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살려 달라고!!”
매일 밤 날 단잠에 빠지게 만들던 그 짜릿했던 비명들이 시커먼 블랙홀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중심도 실체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를 향해 무섭게 다가온다. 이 보잘 것 없는 몸뚱아릴 집어 삼키려 그 잔인한 입을 벌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 안에 꽁꽁 감춰 온 그 시뻘건 칼날을, 그 날카로운 창을 휘두른다.
“아저씨! 누가 왔다구요!”
- 쾅쾅쾅쾅쾅 -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어지럽다. 귀가 멍멍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동민아!”
“어, 큰 누나다!”
꼬맹이가 녹음기를 내려놓고 한달음에 뛰어나간다.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정신 차려야 된다. 정신 차리차려, 서연우!
몸을 날려 전리품 상자와 녹음기를 드럼 세탁기 안에 집어 넣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간신히 드럼 세탁기 문을 닫자 마자 엄청난 중력이 온 몸을 무섭게 잡아 당긴다.
사냥 끝에 찾아오는 극도의 피로감은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정말이지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내가 어떻게 인간과 있으면서 이렇게 방심을 한 거지? 도대체 어떻게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뭐에 홀린 것만 같다.
이건 분명 저 녀석이 끓여준 짜장 라면 때문이다.
저 녀석의 그 독하고 시커먼 눈 때문이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정말 위험한 놈이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동물은 절대 가까이 해선 안 되는 존재다.
잊지 말자, 마지막 규칙.
인간과 절대 친구가 되지 말 것!
# 4
제길. 벌써 7시다.
동민이라는 그 위험한 놈이 누나와 함께 인사도 없이 나가자마자 드럼세탁기 앞에 뻗어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짐 정리를 마치고 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왔어야 할 시간인데, 정리는 커녕 짜장 라면 먹은 냄비조차 4시간 전 꼬맹이가 놔둔 그대로다.
평생 단 한 번도 계획과 규칙을 어긴 적 없이 살아온 내가 이 지경이 되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두 번 다시 절대 인간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겠다.
기절과 낮잠으로 허비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짐 정리를 마치면 빨라도 12시가 넘을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마을부터 돌아보고 와야 된다.
이렇게 조용한 동네에서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다니는 건 위험한 짓이다. 만에 하나 부근에서 범죄라도 벌어질 경우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를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
내일 낮으로 미루면 안전하겠지만 허비할 시간이 없다. 낮에 만난 그 이상하고 위험한 꼬맹이가 언제 또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만에 하나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한 번 만 더 그 아찔한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정말이지....
아.....머리가 아프다. 깨질 거 같다.
일단 나가서 바람부터 좀 쐬자.
#
오피스텔 바로 옆에 있는 마지막 아파트다. 9시가 넘어서는데 불 켜진 곳이라곤 108세대 중 단 3곳뿐이다. 아파트촌의 다른 아파트들 역시 별반 다르지가 않다.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쳐 오느라 놓친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감안 하더라도 너무 조용하다.
경비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아줌마가 날 보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고 큰소리로 통화를 하며 뛰어간다.
지나가는 차량조차 거의 보이질 않는다. 오피스텔도 아파트촌들도 이제 막 입주가 시작 된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연쇄 자살이 일어난다면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터를 잡는 건 위험할 것 같다. 낮에 만난 그 이상한 꼬맹이도 위험하고.
아무래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사냥터를 알아봐야겠다.
- 전화 왔숑 -
무슨 소리지?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데.
- 전화 왔숑 -
젠장. 내 휴대폰이다. 짐을 못 푸는 바람에 시계를 못 꺼내서 급한 대로 휴대폰을 챙겨 나왔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365일 24시간을 항상 진동으로 돼 있는 휴대폰이 갑자기 이렇게 요상한 소리로 바뀔 리가 없다.
- 전화 왔숑, 빨리 받엉 -
그나저나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친구>
뭐야, 이거.
“여보세,”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받자마자 벌컥 소리부터 지르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누구냐, 넌”
“동민이에요, 김동민! 친구라고 저장해 놨잖아요!”
그 놈이다.
짜장 라면 끓일 때 휴대폰 구경한다더니 전화번호를 저장했었나보다. 벨소리까지 같이 바꿨나보다.
정말 치밀하고 무서운 놈이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되겠다.
“왜.”
“우리 큰누나가 1시간째 계속 전화를 안 받아요.”
어쩌라고.
“아무래도 무슨 일 생긴 거 같은데 지금 출발하면 30분 정도 걸리니까 아저씨가 먼저 우리 누나 집에 좀 가주세요.”
내가 왜!
“우리 큰누나 집 비밀번호는 0415에요. 내 생일 4월 15일이요! 혹시 우리 큰누나 다쳐서 쓰러졌을지도 모르니까 문 열고 들어 가봐요! 지금 바루요!”
이 자식이 날 뭘로 보고.
난 연쇄살인마지 좀도둑이 아니란 말이다!
#
- 띵동
807호 앞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단지 짜장 라면 얻어먹은 보답을 하는 것뿐이다.
- 띵동
이상하다. 밖에서 분명 불 켜진 걸 확인했는데 기척이 없다.
꼬맹이 말처럼 다쳐서 못 움직이는 건가?
설마 강도가 든 건 아니겠지?
- 띵동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내키진 않지만 들어가 봐야겠다.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0,4,
- 딸깍.
번호를 채 누르기도 전에 안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누군가가 있다.
누구지? 설마 강도?
- 끼익
문이 열린다.
정신 차리자. 칼을 들고 있어도 한두 놈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다.
난 준비가 끝났다. 빨리 나와라. 정체를 밝혀라.
누구냐 넌.
“어, 어...”
젠장. 꼬맹이 누나다. 졸지에 내가 이상한 놈이 될 판국이다.
“어, 그게, 저기..”
또 낮에 봤던 그 슬픈 눈빛을 하고 여자가 나를 지나쳐 간다.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정말 내가 보이지 않나보다.
언어 장애나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건가? 꼬맹이가 그런 말은 안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낮에 꼬맹이를 데려간 건 분명 저 여자였는데. 꼬맹이의 이름을 부른 것도 분명 저 여자였는데. 잘못 들은 건가?
다행히 다친 것 같진 않다. 문틈으로 슬쩍 보니 집 안에 강도가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지만 강도와 실랑이를 벌인것 같진 않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저쪽은 옥상으로 가는 비상계단인데.....
계속 따라가야 되나? 가서 뭐라고 해야 되지?
아니지. 아니다. 여자 뒤 꽁무늬 쫓아가는 건 사냥할 때나 하는 짓이다.
그래, 그만 신경 끄고 잠이나 자자. 바람 쐬러 가는 거겠지, 설마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겠,
?!
설마......?!
#
여자가 옥상 난간 앞에 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벌써 5분이나 지났는데 내가 온 걸 아직 눈치 못 챘나보다.
이젠 어떡하지? 정말 뛰어 내릴 생각이라면 벌써 뛰어 내렸을 텐데.
그래, 이만하면 난 할 만큼 했다. 바람 쐬러 나온 것 같은데 계속 이렇게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에 하나라도 갑자기 돌아서다가 오해라도 하면 괜히 일만 꼬일지도 모른다.
그만 내려가야겠다.
“가세요.”
옥상 문고리를 잡는 순간 어둠속에서 들릴 듯 말 듯 따뜻한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작고 여려서 내 거친 숨만 닿아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천사의 소리가 나를 돌려 세운다.
“돌아가세요.”
설마 날 이상한 놈으로 오해한 건 아니겠지?
“아깐 그.. 꼬... 동민이가.... 누님이랑 연락이 안 돼서..... 걱정된다고... 전화가 와서.... 혹시나 하고... 어디 아프신 건가 해서...”
아... 쪽팔려. 왜 이렇게 버벅거리냐, 서연우.
정신 차리자. 난 진짜 그 놈이 시켜서 한 것 밖에 없다고.
“아, 비밀번호도 동민이가..... 직접...... 가르쳐 준 겁니다...... 오해 마시라고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간다. 나도 내 목소리가 안 들릴 지경이다.
안 되겠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가는 정말 찌질한 놈으로 보이겠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빨리 가자. 더 늦기 전에 이 악의 고리를 끊어 버리자.
이젠 인간들과 정말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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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왔숑 -
옥상 문을 닫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또 그 놈이다.
여자 집에 급히 오느라 진동으로 바꾸는 걸 깜빡했다.
쪽팔린다. 설마 저 여자가 듣진 않았겠지?
“니네 누나 괜찮다. 난 이제 집에 갈 거니까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집이에요?”
“밖이다.”
“그럼 나 이제 다 왔으니까 우리 누나한테 얘기 좀 해줘요. 10분이면 도착하니까 빨리 집에 오라고요. 우리 누나 요새 몸이 안 좋아서 찬바람 많이 맞으면 안 좋단 말이에요. 알았죠?”
이 자식은 날 동네 머슴으로 아나. 이걸 그냥 콱!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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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데리를 빼 버리고 다시 옥상 문을 연 순간 여자의 발이 옥상 난간 위로 올라서고 있다.
대체 이건 뭐지?
문을 여는 소리에도 내가 들어오는 기척에도 여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젠장. 이 여자는 지금, 뛰어 내릴 생각이다!
“늦기 전에..... 돌아가세요.”
여자의 목소리에서 섬뜩한 한기가 느껴진다.
이젠 어떡해야 되지?
이 순간은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란 말이다.
이럴 땐 대체 어떡해야 되지?
대체 어떡해야 되냐고!
"못 본 척 그냥 가시라구요."
옥상에는 CCTV가 없다. 비상계단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만에 하나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카메라나 목격자가 있다 하더라도 꼬맹이와의 통화가 날 용의선상에서 가장 먼저 제외시킬 것이다. 난 단지 그 놈의 부탁을 받고 이 여자를 찾아 나선 거다. 나에겐 이 여자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동기도 없다.
꼬맹이는 십분 거리에 있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이 여자를 겁탈하거나 희롱하려다 실패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 똘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뛰어.... 내릴 겁니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사냥을 해본 적은 없다. 저 여자를 보낸 후에 내게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나도 모른다.
두렵다. 내 안의 괴물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나도 정말 두렵다.
하지만 그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된다 해도, 지금 이순간을 결코 포기할 순 없다.
이미... 잠들어 있던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날카롭게 깨어나버렸다!
“정말..... 죽고 싶습니까?”
여자가 돌아본다.
짙은 어둠속에서도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이 또렷이 보인다. 망설이는 그녀의 옅은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역시 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지금껏 죽고 싶다며 나를 찾아온 모든 이들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살고 싶다 였다. 그 마지막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난 수십 일을 긴장과 설렘 속에 살아간다. 그 마지막 한마디를 들어야만 난 다시 수십 일을 편하게 잠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저 여자가 내게 왔다.
저 천사 같던 여자가, 저 슬픈 눈빛을 한 여자가, 그 이상하고 위험한 꼬맹이의 누나가 스스로 나를 찾아 왔다. 스스로 무대의 막을 올렸다.
간신히 다시 잠든 내 모든 세포를 미친 듯이 두드려 깨웠다.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내 서른 번째 사냥감이, 직접 나를 선택 한 거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