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복양
장연우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눈을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개천 하나만 넘으면 귀의가 있다는 복양이 나오는 것이다.
태원에서부터 물경 천 리.
그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던가.
그나마 장석암(嶂石岩) 근처에서 만난 녹림도들을 털어먹지 않았다면, 거의 스무 날이 다 되는 시간을 노숙자나 마찬가지 신세로 보내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우선 귀의 심영생을 만나 자신의 양물을 고치고, 천천히 이 복양의 뒷골목에서부터 다시 세력을 일궈 태원의 개잡종 놈들이 한 짓의 대가를 받아내고 말리라.
부드득 이를 간 장연우는 개울을 건너 복양으로 향했다.
“호패.”
복양으로 향하는 다리엔 두 명의 관병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사무적인 태도로 장연우를 향해 호패를 요구했고, 장연우는 두 팔을 허리춤에 올리곤 당당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없소.”
“없어?”
장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다 습격을 받아 도망 나온 처지에 호패까지 챙길 정신은 없었던 것이다.
사십 대로 보이는 관병은 인상을 찌푸리며 창을 들었다. 호패도 없는 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관병에게 대드냐는 표정이었다.
장연우가 이 관병을 팰까 말까 고민할 때, 그 옆에 있던 늙은 관병은 동료의 창을 슬그머니 밀어내고는 장연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림인인가?”
“그렇소.”
“지나가게.”
“형님!”
사십 대의 관병은 놀라 외쳤다. 장연우 외엔 통행인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늙은 관병은 손을 저어 그를 막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안 보내 주면 소란을 일으킬 게 뻔하잖은가.”
“눈치가 빠르시구려?”
“이 일만 벌써 삼십 년째네.”
장연우는 피식 웃어 버렸다.
절대 안 된다 말하려던 사십 대의 관병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그제야 장연우가 위험한 사람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만족해하던 장연우는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여기 혹시 양호철이라는 놈 안 왔소? 태원에서 왔을 텐데.”
“양호철?”
“무림인이오. 눈썹은 송충이마냥 진하고 눈은 부리부리한 게 제법 잘 생겼지. 흠이라면 코가 약간 낮고 오른쪽 뺨에 흉터가 하나 있다는 건데, 무림인이라면 그런 거 하나 정도 있는 게 이상하진 않지.”
“……그분과는 무슨 관계요?”
장연우는 만족했다. 이들이 양호철에게 그분이라는 칭호를 쓰는 걸 보면, 양호철이 이곳에서 민심을 제법 얻었던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놈, 내 부하요.”
그 말은 그가 기대하던 반응을 끌어냈다. 장연우를 적대하던 사십 대의 관병마저도 갑자기 장연우에게 호의적으로 변한 것이다.
관병의 노모가 역병이 옮아 고생하던 차에, 양호철이 데려온 의원의 치료를 받고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는 아예 태도를 바꿔 가짜 호패를 발급받을 수 있는 장소까지 알려주었다.
그곳 주인장 역시 양호철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양호철과 함께 간다면 돈 한 푼 내지 않고 새 호패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내가 부하는 잘 뒀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기분 나쁜 새끼’였던 양호철은 어느새 장연우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어 있었다.
“관병이 이런 거 알려줘도 되는 거요?”
“흠, 흠흠…….”
사십 대의 관병은 헛기침을 연거푸 내뱉었다.
흔한 일이고 상부에서도 별로 잡을 의지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관병인 자신이 그런 것을 남에게 말해줬다는 게 그제야 껄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장연우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고맙소. 근무 열심히 서쇼.”
“그, 그러겠소.”
장연우는 밝아진 얼굴로 몸을 돌리려다 고개를 돌려 관병들을 보았다.
“참,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관병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장연우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양호철 그놈, 귀의 심영생이랑 있는 거 맞소?”
***
장연우는 밝아진 얼굴로 복양을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경공을 써서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나름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복양의 거리는 장연우의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초행길에 길이라도 잃었다가는 오히려 더 늦어진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격 급한 장연우에게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장연우는 행인들이 가르쳐 준 길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향했다. 까짓 거, 길을 잃으면 지붕 위를 뛰어서라도 찾으면 될 거 아닌가.
그러나 복양의 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전국시대에 위(衛)의 수도로 번성했던 역사를 지녔던 도시인 만큼, 그 골목의 복잡함은 태원 사람인 장연우에게 적지 않은 곤란을 안겨주고 있었다.
“망할!”
장연우는 욕설을 내뱉었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라 할 만한 일이었지만, 자기합리화에 능숙한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아닌 복양의 관리들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었다. 그 부패한 관리들이 도시 관리를 제대로 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으아, 열 받아!”
조금 전 지나쳤던 만두집이 다시 나왔다. 결국 장연우의 인내심은 골목 두 개를 돌 때쯤 바닥나 버렸다.
그때였다.
“철두광견 장연우?”
장연우는 이곳에서 들을 리 없는 자신의 별호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 새끼들은.”
장연우는 자신의 앞을 막은 세 명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뒷골목 파락호지만, 자신의 별호를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파락호라 여길 수 없었다.
장연우의 머리는 활발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장연우는 그저 무식할 뿐,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태원에 있는 잡놈들이 청부까지 했구나!”
“무식한 놈이라더니, 눈치는 빠르구나.”
“이런 상도의도 없는 새끼들…….”
장연우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것은 태원에 있는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 미친놈의 새끼들아! 살수면 살수답게 쥐새끼처럼 숨어있다 찌를 것이지, 이 환한 대낮에 정면으로 찾아와 죽이려 들어? 이제 막 살수로 나선 만두집 점소이도 그렇겐 안 하겠다, 새끼들아!”
“뭐, 뭐…….”
“이 개새끼들이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장연우는 울화통을 터뜨리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살수라는 새끼들이 이런 환한 골목에서 대놓고 죽이려 한단 말인가.
“내가 말야, 태원의 미친개 장연우야, 새끼들아!”
장연우는 고함을 내지르며 정면의 사내를 들이받았다. 그의 별호를 철두광견(鐵頭狂犬)으로 만든, 무공과 다름없는 수준의 박치기가 정면의 사내에게 정통으로 들어갔다.
장연우가 그렇게 빨리 행동을 개시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내는 그대로 코뼈가 함몰된 채 쓰러져 버렸고, 그제야 반응을 시작한 두 명의 살수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고 날아드는 장연우의 일 장(掌)과 일 권(拳)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뭐 이렇게 시시해?”
장연우는 바닥에서 꿈틀대는 살수들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이름만 살수지, 뒷골목 파락호와 다를 것도 없는 놈들이 아닌가.
“이딴 새끼들이 감히 이 몸을 죽이겠다고…….”
어이가 없어진 장연우는 쓰러져 꿈틀대는 사내들을 잘근잘근 짓밟았다.
본래대로라면 당장 일으켜 일장에 쳐 죽임이 마땅했지만, 너무도 한심한 꼬락서니라 죽일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렇지.”
한참 동안이나 폭력을 행사하던 그는 쓰러진 사내들의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목숨을 빼앗지 않았으니 돈이라도 빼앗아야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 때문이었다.
“새끼들, 돈 좀 가지고 다녀라.”
장연우는 이미 기절해 버린 셋을 보며 투덜거렸다. 어떻게 세 명을 털어도 은자 하나가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한참을 투덜대던 장연우는 쓰러진 사내들을 한 대씩 더 걷어차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사내들을 두들겨 패며 화가 좀 풀렸던 건지, 장연우의 발걸음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가벼워 보였다.
장연우의 모습이 사라진 직후, 두 명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씁쓸하게 웃은 중년인 하나가 쓰러진 사내들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우리 유령곡(幽靈谷)이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회의(灰衣)를 입은 중년인이 말을 받았다.
“어쩌겠소. 의뢰 내용이 그런 걸.”
적의(赤衣)를 입은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귀신 홍두깨 놀음 같은 짓을 시키는 괴상한 의뢰였지만, 물경 은자 육백 냥이나 되는, 그것도 매달 그 금액이 지급되는 의뢰였기에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유령곡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적의를 입은 중년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 역시 그것을 모르진 않지만,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살수 집단 중 하나였던 유령곡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자조도 섞여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소. 마무리나 합시다.”
회의를 입은 중년인은 짧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쓰러진 사내들의 목을 향해서였다.
‘그러게, 무각 대사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니까.’
적의를 입은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십여 년 전 수행한 의뢰로 아직까지 발목이 잡혀있던 유령곡인지라, 매달 육백 냥이 들어오는 의뢰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이 청부 대상의 악명을 높이라는, 그야말로 하오문이나 수행할 법한 수상한 의뢰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금 전 있었던 일도 바로 이들의 작품이었다. 바로 이들이 복양의 파락호들을 고용해 장연우를 습격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 하려는 일은 바로 그 뒷처리였다. 이 파락호들이 장연우를 습격하라는 의뢰를 받았음을 복양의 하오문도들에게 슬쩍 흘려둔 뒤였으니, 이들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장연우가 의심을 받을 것이다.
“욱!”
회의 중년인의 손이 사내들의 목에 닿았다. 그러자 정신을 잃고 있던 사내들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유령곡 특유의 수법으로 사혈(死穴)을 짚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유령곡을 위해 헌신한 걸 영광으로 알아라.”
회의를 입은 중년인은 짧게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파락호들이 유령곡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영광이 아니겠느냐는 듯한 태도까지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적의를 입은 중년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괴상한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요?”
“의뢰인이 만족할 때까지겠지.”
“……그냥 암습해서 죽여 버리는 게 편할 텐데.”
“나 역시 그 말엔 동감이오만…….”
회의를 입은 중년인은 쓴웃음을 물었다. 죽이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는 작자를 쫓아다니며 악명을 키워 줘야 한다는 사실이 다소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런 일을 받아들이고 만 유령곡의 처지가 새삼 애처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쩌겠소. 운명이려니 해야지.”
“운명…… 운명이라…….”
적의를 입은 중년인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려는 듯, 운명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입 밖에 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의를 입은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이러다 놓치겠소. 움직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