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계에서 나는 모든 식물을 관리하는 천화원(天花院).
주로 하는 일은 몸과 마음이 다친 영혼들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약초와 꽃은 영혼들의 처결에 맞춰 다양한 물약으로 제조되었다.
연은 천화원에서 물약을 제조하는 정령 중 한 명이다.
“아씨. 미치겠네 …….”
딸꾹
애기정령 달래가 연이 작게 읊조린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천계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상스러운 욕이었다.
아.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밖으로 나와 버렸나 보다.
하지만 연은 너무 놀라 딸꾹거리는 애기 정령을 달래 줄 정신도 없었다.
“하. 어디 간 거야.”
물약이 사라졌다.
그것도 정식으로 허가가 내려온 것이 아닌 중천 뒷골목으로 돌릴 무허가 물약이었다.
“달래야. 혹시 여기 있던 물약 못 봤니?”
온 방과 약제실을 뒤지던 연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다행히 달래가 아는 눈치였다.
“아까 회귀 판결을 받은 망자가 있다고 하여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아있어서 다행이었지 뭐예요?”
“회귀자? 혹시 망각수를 말하는 거니?”
“네.”
달래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연은 사색이 되었다.
“망각수는 여기 있는데?”
연이 한쪽 문을 열자 수십 병도 넘는 망각수들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머. 그럼 제가 보낸 건 뭔가요?”
달래가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 제일 흔하디흔한 물병이 망각수 병이라 그 병에 넣었다. 한 병쯤 더 있어도 티가 나지 않으니까.
큰일이다.
연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실수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초에 여기 놔두고 한눈을 판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들키면 화연님께 혼나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신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왜 그러십니까?”
연을 따라 덩달아 불안해진 달래가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렀다.
“달래야.”
연은 두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회귀자라면 이승과 저승을 통하는 문으로 갈 것이고, 물약은 문지기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래 문지기가 그 회귀자에게 물약을 전해주기 전에 먼저 그 물약을 찾으면 된다.
연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소리쳤다.
“뛰어!”
하지만 이미 망자는 천계를 떠난 뒤였다.
* * *
으아. 토할 거 같다.
시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연신 구역질을 했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우웩. 대체 뭘 먹인 거야?”
그런데 잠깐.
그는 뭔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시현은 죽었다.
출근하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것이 시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그 뒤 잘생긴 저승사자 형이랑 통성명하고 신들과 열띤 토론을 벌인 뒤 옥황상제님과 어색한 다과 시간을 가졌다.
옥황상제가 말하길, 넌 아직 업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거라. 라고 하더라.
그게 무슨 말인가요. 물을 새도 없이 시현은 이미 이승과 저승을 통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지기 아저씨가 기억을 지워 준다는 물약을 건넸다.
마시라는 건가?
눈치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스윽 올린다.
시현은 내키지 않지만 일단 마셨다. 냄새가 고약했다.
문지기는 깨끗이 비워진 물병을 확인한 후 시계를 슥슥 돌리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시현의 시야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가 보였다.
잠, 잠깐! 소리 칠 새도 없이 폭풍우 한가운데로 뻥 차였다.
으아아아아아!
물약 맛이 왜 이따위인지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그보다 왜 자신의 엉덩이를 차는 건지 궁금했지만 하나도 묻지 못한 채 비명만 악악 질렀다.
그러다가 어딘가 턱 하고 접촉되는 느낌이 들더니 온몸에 전기가 찌리리릿 통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속이 쓰리고 구역질 올라와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간 것이 조금 전까지의 일.
여기서 이상한 점 발견한 사람 있는가?
“왜 …….기억이 나는 거냐.”
그렇다. 분명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마셨다고 했는데 모든 게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죽는 순간부터 사후 세계의 모든 것이.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짜악-!
하지만 이어진 강렬한 등짝 스매싱 덕분에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으이구! 술 좀 작작 처먹어 화상아.”
시현의 엄마 지희가 토하고 있는 아들 시현에게 다가와 등을 내리쳤다.
하필 제대로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시현은 문지르지도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 왜 때려!”
술 안 마셨다고. 죽다가 살아난 아들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억울한 마음에 성질을 내며 엄마를 쳐다보는데 뭔가 평소와 달랐다.
“응? 엄마! 뭐 화장품 새로 샀어?”
“왜?”
“젊어진 거 같아서.”
“아닌데? 똑같은데?”
아들의 뜬금없는 소리에 지희가 눈을 가늘게 뜬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이게 덜 맞으려고 요령을 피우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진 지희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밥 먹어 이 녀석아 하고 부엌으로 총총 걸어갔다.
하지만 시현은 뭔가 자꾸 묘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표 해장국이 차려져 있었다.
꼬르르륵.
일단 배가 고프니 배를 채우고 생각해보자.
거실에 있는 TV를 켜고 식탁에 앉았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자 속이 조금 풀렸다.
“근데 뭐가 저렇게 촌스러. 복고 컨셉인가?”
시현은 음악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중얼거렸다.
옷이며 화장이 10년 전과 비슷했다.
물론 유행은 돌고 도니까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들린 MC의 말에 시현은 두 귀를 의심했다.
[오늘 드디어 데뷔하는 화제의 그룹! 피치피치]
“엥? 피치피치가 왜 데뷔를 해.”
피치피치는 이미 10년도 더 된 그룹이었다.
이름 그대로 복숭아 향기가 그득한 상큼한 걸그룹으로 아이돌 그룹들이 쏟아져 나오던 당시 꽤 인기를 끌었다.
물론 잘 나가다가 멤버 한 명이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폭망했지만.
그 뒤로 앨범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해체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재결합했나? 뭐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식탁 구석에 놓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수저를 놓은 시현이 거울을 덥석 들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으아?”
젊다. 엄청 젊다.
게다가 이 노란 머리는 무엇이고 축 늘어난 티셔츠까지. 죽기 직전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아!”
“아이고 깜짝이야!”
아들의 비명에 지희가 놀라 싱크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떨어뜨린 칼이 위험천만하게 도마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지희는 험악한 눈빛으로 시현을 쏘아보았다.
“저게 술이 덜 깼나.”
그녀가 달려가서 다시 한번 아들의 등짝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사이 식탁에서 튀어나간 시현은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비명을 지른다.
지희가 놀란 얼굴로 아들에게 다가갔다.
“시현아. 한시현. 너 왜 그래?”
시현은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손발을 뒤집어 확인했다.
“엄마. 지금 몇 년도야?”
“뭐?”
“몇 년도냐고.”
“201X년!”
지희의 대답에 시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현이 죽었을 때가 202X년도였다. 그런데 201X라니!
시현은 무려 10년 전으로 회귀했다. 그것도 향후 10년간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 * *
시현은 자신의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10년이나 젊어졌으니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업이라는 말이 걸리긴 하지만 뭐 더 열심히 살라는 말 아니겠는가.
“그래. 내가 죽기 아까운 인재긴 했어.”
스읍 하.
시현은 살아있다는 기분을 만끽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켁켁
사람들이 미친놈 보듯이 쳐다본다.
당연하다. 오늘 온종일 미세먼지 경보가 울려대는데 도로 한가운데서 걷다 말고 미세먼지를 들이마시고 있으니까.
그래도 시현은 상관없었다.
저승의 검은 흙먼지를 떠올리니 이 미세먼지가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졌다.
“역시 이승이 좋아.”
사실 사후 세계라 해서 그렇게 무섭거나 어두침침하지 않았다.
몇몇 곳 빼고는 오히려 밝고 활기가 넘쳤으며 심지어 마을도 있었다.
모든 관계자가 친절하고 우리가 사는 곳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뭔가 살아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너무 이상적이고 완벽했지.”
아무튼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택시 기사님도, 길 한복판에 싸우는 저 커플도. 모자 하나 덩그러니 놓은 채 노숙하는 아저씨도 모두 반가웠다.
이 인간미 넘치는 모습들.
오늘은 마침 대학 동기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시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이. 잘 살아있었냐. 다들!"
그는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는 곳으로 한걸음에 뛰어갔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빠 이래저래 연락이 끊겼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술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저마다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휴학할 것인가 졸업을 할 것인가 다들 고민이 많았다.
그 때 누군가 시현의 뒤로 와서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어?”
“복학할 거야? 어쩔거야.”
친구 한 놈의 질문에 시현은 오징어 다리를 질겅 씹으며 고민했다.
시현은 빨리 졸업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복학을 했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던 기억을 떠올랐다.
“휴학할 거야.”
“왜? 빨리 졸업하고 싶다더니.”
“후회할 거 같아.”
다시 찾은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현은 줄곧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을 던졌다.
“야. 너희는 10년 후의 미래를 미리 알면 뭐 할 거야?”
“뭐래. 갑자기.”
친구들은 시현의 뜬금없는 소리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 로또를 사야지.”
“로또 번호를 외우는 사람이 어딨냐?”
누군가 툭 하고 의견을 내었지만 곧바로 핀잔을 들었다.
“난 투자를 한다.”
“무슨 투자?”
솔깃한 시현이 물었다.
“무조건 건물 사야지. 건물.”
“돈이 있어야 사지. 뷩신아.”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또 다른 친구가 끼어들었다.
맞다. 재개발할 구역을 기가 막히게 아는데 돈이 없다.
시현은 아쉬운 마음에 테이블을 '탁' 쳤다.
어느새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나름대로 깊이 있는 토론을 했다.
돈 많은 여자를 꼬시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못 이룬 꿈을 다시 이루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냥 무서우니 가만히 있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현은 친구들이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10년이나 앞서 살아 보니 별 것 없다.
지금 이렇게 고민해도 어차피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잘 산다.
다만,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중요한 게 돈이었다. 돈의 여부에 따라 출발지점이 바뀌는 것이다.
시현은 집에 들어와서 TV를 보고 있는 부모님 앞에 비장하게 무릎을 꿇었다.
“엄마. 아빠 돈 좀 빌려주십시오.”
“ ……. ”
“내가 10배. 아니 100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거실에 적막감이 흘렀다.
이 미친 새끼야. TV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뺨을 맞았다.
곧 자신의 꼴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시나 지희의 커다란 손이 등 위로 날아왔다.
“너 또 사고 쳤어? 어!”
“으악! 아니. 미안. 됐어. 잘 못 생각했어.”
시현은 지희의 매타작에 맞혀 잘못을 싹싹 빌었다.
방으로 들어온 시현은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
“적은 돈으로 투자할 수 있는 방법.”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시골에 땅을 사볼까 했는데 솔직히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건물이나 땅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부족함은 없었지만 풍족하지 않은 집에서 아마 전 재산을 털어 주어 겨우 하나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얼마 후 시현의 집으로 몇 권의 책이 도착했다.
[주식의 A-Z까지.]
며칠이 지나자 주식에 대한 용어와 주식시장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흐름보다는 미래를 아는 것이었지만.
마침 대학 등록 기간이라 부모님이 주신 등록금이 있었다. 이건 투자를 하라는 신의 계시다.
“이게 이제 천이되고 억이 되는 거지.”
후후훗. 시현은 부자가 되는 꿈에 부풀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마우스에 손을 가져다 올렸다.
그때-!
“너 지금 그거 누르면 후회할 텐데? 죽을 수도 있어.”
그의 뒤에서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 내용은 다소 심각했지만.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