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말이지. 어렸을 때 아빠가 로봇이랑 인형을 사 왔는데 내가 그렇게 로봇을 달라고 했대. 그건 오빠 거였는데도 그렇게 떼를 썼대. 그 때부터 그랬나 봐, 남자들이 하는 걸 좋아한 게.”
“오빠가 있어요?”
“응. 별로 얘긴 많이 나누지 않지만.”
“그렇구나.”
다솜은 선율의 형식적인 대답을 들으며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눌렀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9시가 넘어 있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다솜이 마무리를 짓는 태도를 보이자 선율이 가기 전에 볼일을 보러 잠깐 자리를 떴다.
선율이 화장실로 간 사이 다솜은 슬쩍 가게 안 쪽 주방 앞에 있는 계산대로 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계산해주세요.”
“응. 아휴, 같이 온 애는 남자친구야? 잘생겼네.”
“네? 절대 아니에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맨날 같이 오던 애들은 어쩌고?”
“오늘은 연습 끝나고 바로 헤어졌어요.”
“그래, 하긴 쟤도 괜찮긴 한데, 아줌마 눈에는 자주 오던 애들 중에 얼굴 쪼마낫고 잘 생긴 애 있지? 걔가 나아. 더 착실하게 생겼어.”
“아, 지혁 선배요?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지혁을 칭찬하는 말에 다솜은 헤벌쭉 웃으며 대답하고는 떡볶이 값을 지불한 후 입구 쪽으로 걸어나왔다.
잠시 후, 손에 있는 물기를 털며 나온 선율이 계산대로 향했다.
“내가 이미 계산했어!”
입구에 서 있던 다솜이 소리치자 선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정말로 계산한 것을 확인하자 선율은 투덜거리며 다솜에게 다가왔다.
“왜 그랬어요. 내가 사려 했는데…….”
“뭘 그런 걸 따져. 내가 선배잖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다솜을 보고 선율이 작게 중얼거렸다.
“선배, 틈을 좀 줘요.”
“뭐라고?”
“아니에요. 일단 나가요.”
선율은 먼저 홱 가게를 나갔다. 다솜이 뒤따라 나가 보니 그는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급하게 찾고 있었다.
“뭐해?”
“오면서 봤던 거 같은데……. 아! 저기다! 선배, 따라와 봐요!”
선율은 길가에 있는 휴대폰 가게로 향했다. 화려한 LED 조명이 가게 앞의 어두운 길가를 밝히고 있었고 가게 앞에는 광고전단지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가게로 들어가자 뻔질한 느낌의 판매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선율은 판매원에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가게 옆에 빽빽하게 진열된 휴대폰 케이스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기종이 뭔데요? 아이폰이면 이거 잘 나가는데.”
판매원이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진 케이스들을 몇 개 꺼내서 보여줬다. 하지만 선율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케이스들을 가로로 한 줄씩 손가락으로 따라가면서 까다롭게 살펴보았다. 그는 셋째 줄 쯤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이거 어때요?”
“응?”
다솜은 선율에게서 포장된 케이스를 건네 받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네모반듯한 파란 케이스에는 아래쪽에 실리콘 재질로 된 귀여운 사막여우가 붙어 있었다.
“귀여워!”
“그렇죠? 그 이상한 파란 괴물은 버리고 이거 써요.”
“뭐? 내 스티치가 얼마나 귀여운데!”
다솜은 스티치 케이스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며 말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다솜은 선율이 골라 준 사막여우 케이스가 조금 더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주세요.”
선율은 다솜의 의사와 상관없이 값을 계산하고 포장지를 뜯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막무가내야.’
“선배, 휴대폰.”
선율은 한 손에 케이스를 든 채로 다솜의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스티치 케이스를 벗기고 사막 여우 케이스로 바꿔 끼웠다.
“솔직히 이게 더 귀엽잖아요.”
“조금은…….”
“저 사막여우 엄청 좋아하거든요. 선배 이거 볼 때마다 내 생각해야 해요?”
선율은 휴대폰을 다시 다솜에게 주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자 일순간 주변이 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순간 다솜은 그 미소가 예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예쁘게 웃어.'
왠지 앞으로 이 사막 여우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날 것 같은 미소였다.
선율은 다솜이 들고 있는 휴대폰 버튼을 꾸욱 누르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다. 이제 들어가야 되죠?”
“헉. 그러게, 벌써 10시가 넘었어.”
다솜은 액정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고 서둘러 휴대폰 가게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번 버스 타요? 데려다 줄게요.”
“아니야, 괜찮아.”
“안 돼. 너무 늦어서 위험해.”
선율은 또 막무가내로 나오기 시작했고 다솜은 이것만큼은 정말로 양보할 수 없어서 진심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솜의 표정에 선율이 조금 주춤하더니 한 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싫어해요. 데려다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나한텐 특별하단 말이야.”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서 다솜은 입만 달싹거렸다.
“특별하다니?”
“로망……같은 거.”
다솜은 작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자신의 소망 중 한 가지였는데 이 이야기를 꺼내려하니 다솜은 몸이 간질간질하며 마음이 떨려왔다.
“처음으로 집을 데려다주는 사람이 남자친구였음 좋겠어.”
다솜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터라 잘 들리지 않아 고개를 다솜 쪽으로 숙이던 선율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예요. 아직 남자친구 사겨본 적 없어요?”
“……어.”
“선배가? 의외네.”
“어쩌다보니? 별로 관심이 없어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다솜은 그 생각을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첫 남자친구 로망이라. 귀엽네, 선배.”
선율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 손으로 턱 언저리를 짚더니 다솜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처음으로…….”
“어! 버스 왔다.”
그때 버스 한 대가 정류장 앞에 멈춰섰고, 다솜은 곧장 버스의 앞으로 달려갔다.
“나 정류장이 바로 집 앞이라 걱정 안 해도 돼. 안녕.”
다솜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후다닥 버스에 탔다. 그것이 워낙 순식간이어서 선율은 미처 따라 타지 못했다.
그녀는 교통카드를 찍은 후에 뒤쪽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니 선율이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솜은 오히려 그런 선율에게 명랑하게 팔을 흔들었다.
“너도 조심해서 가! 내일 봐!”
***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다솜은 귀여운 모양만큼이나 말랑말랑해서 기분 좋은 감촉을 주는 사막 여우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여우를 보고 있으니 이것을 주며 미소 짓던 선율의 모습이 떠올랐다. 뒤이어 버스를 혼자 탔다고 원망하듯 쳐다보던 얼굴도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양보할 수 없었어.’
사실 다솜의 로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천천히 집앞까지 걸어간 후, 남자친구가 집 앞에서 아쉬운 듯 다솜을 보내지 않고 머물다가 가로등 밑에서 그녀에게 살짝 입을 맞추어주었으면 했다.
다솜은 모락모락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다솜의 상상 속에서는 가로등 밑이 역광이어서 남자친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가로등 빛이 비추면서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지혁 선배?'
다솜은 깜짝 놀라 상상을 멈추었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지혁 선배가 집에 바래다주는 상상을 하다니.’
다솜은 손으로 양쪽 볼을 감쌌다. 감싼 손에 뜨거운 볼의 감촉이 느껴져서 그녀는 얼굴을 식히려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았다.
하지만 결국 상상일 뿐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지혁 선배는 인기가 많으니까.’
그동안 지혁이 사귄 여자친구 중 다솜이 얼굴을 본 여자만 해도 벌써 네 명이나 되었기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창문 밖 경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불어오는 밤바람이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