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2)
“끄응…….”
원노삼은 자리에 드러누워 신음을 흘렸다. 어이없이 빼앗겨 버린 색주가도 색주가지만, 그 어린놈에게 얻어맞아 이렇게 드러누워 있다는 것이 더 없는 치욕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단 일 장(掌).
태원 팔대 문파의 주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원 북동쪽에서는 한가락 하는 고수라 자처했던 원노삼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일이 알려진다면 다른 흑도 문파들이 흑야방을 우습게 보고 달려들 것이 뻔한 것이다.
“장연우…… 철두광견 이 개자식을…….”
원노삼은 덮어 쓴 이불을 잘근잘근 씹어 물며 신음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장연우 그 개놈을 잡아 무릎 꿇리고 주리를 틀어 버리고 싶지만,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이러다가 홧병으로 죽어 버리고 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주님, 깨셨습니까.”
“무슨 일이냐!”
원노삼은 화를 터뜨리듯 소리 질렀다. 장연우에게 향한 분노를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심정이 들어서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 있던 수하는 움츠러든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손님들?”
원노삼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구냐?”
“그, 그것이…….”
수하는 머뭇거렸고, 원노삼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설마 장연우 그 개자식은 아니겠지?”
두들겨 패고 나서 뒷수습을 하러 온 거라면, 더없는 굴욕을 안겨주고 쫓아내리라.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찾아온 사람은 장연우가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그래. 그 새끼가 그럴 리 없지.”
원노삼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양심 없는 새끼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켕겨서 사과를 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 누구냐?”
“처, 철혈문주님과…….”
“그 새끼가 왜 와!”
그가 자신을 농락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진 원노삼은 다시 한 번 분노를 토해내었다.
자신이 장연우 그 어린놈에게 얻어맞아 일장에 뻗어버린 걸 아는 이재룡인지라, 분명 자신을 비웃으러 온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이 개놈의 새끼를…….”
흥분한 원노삼은 거칠게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본 원노삼은 문을 열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바깥에 있는 건 이재룡만이 아니었다. 과거 태원의 패자를 자처했던 금룡장주(金龍莊主) 손정호(孫正虎)를 비롯해, 장연우에게 패해 복속되다시피 한 문파의 주인들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던 것이다.
“무, 무슨 일들이시오?”
원노삼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조금 전까지 치솟았던 분노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저런 거물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대표해, 손정호가 말했다.
“삼호방의 어린놈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다 들어 위로차 왔소.”
“……흥!”
원노삼은 찌푸려진 얼굴로 콧김을 내뿜었다. 결국 자신을 조롱하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를 보며, 손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소?”
안 된다고, 당장 꺼지려고 외치려던 원노삼은 손정호의 눈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정호가 곁눈질로 원노삼의 수하를 힐끗 보자,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읽은 원노삼은 수하를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이분들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썩 꺼져라! 내가 부르기 전엔 그 어떤 사람도 이 근처로 와서는 아니 될 것이야!”
엄명을 받은 수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밖으로 떠났다. 곧이어 소란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근처에 있던 방도들도 모두 자리를 비키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서 일방의 주인다운 위엄을 조금이나마 차렸다는 생각에 기뻐진 원노삼은 자신의 앞에 있는 여섯 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갑시다.”
원노삼은 이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방 안은 일방(幇)의 주인이 거처하는 곳 답지 않게 수수했다.
그러나 이것은 원노삼이 소박함을 자랑해서가 아니었다. 며칠 전 있었던 일로 인해 분개한 원노삼이 방안에 있던 모든 것을 때려 부순 탓에, 새 가구가 준비될 때까지는 방안이 휑하니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를 알지 못하던 손정호는 감탄하고 말았다. 듣자니 흑야방의 방주가 탐욕이 가득한 노괴라더니, 그게 다 헛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손정호가 먼저 입을 떼었다.
“원 방주.”
“말씀하시오.”
“철혈문주께 며칠 전의 일을 들었소이다.”
‘이, 이 개놈의 자식이…….’
원노삼은 불타는 시선으로 이재룡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그 어린놈에게 창피를 당한 일을 떠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것이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라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었다.
손정호는 그 눈빛을 다르게 해석했다. 장연우에 대한 분노에 불타는 눈이라 생각한 것이다.
“철혈문주께서는…… 원 방주께서 당한 일에 분개하셨소.”
“뭐요?”
원노삼은 그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손정호를 보았다.
이재룡이 말했다.
“비록 원 방주께서 굴욕을 당하셨다 하나…… 기실 원 방주께서 노기(怒氣)를 조금만 늦게 터뜨렸다면 그 일을 겪었을 것은 바로 이 모(某)였소.”
“엥?”
“이 철혈문의 이재룡 역시 그 오만방자한 어린놈에게 분노를 터뜨리려 했으나…….”
이재룡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어린놈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을 거라는 말은 차마 자존심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노삼은 그 모습을 보곤 자기도 모르게 화가 풀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이재룡이 서사하 북쪽 색주가에 대한 권리는 얻어냈으되,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연우에 대한 분노와 굴욕에 몸을 떨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원노삼은 자기도 모르게 이재룡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 노인네가 이 문주의 생각을 몰라봤구려.”
“이해합니다. 우린 그동안 다투는 사이였으니 그리 생각하시는 게 이상하지 않지요.”
말을 끝낸 두 사람은 갑자기 밀려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평생 흑도 건달로 살아온 그들이 정파 무림인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니 닭살이 돋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새끼나 개자식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고 먼, 이토록 정중한 대화는 태생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두 사람이 어색하게 손을 떼고 헛기침을 하자, 손정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비록 시와 때는 다르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그 어린놈에게 치욕을 겪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저 말을 하는 손정호부터, 대로 한복판에서 장연우의 주먹에 얻어맞아 번개 맞은 개구락지마냥 뻗어버리는 치욕을 겪었던 것이다.
그것도 고작, 자기도 모르게 밟은 동전 하나 때문에.
그때의 일을 떠올린 손정호는 이를 갈았다. 비록 자신이 태원 흑도 중에서는 가장 점잖고 군자답기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그래도 근본이 흑도인 그가 그런 일을 마음속에서 지워낼 리 없었다.
원노삼이 말했다.
“허면, 그 개자식에게 복수를 하자는 거요?”
“그렇소.”
“하지만…….”
원노삼은 움찔했다. 자신을 고작 일 장(掌)에, 그것도 전력은커녕 삼 할의 공력이나 끌어올렸을까 싶은 상태로 초죽음을 만들었던 장연우였다.
물론 이곳에 온 사람들도 무시할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금룡장주 손정호는 한때 태원의 패자로 자처했던 금룡장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장연우를 당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미 장연우에게 한 차례 패했던 자이지 않은가.
그 생각을 읽었는지, 손정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흑룡문(黑龍門)과 적갈방(赤鞨幇)에서도 나서 주기로 약조가 되었소.”
“오오!”
원노삼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흑룡문과 적갈방이면 태원 팔대 문파로 꼽혔던 곳들이 아닌가.
비록 흑룡문주나 적갈방주가 장연우에게 패했던 자들이라 해도, 그 두 사람의 합공이라면 분명 장연우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보다 강한 손정호까지 있지 않은가.
“언제, 언제 결행할 거요?”
원노삼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그 빌어먹을 개새끼를 쳐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자기도 알지 못했던 힘이 솟아오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설령 그 과정에 자신이 힘을 보태지 못하더라도, 그 개자식을 쳐 죽이는 장면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있었다.
“이런 일은 시일을 오래 끌면 안 되오.”
“그럼?”
“오늘 밤!”
***
철전투귀(鐵錢鬪鬼) 양소는 지루함을 못 이겨 하품을 내쉬었다. 매일 하는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삼호방의 문지기.
그것이 양소의 직업이었다.
나름 별호라면 별호를 가진 양소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그 별호 자체가 별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철전 한 닢에도 개처럼 싸운다는 이유로 철전투견이라는 별호가 붙었고, 삼호방이 태원의 패자가 된 후로는 눈치를 본 사람들이 견(犬)자를 귀(鬼)자로 바꿔 준 것이 바로 그 철전투귀라는 별호의 내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예전의 일이었다. 나름 괜찮은 봉급이 나오는 삼호방 문지기 자리는 그의 투쟁심을 한참이나 꺾어놓았다. 등 따시고 배부른데 싸움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렇게 된 지도 벌써 일 년.
양소는 이제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명의 중년 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직 멀었나…….”
그는 슬쩍 종루(鐘樓)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응?’
양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루가 있는 방향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누구냐!”
“이런!”
당황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양소는 그 소리를 듣고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실에 안주하던 그에겐 철전투견 시절의 감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뒤이어 가해진 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컥!”
양소는 쓰러졌다. 허공을 날아 그를 찔러든 단검 때문이었다. 다행히 치명적인 급소에 맞지는 않아 목숨을 건질 수는 있을 테지만, 더 이상 운신하긴 불가능했다.
“습격이다!”
쓰러지는 양소를 본 삼호방도 하나가 크게 외쳤다. 측간을 나서던 중이었던지, 그는 흘러내리려는 바지를 붙잡은 채였다.
양소를 쓰러뜨린 사내는 황급히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그를 때려눕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삼호방 안에서는 수많은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시간까지 잠도 자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망할!”
손정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기습의 묘를 제대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 적갈방주 이명이 입을 열었다.
“금룡장주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제 아무리 철두광견 그놈이라도 우리 셋의 합공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지 않겠소.”
“아무렴, 아무렴. 게다가 수하도 우리 쪽이 훨씬 많고 말이지.”
흑룡방주 문흑현은 길게 자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고작 해야 백 명도 안 되는 삼호방이니, 거의 사백 명이나 되는 여덟 문파의 연합군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게다가 고수의 수도 이쪽이 훨씬 많았다. 따지고 보면 졸부나 다름없는 삼호방의 고수라고 해 봐야 철두광견 장연우와 탐혈적호(貪血赤虎) 양호철이 고작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 중 탐혈적호 양호철은 며칠 전 복양으로 떠난 뒤였다. 삼호방이 이길 가능성은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장연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