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 아침부터 연은고등학교의 운동장이 복작였다.
아직은 꽤 추운 바람이 부는데도 여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려고 살색 스타킹을 신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남학생들은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나 시합이라도 하듯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동아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연은고는 동아리가 특성화된 학교여서 3월 첫 주에 신입생들에게 동아리 홍보를 하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 아침부터 1교시 재량시간까지였다.
그래서 운동장에는 야구부, 만화부 등의 동아리가 이미 자리를 잡고 천으로 된 그럴싸한 현수막을 걸고 동아리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아직 부스를 설치하고 있는 동아리들도 있었는데 연은고 농구부도 그 중 하나였다.
운동장 한 쪽에서 한 명의 여학생과 두 명의 남학생들이 테이블과 의자를 나눠 들고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왔다.
그들은 연은고 농구부 부원들이었는데, 짐을 지정된 자신들의 부스 자리로 옮기는 중이었다.
오른쪽에서 낑낑대며 테이블을 혼자 들고 가는 키가 큰 남학생은 찬성이었다. 굵은 곱슬머리에 보드라운 흰 피부를 가진 찬성은 눈을 잔뜩 찡그리면서 빈 공간에 '쾅'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을 내려놓았다.
“무거워 죽는 줄 알았네.”
찬성은 허리를 펴며 투덜거렸다.
“엄살은.”
찬성의 옆에 있던 남학생이 들고 온 의자들을 사뿐이 내려놓으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얌체같이 간의의자 두 개만 가볍게 들고 온 그는 세현이었다. 세현은 핏이 좋아 보이는 마른 몸에, 여자같이 갸름한 턱선과 눈꼬리가 올라간 예민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정세현, 좀 도와주지.”
마지막으로 그들의 옆에 있던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손엔 입부서 다발을 들고, 옆구리에는 농구공을 끼고 있는 그 여학생의 이름은 다솜이었다. 다솜은 165정도의 보통 키에 앞머리를 일자로 잘랐고, 긴 머리를 높게 묶고 있었다. 그녀는 평범하고 수수해보였지만, 의욕 넘치는 눈에서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손이 세 개냐? 의자를 두 개나 들었는데. 됐고! 윤덤벙, 너는 저 앞쪽으로 가서 홍보해라. 농구공은 마스코트처럼 딱 들고 있어. 난 저쪽으로 갈 테니까. 이찬성, 너는 여기 지켜.”
세현은 다솜에게 운동장 한편을 가리키며 지시를 한 후, 자신은 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기 입부서랑 펜. 나도 다녀올게!”
다솜은 입부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세현이 가리켰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농구부에 입부하세요!”
다솜은 손을 입에 모으고는 마치 호객행위를 하는 양 목청 높여 소리쳤다. 하지만 주위 학생들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심히 다솜의 곁을 지나갔다.
하필이면 시끄러운 야구부의 옆이라 다솜의 목소리는 어느새 그들의 소리에 묻혀갔다. 그래도 다솜은 굴하지 않고 오기로 더 크게 동아리 이름을 외쳤다.
그때였다.
“다솜아, 너무 소리 지르는 거 아냐? 목 아프겠어.”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3학년인 지혁이 다솜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솜은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얼른 그의 말에 대답하려 했다.
"괜찮……."
하지만 다솜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다른 부스에 있던 여선배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지혁과 다솜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꺄악! 지혁아!!”
"지혁아, 왜 마이 안 입었어. 아직 좀 춥지 않아?"
어떤 여선배는 애먼 날씨 탓을 하며 지혁의 단단한 팔뚝을 더듬기까지했다.
지혁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떼어내는데도 계속해서 사람이 모여서 다솜은 어느새 멀찍이 밀려나고 말았다.
다솜은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지혁의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 아래로 보이는 쌍꺼풀 진 예쁜 눈과 오뚝한 코, 보드라운 입술. 지혁의 얼굴은 오밀조밀하게 예뻤다.
하지만 지혁은 곱상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무척 역동적이어서 특히나 농구를 할 때면 거침없는 플레이를 선보이곤 했다.
그런 지혁은 연은고 농구부의 주장이었다. 주변 인파에 둘러싸인 지혁을 보며 다솜은 새삼 자신이 지혁과 같은 농구부라는 사실에 마음 한편이 뿌듯해졌다.
“지혁아. 나도 너희 농구부 매니저하면 안 돼?”
“그래, 지금 있는 애는 좀 나사 빠진 것처럼 보이던데.”
“야, 뒤에 있어, 걔.”
“어? 아……. 뭐 어때.”
여선배들은 지혁에게 아양을 떨다가 뒤에 서 있던 다솜을 발견하고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다솜은 울컥했지만 여러 명의 선배들이 있는 터라 차마 반박하지는 못하고 분을 삭였다.
그때 지혁이 그들에게 말했다.
“다솜이만큼 좋은 매니저도 없어.”
그리고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서 다솜에게 다가갔다.
“너희 잘 하고 있는지 보러 왔어. 그나저나 현석이는 어디 갔지? 같이 왔는데…….”
지혁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친구인 현석을 찾기 시작했다. 현석은 농구부의 또 다른 3학년으로, 연은고 농구부는 이 두 사람을 주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요. 잘 하고 있었어요! 아직까지 가입한 신입생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여기 자리가 안 좋은 것 같아요. 저 쪽으로 한 번 가볼까 봐요.”
애꿎은 자리 탓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다솜의 생각에 아무래도 여긴 신입생들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솜은 부스에서 조금 더 떨어진 장소로 가보기로 했다.
그녀는 몇 걸음 걷더니 멈춰 서서는 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서 소리를 내지르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앞에 우뚝 서는 바람에 다솜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대박. 저기 봐 봐."
"1학년인가? 세상에 비율 쩔어. 어디 아이돌 연습생 아니야?"
그녀의 앞에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를 두고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지?’
다솜은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 얼굴을 들어보았는데 어찌나 키가 큰지 끝임 없이 고개가 위로 들렸다. 키가 다른 농구부 멤버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보게 된 그 남학생의 얼굴은 지혁 못지않게 턱선이 날렵했고, 시원한 눈매에 입은 한쪽 끝이 비웃듯이 말려 올라가 있었다.
지혁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의 꽃미남이라면, 이쪽은 조금 거친 반항아 같아 보였다. 이렇게 잘생긴 남학생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기에 다솜은 그가 신입생임을 직감했다.
그 신입생은 다솜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저기……. 줘 봐요.”
그는 뜬금없이 다솜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했다.
‘뭘 달라는 거지? 아! 입부서를 달라는 건가?’
다솜은 동아리 홍보 중이니 아마도 입부서를 찾는 것이겠거니 하고는 저쪽에 위치한 농구부 부스를 한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입부서는 저기 앉아서 쓰면 돼.”
“네? 아니, 그거 말고.”
다솜의 말에 신입생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더니 다시 건들건들한 태도로 돌아와 다솜에게 말했다.
“폰 줘보라고요. 번호 찍게.”
“응?”
다솜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 눈이 커져서 그 신입생을 쳐다보았다.
‘지금 얘가 뭐라는 거지? 내 번호를 왜? 이렇게 잘 생긴 애가? ……혹시 쪽팔려 게임 하는 건가.’
다솜은 갖가지 의심이 들어서 폰을 꺼내긴 커녕 경계 태세를 갖추며 신입생을 빤히 보았다.
한편,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번호를 물어보는데 적대심을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듣던 대로 평범하지는 않네.’
그는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
그런데 다솜을 마주보고 있던 그가 별안간 고개를 들어 다솜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뭔가 싶어서 다솜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는데 순간 그녀의 어깨에 큼지막한 두 손이 얹혀졌다.
“음, 뭐하는 거야?”
어디서 나타났는지 현석이 다가와 다솜의 어깨에 손을 두른 것이었다.
“설마, 우리 매니저한테 작업 거는 건 아니겠지?”
현석은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을 지으며 신입생을 압박했다. 그는 부드러운 어투 속에서도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어서 농구부에서도 지혁 외에는 함부로 말을 걸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큰 덩치에 강렬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현석을 보고 신입생은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기에 눌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 형은…….’
신입생이 현석을 알아본 것처럼, 현석 역시 다솜의 어깨에 둘렀던 손을 풀고 신입생에게로 다가가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어?”하는 추임새를 냈다.
“어? 너 혹시 선율이?”
하지만 현석의 아는 체에 선율은 급하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대답없이 현석을 지나쳐서 다솜이 가리켰던 농구부 부스 쪽으로 걸어갔다.
“선배, 아는 사이에요?”
“음. ……아니.”
현석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혁에게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다솜은 몸을 돌려 멀리 있는 농구부 부스를 쳐다보았다.
선율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서 입부서를 적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애야.’
다솜은 신입생의 선율을 수상쩍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영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서 퇴짜를 놓기에는 그동안 다솜이 농구부 매니저를 하며 쌓은 안목으로 보았을 때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수상해보이기는 해도 일단 신체조건은 좋은데? 키도 크고, 아까 보니 손도 커 보였어.'
생각해볼수록 인원이 부족한 지금의 농구부에 어찌되었든 괜찮은 조건의 신입생이 들어오는 건 자신들에게 좋은 일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까 그건 장난이겠지?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 나중에 선배들이 정확히 검증을 해줄 테니까. 그렇다면, 이 기세를 몰아서!’
처음으로 신입생을 부스에 앉히고 나자 다솜은 의욕이 솟았다.
그녀는 정문 가까이로 뛰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입구에서 대어를 낚겠다는 각오로 그녀는 다시 한 번 농구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농구부에 들어오세요!”
“저기……농구부에 들고 싶은데요.”
아까와 달리 외치기가 무섭게 다솜의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났다.
‘벌써 또 한 명?’
다솜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뜻밖의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