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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남자의 친절한 독백
작가 : 수상한남자
작품등록일 : 201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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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작성일 : 16-10-03     조회 : 613     추천 : 1     분량 : 7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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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오늘은 지난 1년간 사냥감들이 나를 직접 찾아오던 9번째 심리 상담소의 마지막 출근 날이다. 사무실 정리를 마치면 직원들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한 후 이사를 할 예정이다.

 

 “서연우 선생님! 오늘 마지막 상담 예약 하신분 연락이 안 되는데요?”

 

 입구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데스크 안내 여직원이 사무실까지 졸졸 쫓아오며 쉼 없이 떠든다.

 

 “왜 있잖아요. 다섯 번째 남편이 바람나서 죽고 싶다던 그 청담동 싸모님. 오늘 예약인데 연락이 안돼요. 설마 진짜 자살한 건 아니겠죠? 올 때마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인간들은 말이 너무 많다.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다.

 

 “최현자씨 상담 어제부로 끝났습니다.”

 

 “정말요? 왜요? 남편이 돌아왔대요? 아님 위자료 빵빵하게 주고 이혼해준대요?”

 

 어제 나와 함께 마지막 상담을 마쳤던 29번째 사냥감 얘기다. 대체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알아 낸 거지?

 상담 내용은 철저히 비밀이다. 난 기본적인 직업윤리는 철저히 지킨다. 일지는 대부분 수기로 작성한다. 만에 하나 내가 용의선상에 오를 경우를 대비해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가급적 컴퓨터엔 저장하지 않는다. 상담에 필요한 자료나 날씨를 찾기 위한 용도 외에는 컴퓨터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 여자가 이런 얘기까지 알아낸건지 심히 궁금하다. 아마 본인이 직접 얘기한거겠지만 물어본다고 대답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걸 꼬투리 삼아 더 집요하게 대화를 끌고 나갈 지도 모른다. 이럴 땐 그냥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게 최고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덕에 사는 게 지루해서 죽고 싶다던 인간이 많아서 좀 더 머물까도 싶었는데 생각을 접길 잘한 것 같다.

 인간들은 정말이지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하다.

 

 

 -파파팍-

 

 사무실 문을 열자 폭죽 소리와 함께 직원들이 케잌을 들고 몰려나온다. 창가엔 유치한 플랜카드도 펄럭이고 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서운해요~ 가지 마세요~”

 

 스무 명이 넘는 인간들이 떼거지로 나를 에워싼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들로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한다.

 

 “이번엔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연락 주실 거죠?”

 

 “집들이 꼭 하셔야 되요”

 

 희번덕거리는 사십 여개의 눈동자와 빈약한 속을 거침없이 내보이며 닫힐 줄 모르는 이십여개의 입술들이 오롯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

 자동 연발식 소총으로 집중 포격을 맞고 있는 것만 같다.

 

 어지럽다. 귀가 멍멍해진다.

 

 아... 정말이지 인간은 피곤한 동물이다.

 

 

 

 

 

 # 2

 

 

 

 서울 톨게이터를 벗어나자 마지막 세포 하나까지 빽뺵히 들어차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빠져 나간다. 아직 채 한기가 가시지 않은 시골의 청량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와 텅 빈 공간속으로 뻗어 나간다.

 도심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이 선선한 고요함 맘에 든다.

 이제 한 동안은 이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차례다. 당분간 모든 설렘과 긴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음 사냥터를 물색할 예정이다.

 

 

 

 서울에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 곳은 경기도 한 신도시에 위치한 20층짜리 원룸형 신축 오피스텔 주차장이다.

 십 여개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 타운 끝에 위치한 오피스텔 우측은 낮은 산으로 막혀있다. 오피스텔과 마주보는 8차선 도로 건너 맞은편엔 넓은 들과 호수가 펼쳐져 있다. 그 뒤로 산을 등지고 지어진 각양각색의 고급주택들이 일렬로 늘어서 호수를 마주하고 있다. 산의 끝자락부터 시작해서 마을 전체를 관통하는 긴 호수와 주택의 높은 담벼락들이 마치 거대한 성벽을 연상시킨다. 깊게 들이마신 봄 햇살을 뜨겁게 토해내는 호수의 눈부신 빛들이 아파트촌과 고급주택 마을을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는 것만 같다.

 

 사냥터를 확인하려면 저 마을도 돌아봐야 되는데 자칫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모든 시선이 집중 될 것 같다. 도로 주변에 문을 연 상가들이 절반이 채 되지 않는 걸로 봐서 부동산 업자의 말과는 달리 아파트 타운 입주가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공기 좋고 전망 좋은 곳이라 잠시 쉬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곳에 자리를 잡는 건 고려해봐야 될 것 같다.

 일단은 차에 싣고 온 짐부터 들여놓고 천천히 돌아보자.

 

 “비켜 이 썩을 놈아, 여기 우리 딸년 집이여!”

 

 무거운 책 박스를 먼저 챙겨 들고 입구로 들어서는데 지나가는 십 수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백발의 할머니와 50대로 보이는 거구의 경비 아저씨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리 작은 규모의 오피스텔은 아니지만 박스까지 들고 말없이 그냥 들어가다간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괜히 나쁜 인상을 줄 필욘 없다. 이사 첫날이니 인사는 하고 가야겠다.

 

 “안녕하..”

 

 “그러니까 따님 집이 몇 호냐고요. 알려주셔야 보내드리죠.”

 

 “비키라고, 이 우라질 놈아!!”

 

 경비 아저씨가 막무가내로 들어가려는 할머니를 막아서느라 나를 못 본 것 같다.

 뻘줌히 서서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저씨는 등 돌린 채 할머니와 실갱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슬쩍 지나가도 모를 것 같다.

 

 그래, 어차피 싣고 온 박스를 옮기려면 몇 번 더 지나가야 된다. 인사는 나중에 해도 상관없다. 괜히 옆에 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고. 일단은 자리부터 피하자.

 

 “어이, 이봐요. 몇 호 가요?”

 

 슬그머니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경비 아저씨가 재빨리 돌아서며 나를 불러 세운다. 진땀을 빼며 할머니를 말리면서도 등 뒤로 지나가는 열 댓 명의 사람 중에 정확히 나를 지목하는 걸 보니 그리 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덩치에 비해 몸의 움직임도 날렵해 보인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절대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

 

 “808호에 이사 온 사람입니다.”

 

 “비켜, 이 망할 놈아!”

 

 꾸벅 인사를 하는데 할머니가 경비 아저씨를 밀치고 엘리베이터로 가려다가 넘어지신다. 그 덕에 다행히 경비 아저씨가 들어가라고 손만 내젓고는 다시 할머니에게로 등을 돌린다.

 

 “아이고, 이놈이 사람 잡네, 사람을 죽여. 그래, 이눔아! 나 딸년 집도 모르는 정신 나간 노인네여! 나도 이렇게 무시나 받으면서 세상 더 살고 싶지 않응께 차라리 죽여 이눔아! 죽이라고 이 썩을 놈아!”

 

 “아후, 할머니...... 정말 왜 이러세요.”

 

 넘어진 할머니가 대성통곡을 시작한다. 경비 아저씨는 지나가는 주민들이 듣지나 않을까 사색이 돼서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이럴 땐 조용히 피하는 게 상책이다. 얼른 엘리베이터로 가자.

 

 “늙으면 죽어야지...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괄시나 받고 무시나 먹는 늙은이가 살아 뭐혀.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하이고.... 내가 빨리 죽어야지... 나도 죽고 싶어, 죽고 싶다고 이놈아!!”

 

 죽고 싶다는 말은 내 사냥본능을 깨우는 소리다. 죽고 싶다는 인간을 마주보는 순간, 난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수십 일을 살아가게 된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냥감의 그 마지막 눈빛을 확인해야만 비로소 나를 지배하는 그 무시무시한 힘은 사라진다.

 그 마지막 순간을 끝까지 확인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모른다.

 

 “나도 죽고 싶다고! 살아 뭐혀. 죽고 싶어. 아고. 영감... 아고 영감... 나 좀 데려가!”

 

 돌아보고 싶다. 저 할머니의 눈을 보고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규칙을 어길 순 없다. 작은 구멍이 생기는 순간 내 안의 괴물은 결국 나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정신 차려야 된다.

 정신 차리자, 서연우!

 

 “할머니 죽으면 나도 같이 죽을 거야... 엉.... 나도 죽고 싶어... 엉...엉...!”

 

 젠장.

 간신히 사냥 본능을 억누르며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8,9 살쯤 돼 보이는 비쩍 마른 남자 아이 한 놈이 뛰어와 할머니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 치기 시작한다.

 규칙 4와 5를 쌍으로 어길지도 모를 이상한 시츄에이션이 되고 있다.

 

 띵-

 다행히 버튼을 누르자 바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빨리 이 유혹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자.

 

 “어, 아저씨! 같이 가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열심히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꼬마가 달려온다.

 닫혀라. 닫혀라, 제발!

 

 “아저씨!”

 

 문이 닫히기 직전, 작고 낡은 운동화 하나가 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 바람에 문이 다시 열리고 있다. 제길.

 

 “같이 가자니까요.”

 

 죽고 싶냐, 너.

 

 “천천히 와요, 천천히! 우리 할머니 넘어지잖아요!”

 

 꼬맹이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서서는, 간신히 할머니를 달래서 부축해오는 경비 아저씨를 향해 잔소리를 해댄다.

 내 아무리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좁은 공간에 이 대책 없는 예비 사냥감들과 갇혀 있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방심해선 안 된다. 차라리 계단으로 가자. 어떻게든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된다.

 

 “808호라고 했죠? 이 할머니랑 꼬마가 807호 간다니까 가는 길에 같이 좀 부탁합시다.”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문을 막고 서서 할머니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바람에 나도 같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려들어간다. 젠장.

 

 “나 꼬마 아니에요. 키는 작아도 11살이에요!”

 

 경비아저씨가 돌아가자 꼬맹이가 씩씩대며 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꼬맹이 등 뒤에서 문이 닫히려고 한다. 빨리 나가야 되는데 이 자식 내 앞길을 막고 서서는 빤히 나를 올려다본다. 영화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 마냥 동그란 눈을 하고서는 입고리를 쓱 올린다.

 이건 대체 무슨 표정이냐.

 

 “나 혼자 할머니 모시고 갈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살고 싶으면 빨리 비켜라 꼬맹아.

 

 - 퍽! -

 

 간신히 꼬맹이를 피해 나가려는데 문이 닫힌다. 꾸역꾸역 문 사이로 비집어 밀어 넣은 박스가 압력을 못 버티고 내 얼굴을 강타한다. 중심 잃고 비틀하는 사이,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와 박스의 무게가 나를 결국 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머리가 띵하다. 할머니와 꼬맹이의 얼굴이 뱅그르르 돌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 쪽팔린다.

 차라리 눈을 감자.

 

 “어, 아저씨 괜찮아요?”

 

 “에구.. 젊은 사람이 이렇게 부실해서 워쪄. 괜찮어요?”

 

 이젠 어쩔 수 없다.

 

 “아저씨!”

 

 정말이지 난, 끝까지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아저씨!!”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으어어-!!”

 

 비장한 각오로 눈을 다시 뜨는 순간, 꼬맹이가 하얀 손수건을 코앞에 내밀고 있다. 하마터면 꼬맹이의 팔을 비틀 뻔 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일어서려는데 꼬맹이가 내 팔을 꽉 잡고 눌러 앉힌다. 쬐끄만 게 꼴에 남자라고 힘은 제법 있다.

 

 “가만있어 봐요!”

 

 꼬맹이가 손수건으로 내 코를 쓱 닦고서는 손수건을 내 눈앞에 들이민다. 이 자식을 증말.

 

 “아저씨 코피 나요”

 

 젠장... 피다.

 하얀 손수건 위에 선명하게 찍힌 그 끈적하고 시뻘건 피!

 

 “걱정 마요. 내가 치료해줄게요.”

 

 꼬맹이가 내 눈을 빤히 보며 손수건을 돌돌 말기 시작한다.

 돌돌 말려 더 선명해진 핏자국이 내 콧구멍을 향해 다가온다.

 그 시뻘건 핏자국과 함께 꼬맹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듯 다가온다.

 

 어지럽다.

 눈이 감긴다.

 세상이 온통 까매진다.

 

 아... 정말이지 난 피가 너무 싫다.

 

 

 

 #

 

 천사가 날 보고 있다. 내가 결국 그 망할 놈의 피 땜에 죽은 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천국에 올 리가 없잖아?

 이상하다. 분명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천사가 맞는데...

 나 같은 놈도 천국에 올 수 있는 건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천사의 눈빛이 슬퍼 보인다.

 정말 천국인가 보다. 내가 슬프다는 감정을 아는 걸 보면......

 

 “아저씨 이제 괜찮아요?”

 

 “으어어어어- !”

 

 엘리베이터 꼬맹이의 커다란 눈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시 기절할 뻔 했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영화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다. 젠장.

 

 “우리 큰누나 집이에요. 아저씨 코피 흘리고 기절해서 경비 아저씨가 데려다 줬어요.”

 

 아... 쪽팔려.

 

 “쫌만 기다려요. 내가 아저씨 줄라고 죽 끓여 놨어요.“

 

 너 같으면 이 상황에서 죽이 넘어 가겠냐?

 

 경비 아저씨 얘기로는 이 꼬맹이가 807호에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로 내 옆집이란 얘긴데 내부를 둘러보니 15평짜리 치고는 제법 넓고 깔끔하다. 계약당시 그리 복잡지도 허전하지도 않은 신도시의 깔끔함이 마음에 들어서 내부도 안보고 계약했는데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누워있는 침대의 쿠션감도 마음에 들고 천사, 아니, 꼬맹이의 누나가 앉아 있는 책상과 의자의 재질을 봐선 가구 옵션들도 꽤 괜찮아 보인다.

 자리를 잡는 건 마을을 둘러보고 결정해야겠지만, 당분간 지내기엔 나빠 보이진 않는다.

 그나저나 여자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아까부터 전혀 미동이 없다.

 

 “실례 많았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와 깍듯이 인사까지 했건만 여자는 여전히 반응이 없다.

 내가 안 보이는 건가? 목소리도 안 들리나?

 

 “죽 먹고 가라니까요!”

 

 꼬맹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도 여자는 눈길 한 번 안 준다.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 꼬맹이와 단 1초라도 더 함께 있다가는 또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 따위에게 이렇게 쪽팔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이번 한번으로 족하다.

 

 “괜찮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한 발 더 바짝 다가가 좀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해보지만 여자의 긴 머리카락 한 올 조차 꿈쩍 하지 않는다. 숨은 쉬고 있을까?

 

 “이 몸으로 어딜 간다 그래요! 내가 아저씨 위해서 죽도 끓여놨다니까요”

 

 꼬맹이가 나를 지나쳐 식탁으로 가 죽과 수저를 챙긴다. 손을 잡으려는 줄 알고 놀라 급히 몸을 돌리자 소파에 누워 주무시는 할머니가 보인다.

 이 집안에서 가장 어른인데 기다렸다 인사라도 하고 가야 되나?

 

 “빨리 와서 먹어요. 소고기도 넣고 감자랑 당근도 넣었어요. 브로콜리도 넣으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몰라서 안 넣었어요. 우리 작은 누나는 브로콜리 엄청 싫어하거든요.”

 

 아니다. 저 꼬맹이 하나로도 벅찬데 할머니까지 깨웠다가는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야 된다. 어차피 꼬맹이 누나는 내가 나가든 말든 관심조차 없다.

 난 정말 할 만큼 한 거다.

 

 “아저씨!!”

 

 소리치는 꼬맹이를 무시하고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책 박스를 챙겨 들고 복도로 나오는 순간, 닫히는 문 사이로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여자는 그대로다. 아마 지나가다 저 모습을 봤다면 인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초점 없이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 내 발을 붙잡는다.

 슬퍼 보이던 그 눈빛이, 아니, 그런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여자의 눈빛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대체.... 저 눈빛을 어디서 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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