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룡과의 기묘한 감정적 줄다리기를 하는 와중에도 황궁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수라간 궁녀가 새벽녘 자리를 이탈했다가 한 낮이 다 되어서야 호수 밑에 빠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황제의 승은을 받으려 수를 쓰다가 황후나 많은 비빈들 중 누군가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황궁에서 도망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그녀가 수라간의 쌀이나 비싼 식자재를 밖으로 몰래 밀반출해서 사리사욕을 챙겼다는 말도 있었으며, 또 다른 뒷소문도 아주, 아주 많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밝혀 내지 못한다.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진즉에 훼손 된 후였고, 발견은 아주 늦었으며, 이곳의 수사 방식은 내가 속해 있던 세상과 억만년은 차이가 날 정도로 미개하기 짝이 없다.
수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찔끔 맛만 보고 끝이 났다. 현실의 세상에서도 어지간한 수사 방식에는 열불을 토해내며 친구들과 욕을 싸지르는 나로서는 지금의 이 현실이 믿을 수 없이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들을 섣불리 떠들고 화를 낼 수도 없다.
죽은 수라간 궁녀처럼 나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죽을 이유가 있었다.
황제의 관심을 받는 궁녀이기에 그 죽음이 잠시 나를 피해 갔을 뿐, 황궁에서 도망친 것은 소리 소문 없이 죽어 나가든, 대놓고 죽임을 당하든, 이 궁에서는 죽임을 당할 이유에 부합된다.
당장 내 일이 아니었을 뿐이다. 며칠 전에는 상궁 몇이 황궁의 암투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후궁과 황후의 미모를 두고 잘못 두둔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외에도 내가 이곳에 온 후로 독살 당한 사람들의 소문은 무성했고, 직접 가까운 곳에서 목격 하게 된 장면도 꽤 되었다. 독살을 당한 대상은 황제의 소문에 나오는 비빈들이었다.
비빈을 죽인 것은 여자들이었다. 똑같은 궁인들. 언젠가 동무였을 궁인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뻔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는 황제, 혹은 황비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비빈들을 죽인 사람이 황제 단 한 사람일 수는 없었다.
황제이거나, 황비이거나, 둘 다이거나.
그들은 그렇게 비빈을 매번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 해 왔다.
그런 짧은 총애에도 많은 궁인들이 목숨을 바칠 만큼, 이 황궁은 쓸쓸하고 고된 매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전의 나는 완벽하게 비껴가 있었다.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는 궁녀이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내 처지를 보면, 다른 어떤 궁녀들보다 죽음과 가깝다.
이제는 황제가 나를 찾지 않는다. 찾더라도 다소 시큰둥한 기세다. 황궁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황제가 손끝만 움직여도 옷을 벗고 드러눕는다 했다.
나를 찾을 이유가 없다. 그간엔 황궁에서 알아주는 미인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근자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날에 와서야 이 황궁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라마만 봐서는 썩 이해가 가지 않던 우매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 혹독하게 쓸쓸했으며, 고된 삶의 연속이었다. 이런 삶 속에서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 이들뿐인 공간에 갇혀 있으면 미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런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어리석고 우매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여전히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황족에게 미량의 뱀 껍질 독을 조제해 탈이 나게 만들고 사라졌다.
그러면 어디선가 청룡의 심복이라는 자들이 나타나서 쓰러진 황족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가 되돌려 놓았고, 그렇게 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사건 하나가 터져 있었다.
황제를 사칭해 잠행을 나간 황족들이라고 했다.
돈 많은 지방 관리들에게 돈을 뜯어내고, 사극에 나오는 반촌과 마찬가지인 가난한 동네에 쌀과 고기 등을 몰래 가져다 둔 경우도 있다.
그것이 황제의 분노를 샀고, 죽임을 당하진 않지만 황제가 보는 앞에서 평생 죽을 만큼 고통을 받게 만들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관리는 황궁에 들어왔다가 실수인 척, 궁인의 몸에 바른 뱀 껍질 독으로 인해 온 몸에 괴질이 생겼다.
그 일은 여전히 사흘이 멀다 하고 생겨났다.
하지만 나와 연관을 지을 수는 없게끔 아주 은밀하게 청룡이 지시한 동선대로 복잡한 동선을 따라가며 여러 명의 궁인들에게 산발적으로 독을 묻혔다.
그 후에 나는 습관적으로, 혹시 묻었을지도 모르는 꽃가루나 꽃 기름을 털어내는 의식에 매진하고, 또 매진하는 것이 일이었다.
이제는 그것이 밥 먹는 일처럼, 숨 쉬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아직까지 죽인 사람은 없지만 조만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항상 체기가 얹힌 것처럼
온 몸을 사로잡았다.
그래서인지 죽이지도 않은 궁인들을 죽인 것만 같은 꿈을, 죽임으로 인해서 귀신에게 쫓기는 꿈을 꾸는 날이 빈번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이면 숯가루를 풀어 넣은 물에 몇 번이나 몸을 씻었다.
그러자 몸에 하루도 숯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어휴, 냄새~”
“여인이 되어가지고 향긋한 냄새는 풍기지 못할망정. 이게 무슨 추태야, 추태가?”
오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궁녀들이 어깨를 치고 걸어가며 말을 걸었다.
숯가루를 풀어 넣은 물로 매일 밤 몸을 씻으니 몸 전체가 며칠은 씻지 않은 것처럼 까맣게 때가 타 있었고, 청룡이 준 검은 가루로 매일 빨아 널은 옷은 하얗고 청결한 냄새를 풍기는 덕분에 기괴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궁인들이 어깨를 치고 가는 일은 예삿일이었지만, 간혹 그런 궁인들이 네댓 명씩 죽어나가면 견딜 수 없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궁인들이 죽어 나가고 나면 그들 사이에서 두려운 시선이 내게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 하는 거야?’
시선이 머물렀다가 찔끔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아님, 나를 좋아하는 황제가 죽였다고 생각 하는 거야?’
그러나 지금의 황제는 내게 신경을 쏟을 새가 없으니 두 번째는 아닐 것이다.
황제의 관심이 짧다는 것도 확실히 체감 한 뒤였다. 이 곳의 생활은 사극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긴장감 있고 드라마틱한 궁중 암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고인 듯, 정적으로 조용하게 무언가 일이 생기고 조용히 수습 되는 일의 반복. 마치 물에 잠깐의 파동이 일어났다가 잠잠해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뿐이었다.
화가 나는 날과 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번엔 그런 때를 기가 막히게 알고 청룡이 나타나곤 했다.
울고 있으면 꼭 뭔가를 갖고 와서 먹으라고 던져주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울지 마라 뚱하게 한마디 하고 간다.
울지 마라. 흉하다.
멋대가리도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긴 그가 그렇게 몇 번 씩 우는 나를 달래고 돌아가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었다. 이래서 여자 주인공들이 남자 주인공을 맹목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건가? 본래가 혼자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라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을 너무 줘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