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으아아아아아!”
“왜 그래!”
시현이 소리를 지르자 지희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엄마 저, 저 여자 저 여자!!”
시현은 벌벌 떨며 손으로 정체불명의 여자를 가리켰다.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 은회색 빛 눈동자. 까칠해 보이는 눈매와 반달 모양의 선명한 쌍꺼풀 라인.
연분홍색 얇은 입술은 새하얀 피부 때문에 더 진해 보였다.
딱 봐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떠 있잖아!
하지만 지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응?”
“안 보여?”
“뭐가 보인다고 그래 얘는. 꿈꿨어?”
지희는 방 중앙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커튼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창문도 열었다 닫아보고선 다시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잖아. 좀 조용히 해. 드라마 보는데.”
지희가 혀를 쯧쯧 차며 방문을 쾅 닫고 다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시현은 지희가 여자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나오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시 후, 여자 옆에 어린아이가 뿅 하고 나타났다.
바가지 머리를 하고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어 ……. 어!”
시현은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했다.
연은 상당히 귀찮은 표정으로 시현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뻗은 팔다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꺾여 있었다.
특출나게 튀는 것 없는 외모였다. 문제는 저 작은 머리통 속에든 생각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주식으로 돈을 벌 생각부터 하다니. 보통 인간은 아니겠구나 싶어 머리가 아팠다.
연의 팔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시현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위로 패대기쳤다.
달래는 불안한 표정으로 시현과 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연님. 어쩌시려고 그래요.”
“아아.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에이. 죽이시면 큰일 나요.”
“그러니까 내가 죽인다는 게 아니라 죽었으면 좋겠다고.”
회귀자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전대미문의 일은 금방 들켰다.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연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회귀자가 인간 세상에 가서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거라.”
이 말은 곧, 그가 사고를 칠 경우 네가 수습해라. 는 말과 같았다.
더 큰 문제는 천화원을 관장하는 신, 화연이 크게 노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알현을 청하여도 연을 만나주지 않았으며, 향후 100년간 물약 제조를 금지했다.
“하아 …….”
망했다. 자신의 완벽한 커리어에 금이 가다 못해 뚝 끊긴 것이다.
차라리 인간이 죽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럼 귀찮은 일은 사라져도 화연의 화는 풀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시현은 이미 침대로 옮겨질 때 어느 정도 의식을 찾은 상태였다.
다만 무서워서 눈을 뜨지 못했다.
‘저승에서 온 거겠지? 설마 다시 데리러 온 건가?’
죽었으면 좋겠다니 자신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눈을 감은 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고민했다.
자신의 눈에만 이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게다가 딱히 해를 가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좋아. 안 보이는 척하는 거야.’
마음을 단단히 먹은 시현은 눈을 슬며시 떴다.
침대 맡에 앉아 또롱 또롱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아이와 그 뒤에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시현은 우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어이. 인간?”
“ …….”
“우리 이야기 좀 할까?”
“ …….”
난 안 보인다. 저것들이 안 보인다.
연이 말을 걸었지만 시현은 무시했다.
안 보이면 대화도 할 수 없고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을 것이다.
“흐음. 우리가 안 보이는 건가?”
연은 상당히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연의 말을 들은 달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이어 달래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분무기처럼 생긴 통을 꺼냈다.
“어? 그럴 리 없습니다. 이렇게 시현님의 눈에 뿌리면 …….”
칙칙- 공기 중에 흩어진 입자가 시현의 눈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짜잔. 시현님. 저희가 보이시나요?”
효과는 탁월했고 이미 진작에 보였다.
이것 때문에 아까 컴퓨터를 하다가 눈이 따가웠구나.
하지만 시현은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척 시선을 홱 돌려 외투를 껴입었다.
그 모습을 본 달래의 표정이 굳었다.
“어? 보여야 하는데 ……. 이럴 리 없습니다! 시현님. 저 안 보이세요?”
달래가 시현의 앞에 총총 뛰어와 이리저리 움직였다.
시현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달래의 눈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훌쩍. 연님. 역시 전 약제사 재능이 없나봐여. 흐엉 ……. ”
시현의 무시가 계속되자 결국 달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다.
시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주먹을 꽉 쥔 채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하. 이게 지금 날 무시해?”
정말 보이지 않는다면 달래를 그대로 지나쳐야겠지만, 시현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 했다. 자신의 앞의 달래를 슬쩍 피해 도망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연은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 * *
시현은 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어야 그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아 일단 중심가로 향했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밤은 쌀쌀했다.
몇몇은 롱패딩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제 갈 길을 바삐 걸었다.
“아. 너무 얇게 입었어.”
시현은 생각보다 강력한 추위에 온몸을 덜덜 떨며 걸었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무시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달래야. 저 인간이 정말 우리가 안 보이나 보구나.”
“네. 죄송해요.”
달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잘 됐어. 그럼 소리소문없이 죽이면 되지 않을까?”
“ ……! ”
순간 시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우리가 안 보이니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 아니니.”
“그렇겠네요!”
시현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어느새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아까 도망치지 말 걸 그랬나?
그렇지만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된 상황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보이는 척하기도 늦었다.
아는 척을 한다고 곱게 살려줄 것 같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고집을 피워보기로 했다.
시현은 묵묵히 다시 발걸음을 뗐다.
“흐음. 어떻게 죽이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까?”
연의 말투는 마치 재료를 어떻게 손질할까 고민하는 요리사 같았다.
물론 일반적인 요리사가 아닌 피떡을 하고 날이 선 칼날을 핥으며 씩 웃는.
“실족사? 익사? 추락사?”
뒤이어 죽음의 종류를 마치 노랫가락처럼 흥얼거린다.
시현은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괜히 다리에 힘을 바짝 주며 안간힘을 쓰고 걸었다.
그때, 연과 함께 고민하던 달래가 손뼉을 탁하고 쳤다.
“그냥 교통사고로 죽은 전적이 있으니 똑같이 하면 좋을 듯합니다.”
“역시 똑똑하네. 우리 달래.”
“히히.”
시현은 하마터면 웃지 마! 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걸 또 칭찬하는 걸 들으니 기가 막혔다.
‘왜 죽인다는 얘기밖에 안 하는 거야! 내가 뭘 잘 못 했는데! 설마 허니허니칩을 사재기한 것이 잘못인가?’
시현은 속으로 하나님 부처님 옥황상제님을 고루 찾았다.
아니 살려주신다고 하셨으면서 다시 죽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줬다 뺏는 게 얼마나 치사한 짓인데!
시현은 배신감이 들었다.
어느덧 그는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연과 달래도 시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래. 여기를 건널 때 저걸로 휙 치자.”
시현의 눈앞에 연의 곧은 손가락이 보였다. 그는 눈동자만 또르르 굴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흘끗 보았다.
거대한 덤프트럭 한 대가 있었다.
운전자가 졸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잠시 후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들이라면 진짜 죽일 것 같았다.
“어? 근데 인간이 움직이지 않아요. 혹시 저희 말을 들은 것일까요?”
“글쎄다.”
달래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현을 지켜보았다.
보통 이 정도면 굽히고 들어온다.
‘자 어떻게 나오려나 인간.’
시현은 갈등했다.
하지만 분명 아까 분명 죽이면 큰일 난다고 했다. 똑똑히 기억한다.
시현은 자신을 믿어 보기로 했다.
침을 꿀꺽 삼킨 시현은 크게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오호.’
연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멍청한 건지 자존심이 센 건지.
아니면 강한 신념이 그를 지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고집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끝까지 무시하는 건 괘씸했다.
시현이 절반쯤 건넜을 때 연은 손가락을 휙 제쳤다.
그 순간 커다란 덤프트럭이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악!”
시현은 그대로 주저앉아서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다시 주어진 삶이 허무하게 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무서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 지나도 고통은커녕 주변 사람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눈을 슬며시 뜨자 덤프트럭은 그의 눈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차들. 걸어가는 사람들. 매장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까지.
잠시 후 연이 시현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발자국이 닿을 때마다 주위에 공명이 일어나듯 울림이 생겼다.
시현이 고개를 서서히 올렸다.
“인간. 내가 보여?”
연은 은은한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물었다.
시현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살, 살려주세요.”
“그래. 살려 줄게.”
“정말요? 아까 주, 죽인다고.”
시현은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물었다.
연은 조금 귀찮은 듯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입매를 반듯하게 만들고 낮게 깐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을래?”
“아니요.”
시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살고 싶다면 앞으로 나 무시하지 마.”
연이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시현은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대답.”
“네.”
시현은 아직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을 하며 무심코 연의 손을 잡았다.
“허억-!”
순간 시야가 쑤욱 높아지더니 멈춰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들의 정수리가 개미만 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하늘 위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여나 그녀가 자신의 손을 놓아버릴까 봐 발버둥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엉덩이에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세상이 다 조그맣게 보였다.
얼마나 높은 곳으로 왔는지 시야에 걸리는 다른 건물이 없었다.
머리 위로 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인간."
"네?“
싸늘한 음성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잔뜩 긴장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으나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방금 부른 소리가 환청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세차게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후들거리던 다리가 안정을 되찾을 때쯤 연이 시현에게 물었다.
"네가 왜 회귀했는지 알아?"
"음. 업이 남아서?"
시현은 확신이 없어 끝을 살짝 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정답인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죽은 이유는?”
“어 ……. 교통사고?”
시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확실한 건 자신에게 답을 알기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교통사고가 아닌 건가?’
다시 심장 쿵쿵 뛰었다. 거대한 진실의 문 앞에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침묵들이 마음의 준비를 위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후 …….”
시현이 심호흡했다.
잠시 후 연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