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의 말에 선율은 꼿꼿하게 서서 무표정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필요이상 반항심을 담아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른 뜻 없는데요, 선.배.”
선율의 말에 다솜은 눈을 찌푸렸다.
‘선배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나저나 지혁 선배랑 원수 졌나. 왜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는데.’
다솜은 굴러들어온 돌 같은 선율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선율의 태도를 보고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지혁은 가만히 있었다. 지혁은 그저 평소처럼 침착한 태도로 선율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이 몇 초간 그를 보았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는지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한심한 이유는 못 받아 줘. 다른 데 알아봐.”
아까 부스에서 찬성이 예상한 대로였다. 누구라도 일부러 선배들의 신경을 긁으려는 것 같은 선율을 받아주지 않았을 노릇이었다.
하지만 선율은 지혁의 단호한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요? 잘하면 그만이잖아요. 농구, 자신 있어요.”
지혁에게 지지 않고 오히려 도발하는 선율의 모습에 옆에 있던 현석의 이마에 핏대가 서더니 못참겠다는 듯 큰 덩치를 이끌고 와서 선율에게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흥분하지 마.”
현석이 선율의 앞에 서려고 하자 지혁이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선율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농구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여전히……?’
지혁의 말에 다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나?’
하지만 선율은 속 시원한 대답은커녕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그때 다솜의 눈에 잠깐이었지만 선율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혁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기다려도 선율이 대답이 없자 지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정말 농구가 하고 싶다면 진정성을 보여 봐.“
그 말에 선율은 '어떻게?'라고 묻듯 지혁을 쳐다보았다.
"한 게임 하자, 신입생 대 우리, 이렇게 나눠서.”
지혁은 고민 끝에 선율이 납득할만한 제안을 꺼냈고, 그 말로 인해 체육관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얼어버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율은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좋아요. 그럼 게임인데 뭐라도 걸죠?"
그러더니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게 웃으며 다솜을 쳐다보았다.
"이를테면 다솜 선배?”
“뭐?”
그 말을 듣고 다솜이 소리쳤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그런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어쨌든 여자의 감이랄까.
다솜은 선율이 자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그가 자신을 핑계 삼아 선배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도대체 왜?'
선율을 보고 다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앞에 있던 지혁과 현석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선율의 말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하지만 어이가 없는 건 다솜과 선배들만이 아닌 모양이었는지 뒤에 있던 찬성까지 선율에게 다가가면서 눈을 부라렸다.
“듣자 듣자하니 못 참겠는데 야, 입 큰 신입생. 다솜이 내 꺼 거든?”
‘저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왜 네 꺼야. 이찬성!”
이쪽이야말로 듣자 듣자하니 안 되겠어서 다솜은 짜증을 냈다. 그러자 찬성이 다솜을 돌아보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 몰랐어, 윤다솜?”
찬성은 항상 저런 식이었는데, 입만 열면 꼭 엉뚱한 소리를 하곤 했다. 다솜은 ‘에휴, 말을 말아야지’하고 생각하며 속을 삭혔다.
“이찬성 시끄러워.”
마치 선율에게 받은 화를 애꿎은 찬성에게 푸는 양 현석이 다솜 대신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 말에 찬성은 바로 현석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지혁과 현석, 찬성, 맞은편에는 신입생들이 대치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 상황을 보고 세현도 현역 멤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자, 그럼 어쨌든 이 바보를 걸고 한 판 붙는 거지?”
세현이 말을 하고는 어깨를 휘휘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바보라는 게 설마 나?’
그런데 그들에게 합류하려고 걸어오는 세현을 보고 지혁이 손을 저었다.
“세현아, 너는 벤치에 있어.”
“네? 지혁 선배 왜요!”
“이미 3:3이잖아.”
“하지만 저도 경기하고 싶…….”
세현은 말을 하다가 날이 선 지혁과 눈이 주치고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너는 심판을 봐 줘.”
“……네, 선배.”
세현은 지혁의 말에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 때 멀뚱히 있던 은빛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긴 사람의 기준이 뭐예요? 이긴 팀원 세 명이 다 다솜 선배를 가질 수도 없고. 애당초 선배를 건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요.”
“하…….”
은빛의 말에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지혁 선배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다솜이가 물건이냐……. 네가 갖고 내가 갖고 하게.”
지혁 선배의 말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다솜은 이때다 싶어서 현역 멤버들과 신입생들 중간으로 걸어가 양쪽을 쳐다보았다.
“그래, 다들 왜 그래! 갖는다느니 어쩌니 오그라드는 말이나 하고…….”
다솜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이 상황이 난감해서 분위기가 가라앉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때, 그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션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그럼 이긴 사람이 go on a date with her. 어때요?”
다들 갑작스러운 영어에 당황했지만 ‘데이트’라는 말은 정확하게 들렸다.
“데이트? 좋네, 그거.”
션의 말에 선율이 웃으며 동의를 표했다.
“왜 또 분위기가 그렇게 가는데?!”
“그래, 해보자. 지면 당장 농구부에서 나가, 신선율.”
다솜이 소리쳤지만 지혁은 이를 무시하고 이를 까드득 씹으며 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혁도 슬슬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니 다들 뭐라는 거야! 왜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에요. 난 동의한 적 없거든요!?”
다솜은 엉뚱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황당해하며 소리치고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다.
“좋아. 그럼 골을 제일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자.”
하지만 믿었던 현석마저도 다솜의 말을 무시하고 시합을 위한 룰을 제시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다솜은 억울한 눈으로 멤버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눈을 맞춰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세현에 의해 질질 끌려서 농구 코트 사이드의 벤치로 밀려났다.
멤버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서서 몸을 풀었다. 다솜을 갖고 말고를 떠나서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된 느낌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몰라,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이참에 신입생들 실력이나 보자.’
다솜은 체념하고 벤치에 털썩 앉았다.
심판을 보게 된 세현은 다들 어느 정도 몸이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호루라기를 불어 주변을 정리시켰다. 세현의 지시에 따라 현역 멤버 대 신입생들이 마주보고 섰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그들은 서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한 후, 각자의 위치에 가서 섰다.
그중 지혁과 선율이 점프볼을 하기 위해 코트의 가운데로 와서 섰다.
공을 들고 중간에 서 있던 세현이 호루라기를 부는 동시에 공을 위로 띄었다. 지혁과 선율은 동시에 공을 향해 뛰었고, "탕"하고 공이 손에 맞는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