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정수리부터 삐질삐질 새어 나온 땀들이 목을 타고 흘러 차 트렁크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춥다고 봄 점퍼를 잠그는데 난 팬티까지 홀랑 땀에 젖었다.
이게 다 그 놈 때문이다. 그 꼬맹이 놈 피해 다니느라 8층까지 계단을 세 번이나 오르내렸더니 팔 다리가 후들거린다. 박스 6개 옮기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짐 정리 좀 해 두고 한 바퀴 돌면서 끼니를 떼우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 마지막 두 박스 올려놓고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으면서 좀 쉬어야겠다.
“한참 찾았잖아요.”
또 그 놈이다.
삼십분 동안 헛고생했다. 젠장.
“몸도 안 좋은데 도와달라고 하지. 박스 하나 이리 줘요. 도와줄게요.”
"괜찮다."
끈질긴 놈이다. 박스 들고 뛰다시피 도망가는데도 끝까지 졸졸 쫓아와 내 앞을 막아선다.
“아저씨 오늘 이사 온 거에요?”
“어.”
“이거 올려놓고 우리 누나 집 가서 밥부터 먹어요. 점심도 안 먹고 계속 기절해 있었잖아요.”
“기절한 거 아니다. 잠깐... 잠든 거지.”
“에이, 쪽 팔려서 그러는 거 다 알아요.”
귀신같은 놈.
“내가 비밀로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인간들은 말이 너무 많다. 특히 여자랑 꼬맹이들은.
“우리 누나 집에 가서 밥 먹는 거 쪽팔리면 아저씨 집에서 짜장면 먹을래요? 원래 이사하는 날에는 짜장면 먹는 거잖아요. 내가 사줄게요.”
꼬맹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동전을 하나씩 꺼내 지 손바닥에 올린다.
주머니 탈탈 털어 마지막 동전 하나까지 싹 긁어 모아놓고는 내 앞에 돈을 내민다.
“자요. 이걸로 사줄게요.”
어이가 없다. 1700원으로 짜장면 사준단다.
“나 그런 거 안 먹는다. 그만 집에 가라.”
# 3
“라면 봉지는 요렇게 작게 접어서 버려야 쓰레기봉투 값을 아끼는 거에요. 알았죠?”
독한 놈이다. 박스를 복도에 내려놓고 문 여는 사이에 내 오피스텔로 돌진해 들어왔다. 막을 틈도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는 30분을 나올 생각을 안했다. 결국 생리 현상을 못 버티고 항복했더니 지 맘대로 이삿짐 뒤져서 냄비 꺼내 들고 짜장 라면을 끓이고 있다. 라면 봉지를 딱지처럼 접으면서 잔소리까지 하고 있다.
“뭐해요, 신문지 빨리 안 깔고.”
“그냥 식탁에서 먹으면 안 되냐?”
“으구, 원래 이사하는 날에는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짜장면 먹는 거에요. 아저씨 이사 처음 해봐요?”
“12번째다.”
“그런데 이런 것도 안 해 봤어요? 아저씨도 참... 세상 재미없게 사신다.”
애늙은이 같은 놈.
“이리 줘요”
꼬맹이가 내 손에 들린 신문지를 뺏어 들고는 능숙하게 척 펴서 바닥에 깔기 시작한다. 자리 잡고 앉아서는 비닐 봉지에서 생수와 종이컵, 종이 접시를 꺼낸다. 각 맞춰 탁탁 챙기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다. 진한 고수의 향기가 느껴진다.
“빨리 와서 앉아요.”
이번엔 나무젓가락 두개를 뽀개 나란히 내려놓고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친다.
“빨리요!”
아 증말 귀찮은 놈이다.
할 수 없이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자 바짝 옆으로 온다. 그것도 모자라 얼굴 바짝 들이밀고는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집어 삼킨 그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서.
“난 김동민이라고 해요. 아저씨 이름은 뭐에요?”
이렇게 가까이서 내 눈을 마주 본 인간들은 사냥감 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들의 시선을 내가 먼저 피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녀석의 커다란 두 눈동자를 계속 볼 수가 없다.
망망한 우주 한가운데서 거대한 블랙홀을 대면한 것만 같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저 거대한 눈동자 안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만 두 눈 속에 영원히 갇혀 버릴 것만 같다.
“짜장 라면 안 끓이냐?”
결국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의 시선을 먼저 피했다. 제길.
“아직 3분 더 기다려야 되요. 그동안 휴대폰 구경해도 되요?”
어이가 없다.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말릴 틈도 없이 소파에 올려둔 내 폴더 휴대폰을 잡아채 전원을 켜고 있다.
“뭐하냐.”
“라면 시간 봐야죠.”
“니 휴대폰 있잖아. 저기 시계도 있다.”
옆에 놓인 꼬맹이의 신형 스마트폰과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자 얼른 스마트폰을 낚아채 주머니에 쏙 집어넣는다.
“새로 이사 와서 시계 약도 아직 안 넣었잖아요. 고장 난 거면 어떡해요. 라면은 시간이 생명이라구요. 1초만 늦어져도 면발의 꼬들함이 달라요.”
“니 꺼 봐라 그럼.”
“우리 누나가 미리 생일선물 사준 거라서 아껴야 된단 말이에요.”
휴대폰을 뺏으려고 손을 내밀자 저만치 떨어져 앉는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옆에 앉아서 시끄럽게 구는 것 보단 휴대폰 갖고 노느라 조용한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상담소를 나오면서 휴대폰을 새로 개통했다. 저장된 번호는 하나도 없다. 저 녀석이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한다 해도 문제가 될 만 한 건 전혀 없다.
“아저씬 뭐하는 사람이에요?”
연쇄 살인마.
“아저씨도 우리 형처럼 백수에요? 우리 형은 집에서 맨날 게임만 하거든요.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고.”
“심리상담사다.”
꼬맹이가 손을 멈추고 돌아앉는다.
“그게 뭐에요?”
아.... 이놈을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사람들 심리를 상담해주는 거다.”
꼬맹이의 그 큰 눈이 더 커진다. 그 커다란 눈동자가 내 기를 죄다 빨아들이는 것 같다. 내 영혼까지 홀라당 집어 삼키는 것만 같다.
아... 저 땡그란 눈이 이젠 너무 무섭다.
“그게 뭔데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상담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요!”
이 자식을 증말.
“3분 아직 안 됐냐?”
“아직 멀었어요. 이런 건 하도 많이 해봐서 안 봐도 척이에요. 우리 엄마가 몸이 약한데 할머니까지 치매 걸리는 바람에 내가 많이 도와줘야 되거든요. 나 밥도 잘하고 세탁기도 잘 돌려요. 청소는 눈 감고도 해요.”
아....... 귀찮다. 정말 귀찮아 죽겠다.
“근데 아저씨는 왜 혼자서 이사해요? 친구나 가족 없어요?”
그냥 확 5번째 규칙을 없애 버릴까?
“에이... 아저씨도 친구 없구나? 나도 없는데. 히히.”
설마.... 이놈도 나랑 같은 부륜가?
“아저씨, 내가 친구 해줄까요?”
아니지. 아니다.
이놈은 그냥 이상한 놈이다.
“자요, 우리 친구해요.”
헉! 놈이 내 손을 잡는다. 악수랍시고 손을 흔들어 댄다. 손이 뜨거워진다. 온 몸에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젠장. 대체 정체가 뭐냐 너.
“김.동.민. 내 이름 잊어 먹지 마요.”
단 한 번도 사냥감 이외의 인간과 접촉을 해 본 적이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내 손을 잡은 인간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단 말이다.
“짜장 라면 다 불겠다.”
간신히 손을 빼자 꼬맹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 동그란 눈에 물기가 그득해진다.
설마... 우는 건가?
“우리 집은 큰 길 건너편에 있는 전원주택 마을 제일 끝집이에요. 이제 우리 친구니까 나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놀러오세요. 히히.”
그럼 그렇지. 울긴 개뿔.
“3분 다 됐다. 쫌만 기다려요. 내가 친구 된 기념으로 울트라 캡짱 맛있는 짜장면 만들어줄게요!”
꼬맹이가 가스렌지로 간다. 윙크를 하면서.
아무리 봐도 정말 이상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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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 라면이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탄생 신화와 11년 인생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시끄럽다. 정말 시끄러운 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맛이 기가 막힌다. 한두 번 먹어본 것도 아닌데 면발의 탱탱함과 혀끝에 감도는 감칠맛이 예사롭지가 않다. 내 인생 통틀어 먹어본 음식중에 가장 맛있다.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건가?
아무래도 가기 전에 물어봐야겠다.
“자요. 이것도 먹어요.”
꼬맹이가 냄비에 남아 있는 마지막 짜장 라면을 수저로 박박 긁어 내 접시에 올린다.
“너 먹어라.”
“난 집에 가서 또 먹으면 되요. 아저씬 혼자 사니까 챙겨주는 사람 있을 때 많이 먹어야죠.”
이놈 11살이라는 거 분명 출생신고 오류다. 애늙은이 같은 놈.
“애늙은이 같죠?”
헉. 귀신같은 놈.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우리 식구들이 철이 좀 없어서 제가 철이 일찍 들었거든요.”
먹고 난 쓰레기와 신문지를 비닐봉투에 차곡차곡 담고 바닥까지 빈틈없이 닦고 있는 저 모습은 주부 십 년차도 울고 갈 것 같다. 도대체 가족들이 얼마나 철이 없으면 11살짜리 꼬맹이가 저렇게 이상할 수 있는지 심히 궁금해지려고까지 한다.
“우리 큰 누나는 빼고요.”
큰 누나라면 옆집에 사는 그 여자 말인가?
그래 맞다. 그 여자도 과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문득 궁금해지는군.
“옆집에 사는 그 여자, 진짜 누나 맞냐?”
꼬맹이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본다.
왜 그러지?
내가 뭐 특급 출생의 비밀이라도 물어 본 건가?
“우리 큰 누나는... 왜요?”
맞나보다.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는 걸 보니 뭔가 대단한 비밀을 안고 있나보다.
그 여자가 진짜 이 녀석 엄만가?
이놈이 열 한 살이면 여자가 많아 봐야 스물여섯.... 그럼 대체 몇 살에....
열여섯?
그래 뭐, 놀랍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일찍 사고 칠 만한 여자 같진 않은데.... 아직 남자 손목 한 번 안 잡아봤을 것 같은데....
에이.. 아니다. 그렇게 천사 같은 여자한테 이런 무섭고 끈질기고 이상한 아들이 있을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된다.
“우리 큰 누나한테 관심 있어요?”
“과, 관심은 무, 무슨. 그런 거 모른다. 그만 가봐라.”
“큭큭큭큭큭”
지금 비웃는 건가?
“큭큭큭.. 알았어요.”
진짜라니까!
정말이다. 난 인간 따위에겐 관심 같은 거 안 키운다.
내가 관심 가진 인간은 모두 내 손에 죽었다고 이 자식아.
“짜장 라면 다 먹었으니까 이제 그만 가봐라.”
“설거지는 하고 가야죠.”
쪼꼬만 게 드럽게 빠르다. 내가 다 일어나기도 전에 냄비 챙겨 들고 가더니 식탁 의자 끌어다 놓고 올라가 냄비에 물을 받는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되는 거지?
가만히 보고 있어야 되나? 아님 나가라고 소리라도 질러?
“우리 큰누나 무지 이쁘죠? 이름은 김아연이에요.”
안 물어봤다.
“서른 세 살 이구요.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안 궁금하다고.
그런데 그렇게 나이가 많어? 끽해야 이십대 중반인 것 같은데.
“세제는 어딨어요?”
서른셋이면, 정말 그 여자가 저 녀석 엄만가?
근데 왜 저 녀석은 계속 누나라고 부르지? 숨기고 결혼준비라도 하나?
“어, 아저씨. 나 이거 뭔지 알아요.”
아.. 내가 인간 따위에게 관심을 갖다니. 아무래도 뭐에 홀린 것 같다.
정신 차리자, 서연우.
“우리 큰 누나가 나 아기 때 이걸로 노래 들려줬었는데.”
그런데 대체 그 여자의 눈빛은 어디서 본거지?
도대체 어디서 그 눈빛을,
“이거 누르면 노래 나오는 거 맞죠?
? ...... 저건..... 뭐지?
저 녀석 손에 들린 저 검은 신발 상자는... 대체 뭐지...?
신발 상자 안에서 들어 올린 저 손바닥 만한 건 대체 뭐,
젠장!
내 전리품 상자다. 저 놈 손에 들린건 내 녹음기다. 내 사냥감들의 마지막 영혼이 담긴 내 사냥 트로피!!
“노래 들어봐도 되요?”
꼬맹이가 테이프를 녹음기 안에 넣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움직일 수가 없다.
입을 열 수가 없다.
“무슨 노래에요?”
꼬맹이의 손가락이 플레이 버튼으로 올라간다.
저 녀석이 저걸 듣는다면 난 어쩔 수 없이 규칙을 깨야한다.
내가 살기 위해... 녀석을 없애야만 한다.
“이거 누르면 되죠?”
.... 너무 멀다.
막아설 시간이 없다.
- 딸깍
이젠...... 끝났다.
“살려주세요!”
꼬맹이가 나를 바라본다.
그 커다란 눈이 점점 거대해진다.
“아저씨, 이거 잘 안 들려요.”
이상하다. 내겐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사냥감의 목소리가 이 녀석에겐 잘 들리지 않는 건가? 내겐 너무도 소름끼치게 들려오는 절박함이 이 녀석에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낯선 소리인건가?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꼬맹이가 눈을 찌푸리며 녹음기에 귀를 가져다댄다.
점점 선명해지는 이 처절한 외침들이 정말 안 들리는 걸까?
“이거 돌리면 소리 켜지는 거 맞죠?”
놈의 손가락이 결국..... 볼륨 버튼으로 옮겨간다.
5.....
4.....
3.....
2.....
1.....
“살려주세요!!!”
아...... 내 규칙은 결국 이대로 무너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