 황제 말고 다른 누군가가 황제가 되더라도 황궁은 지금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청룡이 내 방으로 들어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다.”
나는 청룡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옥새를 빼돌린 것이, 청룡님이십니까?”
“그렇다.”
청룡은 거짓 없이 곧바로 수긍 했다.
“토사곽란을 일으킨 것도 그럼, 옥새를 빼돌리기 위해서였겠군요.”
“혼란이 있어야 경비가 느슨해질 터이니, 달리 방법이 없었느니라.”
“황족에게 접근 할 수 있는 사람이 소녀뿐이라서 그런 것이었습니까? 소녀를 위험에 빠트려서라도 옥새를 빼돌리려고, 이 목숨 하나를 버리려…….구슬리신 것입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다분히 분노를 담아 물었지만 청룡은 역시 의뭉스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너는 그렇게 값어치 없는 목숨이 아니니라. 그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청룡이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왜, 제가 값어치 없는 목숨입니까?”
“너는……. 황제의 여인이니까.”
“……이용 가치가 높긴 한가봅니다? 하지만 소녀가 아무리 황제의 눈에 든 여인이라 해도,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되면 죽은 목숨일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널 죽게 하진 않는다. 절대로. 더구나 넌, 내 도움이 없더라도 쉽게 죽을 아이가 아니다.”
“소녀가 독을 풀기 쉽도록 궁인들이 빠져주긴 했지만, 그들이 소녀를 이미 알고 있으니 일이 틀어지면 죽을 목숨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청룡님은 그것이 아니라 하십니까?”
“이미 다른 곳에서도 독이 풀렸기 때문이다. 내, 이미 말했을 텐데. 잊었더냐?”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럿이 움직였지만, 소녀는 혼자 독을 풀었습니다.”
“허나 너를 도와 숨겨준 이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니 독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아도 네가 죽을 일은 없어!”
“그럼, 굳이 소녀가 독을 풀 필요도 없지 않았습니다. 허나…….소녀가 독을 풀었습니다. 말씀 해 보십시오. 어찌하여 소녀가 독을 풀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그러자 청룡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정수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황족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수라간 궁인들을 움직이려면, 황족 취급도 받지 못하는 나보다는 황제의 여인으로 알려진 네가 필요했다.”
“황제의 여인이 황족을 독살하는 게 어찌…….”
“황제의 여인이 황족을 독살한다면, 그것은 황제의 뜻이기도 하다. 황제가 관심을 갖는 여인이, 그것도 황제를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것이라 알려진 여인이 황족에게 독을 먹인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음이겠지. 나는 그런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래. 황족의 식사를 담당하는 수라간 궁인들은 다분히 오만한 것들이라, 그 정도의 명분이 있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내 사람으로 한 순간 쓸 순 있지만…….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그 일을 하고 난 뒤에야 회유 하고 완벽한 내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황제가 되셔야 하니까요?”
“변명은 않겠다.”
기가 막혔지만 나를 사지로 내몰려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일단은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짐짓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
“준비는 얼마나 되어 가고 있습니까?”
“무슨 준비?”
“황제가 되실 준비 말입니다.”
나의 말에 청룡은 느릿하게, 그러면서도 오만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등극 할 수 있을 만큼.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니라.”
“그럼, 소녀는 앞으로도 무사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다. 앞으로 이 길 전체에 무수히 많은 피가 뿌려지겠지만, 너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청룡은 재차 다짐하듯 말했고 나는 조금 무기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코가 석자인데, 그거면 됐지 뭐.’
“제가 죽지만 않는다면…….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나는 점점 더 잔혹해지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 얼마만큼 잔혹해지든, 살아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 하면서.
청룡은 그런 나를 다독이듯 속삭였다.
“넌 정말 강한 여인이다.”
“소녀도 압니다. 얼마나 잔혹한 여인인지, 얼마만큼 잔혹해질 수 있는 여인인지.”
“잔혹해 진다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니라. 특히, 황궁에서는…….도리어 미덕이지.”
“그렇습니까?”
“그렇다.”
“안심이, 됩니다.”
‘아니, 죽어도 안심 되지는 않을 거야. 그냥 변명 할 뿐. 두려울 거야.’
사극 드라마와 지금의 현실은 다른데 이처럼 잔인한 사람들을 보고, 잔인한 광경을 보며, 잔인한 짓을 하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뱀을 죽여서 황제 앞에 들이밀었을 때부터, 쥐에게 독을 먹이고 불 속에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어 태웠을 때도, 이미 내 안의 무언가는 부서지고 깨져서 잔혹성만 남아버린 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렵고, 또 두려웠다.
이곳에서 자꾸만 잔혹한 여인으로 살아가다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내가 다시 원래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니라면…….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문명의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지. 점점 막막한 기분이 되었다.
“다 잘 될 것이다.”
“그러시겠지요.”
***
다음날,
수선이 끝난 옷을 들고 빨래터로 찾아갔다.
수선 방으로 옷을 가져가려 했으나 상궁의 만류로 찾아 온 곳이다.
차가운 댓돌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려니 상궁이 오기 싫은 길을 재촉하듯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수선은 다 끝난 것이냐?”
“예. 상궁.”
“어디 보자.”
상궁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어디~ 보자…….”
이번엔 눈에 띌 정도로 얼굴 전체가 구겨진다.
‘역시,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었구나?’
상궁은 꼬투리를 잡고 괴롭힐 빌미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한 듯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으로,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구나.”
“미천한 실력을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지?”
겸손의 말에 상궁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그럼 내가 너에게 마음 편히 일을 더 시켜도 되겠구나. 일을 그리 똑 부러지게 하는 것이 아니니, 황궁 침방나인으로 불려 갈 일도 없을 테고…….”
“예?”
“뭐, 하니? 일을 더 해야지.”
건수를 잡은 듯 보이는 상궁의 표정에 불안함이 밀려 올 때였다.
“이, 일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로구나. 바빠! 얼른 안 움직일 거니?”
상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궤변을 늘어놓으며 빨랫감과 수선해야 할 옷을 들고 왔다.
“앞으로도 쭉~ 부탁 한다.”
“이걸, 다요?”
“왜. 싫으니?”
“아, 아니요. 하겠습니다. 해야지요.”
별궁의 지붕에서 빨래터를 쳐다보고 있던 청룡은 상궁 앞에서 쩔쩔매는 의주를 보며 깊이
혀를 찼다.
“쯧쯧쯧. 저거, 저거, 똑똑한 척 하면서 은근히 어리바리하단 말이야.”
***
고개를 숙이고 별궁의 구석진 방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던 때였다.
“무슨 일로 그렇게 힘이 빠졌을꼬. 또 심술궂은 상궁이 일감을 몰아주었는가?”
“또 무슨 일이세요.”
지붕 위에서 이죽거리는 청룡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놀리고 싶어서 오신 거라면 가세요.”
“내가 지금 널 놀리려고 온 것 같으냐?”
“아니면요?”
“이번에도 쩔쩔 맬 것 같아서, 도와주러 왔느니라.”
“저를요? 왜 또 도와주신다는 건데요? 진짜 이상한 황족이시란 말이야. 전에는 황궁으로 못 보내서 야단이시더니.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계속 이렇게 도와주려 하시고. 무슨 마음이신 건데요? 청룡 님. 혹시, 저 좋아 하시…….는 건 아니죠?”
“알면서 왜 묻느냐.”
“좋아하세요?”
“안 좋아한다고!”
“아아.”
청룡이 빛나는 정수리를 쓱쓱 만지며 말했다.
“내, 참선 수행으로 바쁘긴 하다만. 오늘처럼 네가 이런 꼴로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찾아 와 봤다.”
“예. 그러시군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빨래랑 수선이요.”
청룡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놈의 상궁. 매번 하는 짓이, 한결같구나.”
“그러게요. 그러네요.”
“내가 또 도와주랴?”
나는 청룡의 말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정말요?”
“그래.”
“해 주세요.”
도움의 손길은 거부하지 않는다. 손길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대답은 즉각적으로.
‘발을 빼고 싶으셔도 늦으셨습니다. 청룡 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청룡은 단, 몇 시간 만에 옷을 수선하고 각을 잡아 다렸다.
빨랫감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가져온 검은 물을 욕조에 부어 빨랫감과 함께 몇 번 휘휘 젓고는 일각이 채 되기도 전에 짜서 빨래터로 가져갔다.
청룡이 검은 물을 가져와 빨랫감에 부었을 적엔 기겁을 하며 말렸었지만, 빨래터에서 헹궈 온 것을 보자마자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빨래는 현실에서 쓰이는 세제로 빤 것보다 희고 깨끗해져 있었다.
“이게, 아까 전의 그거랑 같은 옷들이 맞나요?”
“그래. 아깐 그렇게 안 된다고,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더니. 이젠 마음이 좀 놓이느냐?”
“놓이다마다요. 아주 좋습니다. 아주,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나는 신기함에 청룡이 썼던 검은 가루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것은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면 꼭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빨래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빨래를 한 번에 할 수 있을 정도면, 돼지우리 같은 내 집의 빨래는 단숨에…….으흐흐흐.’
현실 세상으로 돌아간 것도 아닌데 마음만은 이미 현실로 돌아간 것 같이 충만해졌다.
‘저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졸라서라도 받아놔야겠어. 혹시 알아? 성분 분석을 하면 엄청 기발한 빨래 성분이 있을지? 저 정도 잇 아이템이라면, 대형 회사에 큰돈을 받고 팔아넘길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나는 돈방석에 앉는 거지.’
“으흐흐.”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히죽거리며 웃는 것이냐. 기분 나쁘다. 웃지 마라.”
“힉-!”
***
일주일 동안 주야장천 옷감 만지는 일만을 시키던 상궁은 아무리 일을 만들어줘도 뚝딱 해내는 나를 보며 백기를 흔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큰 일을 내게 던져주었다.
“예? 황군의 식사를 제가 맡으라고요?”
“왜? 이정도 일쯤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아, 아니 그것은…….”
‘수선이랑 빨래를 그동안 청룡이 다 해 줘서 가능했던 거고. 아, 나. 미치겠네?’
“못하겠느냐?”
상궁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지며 손마디를 우두둑 꺾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 합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예, 예.”
“그럼……. 수고해라.”
“예…….에…….”
‘망했다.’
상궁은 이번에도 수라간에 궁인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일을 시켰다.
황군의 숫자는 백 명에서 백 여섯 명 가량 된다고 했다. 궁 곳곳을 오가며 전체를 지키는 이들이라 대부분 엄청난 대식가이다. 이들에게는 아침, 간식, 새참, 점심, 저녁. 이렇게 총 다섯 번의 식사를 챙겨 주어야만 하고, 솥은 일반적인 크기의 솥보다 몇 배나 크고 두꺼운 솥을 각각 다섯 개 씩으로 총 스물다섯 개를 사용해야 된다.
거기다 이들은 꼭 하루 세 끼 모두, 고기가 들어가야만 하고, 채소와 과일도 그에 못지않게 넉넉히 준비해야 하기에 하루 전체를 동동거리고 움직여도 이들의 식욕을 제대로 채우기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다섯 개의 솥 말고도 달궈진 솥뚜껑 여러 개에 올려진 반찬거리를 하나도
태우지 않고 고스란히 해 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지?’
“콜록, 콜록, 아이고 매워라.”
안 그래도 매운 불 피우기가 더욱 맵게 느껴졌고, 솥에서 끓고 있는 돼지머리는 현실 세상에서 본 것보다 징그러웠다.
더구나 돼지 머리의 형상은 살벌이 치켜 올라간 눈과 한쪽만 치켜 올라간 입매. 돼지 귀 쪽에 딱 붙어서 작은 나뭇조각에 꿰어진 돼지 족발은, 양 팔을 들고 벌을 서면서도 나를 비웃는 모습처럼 보였다.
게다가…….
“황제랑 너무 닮았다고!”
어찌나 못생기고 징그러운 돼지 머리인지. 원래 살던 곳에서 보았던 돼지머리는 저보다 작은 머리에 누가 봐도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라 도리어 귀여울 정도이다.
어떻게 된 세상의 풍습인 것인지, 이곳의 돼지머리는 너무나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몇 번을 내려다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으, 흉해!”
반쯤 넋을 놓고는 부글부글 끓는 솥단지를 아련하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바람이 ‘쉭’ 하고 불어 닥쳤다.
그리고 잠시 후,
“어?”
커다란 솥 안으로 불려 놓고, 씻어 둔 쌀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쓸어 담겼고, 공중부양 하듯 솥이 튀어 오르며 아궁이 위에 착지했다.
아궁이의 불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 줄어들었다 커지기를 반복하며 불을 조절했고, 그 불이 조절 될 때마다 나는 불이 작아진 아궁이 쪽에서 기다렸다가 반찬을 볶던 뚜껑을 내리고 새로 끓여야 하는 반찬과 뚜껑을 갈기만 하면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과일과 신선한 채소, 간식들이 어딘가에서 보자기 채로 날아와서 밖에 펼쳐 놓은 상 위로 착지했다.
얼결에 하루 치 식사를 모두 마련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디서 또 도와 준거야.’
누가 도운 것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청룡은 언제나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다가 도와주곤 했고, 밤이 되면 내가 있는 방으로 숨어 들어와 상냥하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거나, 그가 잘 하는 여러 가지 잡기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디선가 주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홀연히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가 종종 찾아오면서 그에게 정이 들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조금은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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