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귀의(鬼醫) 심영생(沈影生)
“삼천 냥!”
의원은 외쳤다. 일말의 협상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기색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장연우는 눈앞의 의원을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볼을 떨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의원이 귀의 심영생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가 저렇게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때려죽이고 말았으리라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이보쇼, 심 선생.”
“삼천 냥!”
심영생은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철전 한 푼도 깎아 줄 수 없다는 기세가 역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장연우는 그 모습을 보고도 울화를 터뜨릴 수 없었다. 이놈을 쳐 죽여 버리면 자신의 양물을 살릴 사람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장연우는 십여 년 만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좀 깎아 주면 안 되겠소?”
“얼마나?”
“그…… 한 오백 냥?”
심영생은 말했다.
“약값만 해도 거의 이천 냥이 드는데 오백 냥으로 깎아달라고? 이런 미친…….”
“……그게 무슨 소리요?”
장연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 무슨 시술이길래 약값만 이천 냥이 넘게 들어가?”
장연우는 생각했다.
바가지다. 이건 정말 정도를 넘어선 바가지였다. 설령 한 번에 스무 첩의 약이 나온다 해도 은자로 이천 냥이면 한 첩에 무려 백 냥이나 되는 금액이 아닌가.
자금성에 있는 황제라 해도 그만한 약은 먹어보지 못했을 터.
이건 사람의 약점을 잡아 한 몫 단단히 챙기려는 수작이 분명한 것이다.
“아니, 무슨 의원이! 사람의 곤란을 노려 폭리를 취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장연우는 필사적으로 화를 참으며 물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심영생을 때려죽이고 말 것 같아서였다.
심영생은 말했다.
“무공을 포기해도 된다면 은자 두 개면 충분한 일이지. 하지만 무림인이 무공을 포기할 순 없을 것 아니오?”
“무공?”
장연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공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건가.
“무공하고 약하고 무슨 상관인데?”
“모르고 있었나 보군.”
잠시 혀를 차던 심영생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 무공이 만악의 근원이오.”
“……뭐?”
“당신 무공이 발기를 막고 있다고.”
“그게 무슨……!”
막 화를 내려던 장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느껴지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짚이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장연우는 삼호방의 사조가 남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려 보았다. 철심쇄혼수가 칠 성(成)에 도달하면 몸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이었다.
‘설마!’
장연우는 왠지 모를 암담함이 찾아듦을 느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서지 않았던 것은 무공이 칠 성에 이르렀던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그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설마하니 후인을 위해 무공을 남겨놓은 사람이 그런 악독한 짓을 했겠느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기억은 장연우의 기대를 짓밟고 있었다.
‘무공이 칠 성에 이르면 나의 원한을 갚기에 충분할 터…… 때문에 칠 성 이후의 구결은 내 원한을 갚게 되면 얻을 수 있도록 안배해 두었다.’
장연우의 표정이 점점 더 흐려졌다.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후인이여, 평생의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내 원한을 풀어 주기 바란다.’
장연우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저 흔한 유언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의 원한을 갚지 않으면 고자로 만들겠다는 위협이었다니!
“이런 개놈의 새끼가아아아!”
장연우는 비참한 심정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랬다.
삼호방에 비급을 남긴 사조도 결국은 흑도인이었다. 아무 대가 없이 남 좋은 일 시켜 줄 인간이 아닌 것이다.
동시에, 장연우는 좌절했다.
그저 기연이라 여기고 무공에만 집중했던 장연우였던지라, 그 외의 내용에 대해선 거의 잊고 있었다. 도대체 무공을 남긴 사조의 원한이 뭐였는지, 그 원한을 갚을 대상이 누구였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장연우로서는 눈앞의 심영생만이 구원의 열쇠였다.
“사, 삼천 냥만 구해오면 해결되는 거요?”
심영생은 말했다.
“삼천 냥은 일 회차 치료 비용이오.”
“일 회차?”
장연우는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일 회차라 함은 이 회차, 혹은 삼 회차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뒤이어 들려온 심영생의 말은 그런 불안을 사실로 확인해 주었다.
“무공을 보존한 채 양물을 살리려면 최소한 여덟 번의 시술을 받아야 하오. 물론 시술 단계가 높아질수록 치료비도 커지지.”
“이런 미친!”
장연우는 뒷골이 당겨오는 걸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나름 일류라 불리는 고수인 자신이니 은자 삼천 냥이야 어떻게든 모을 수 있겠지만, 여덟 번이라면 최소한 이만 사천 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시술 단계가 높아질수록 치료비가 늘어난다면, 어쩌면 삼만…… 아니, 사만 냥이 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날 두들겨 패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라면 포기하시오. 어차피 약재가 없으면 손을 못 쓰거든.”
“으으…….”
심영생은 눈치 빠르게도 선수를 쳤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장연우는 가슴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이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니냔 말이다.
“할 말 다 했으면 어서 가 보쇼. 난 바쁜 의원이거든.”
“으…….”
장연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어차피 고치지 못할 거라면 심영생도 죽이고 자기도 죽어 버리겠다는 생각도 들고 있었으나, 아직 스물 셋 밖에 되지 못한 자신이 양물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는 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그런 결단을 막고 있었다.
“뭐하는 거요? 진료 방해하지 말고 빨리 여기서 나가 주시오!”
심영생은 재차 축객령을 내렸다. 어쩔 수 없음을 느낀 장연우는 일단 물러나서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몸을 돌렸고, 심영생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곤 다음 환자를 볼 준비를 마쳤다.
그때였다.
“심영생!”
밖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심영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흠칫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놈이 감히 만수도방(萬手賭房)의 은자를 떼먹으려 들어? 그러고도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게냐!”
장막 밖에서 거친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막 밖으로 나가려던 장연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수도방이라면 장연우도 알 만큼 유명한 장안의 도박장인데, 갑자기 그곳이 왜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심영생은 그곳에 빚을 지고 도망쳐 나온 것 같았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은 하얗게 질린 심영생의 표정과, 안으로 들어온 흉험한 인상의 두 사내의 입을 통해 증명되었다.
“흥! 도박 빚을 떼먹고 달아난 놈이 당당히 이름을 내걸고 의원질을 해먹어?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자, 잠깐만! 떼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
심영생은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아무 효과도 내지 못했다.
“형님, 일단 자르고 시작하죠?”
“잠깐 기다려 봐라. 돈 받을 수 있으면 받고 자르자.”
안으로 들어온 두 사내는 심영생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다가왔다.
긴장한 심영생은 바닥을 기어 슬금슬금 물러나며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어, 어떻게 이 멀고 먼 복양까지…….”
“네놈이 만수도방을 우습게 봤구나!”
밤송이처럼 난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 질렀다. 심영생이 빚을 갚지 않고 도망치는 바람에 천칠백 리나 떨어진 복양까지 심영생을 추적해 왔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수염을 기른 사내가 말했다.
“쌍칼, 잡아라!”
“예!”
쌍칼이라 불린 사내가 성큼 성큼 나아가 심영생의 멱살을 세게 잡자,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심영생은 그대로 휙 하고 들려버렸다.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는 붙잡혀 떨고 있는 심영생을 향해 스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자 천오백 냥은 준비됐느냐?”
“어, 없소.”
“없어?”
수염 기른 사내가 이를 갈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럼 은자 대신 네놈의 손모가지를 잘라서 가져가겠다!”
사내는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며 말했다.
심영생은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낱 의원이 무공을 익힌 쌍칼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황급히 눈을 돌려 장연우를 바라보았다. 제발 살려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연우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기만 했다.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모르진 않으나, 무릇 모든 행동엔 적절한 때가 있는 법. 적어도 심영생이 입을 열어 도와달라는 말을 꺼낼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는 게 옳은 것이다.
심영생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최대한 오래 버티려 했으나, 수염 기른 사내의 비수가 팔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자 참을성이 모두 바닥나 버렸다.
“잠깐! 잠깐! 내가 졌소!”
“진작에 그럴 것이지.”
수염 기른 사내는 심영생의 말을 오해하고 비수를 내렸다. 심영생이 돈을 내겠다고 말하는 거라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심영생의 입에선 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장 대협! 타협합시다!”
“이봐, 내 이름은 이동…… 뭐?”
막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던 수염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그제야 장연우의 존재가 거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넌 뭐냐?”
“그 의원 손님.”
“아…… 우리 돈줄이시구먼?”
수염 사내는 쌍칼에게 눈짓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심영생과 장연우 사이에 어떤 타협이 이루어지려는 것 같았고, 그것은 아마도 치료비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잘하면 돈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상황인 것이다.
심영생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장연우의 등 뒤에 숨고는, 떨리는 다리를 애써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탕약에 들어가는 재료를 구해 오시오! 그럼 제조비를 받지 않고 만들어 주겠소!”
“재료가 뭐요?”
“나, 날 구해주면 알려 주겠소.”
“……나쁠 거 없지.”
장연우는 씨익 웃었다. 비록 재료를 구해야 한다는 문제는 남아있지만 은자 천 냥에 달하는 제조비를 절감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닌 것이다.
사실 지금도 약간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으나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과욕이었다. 어쨌든 탕약의 재료가 있어야 자신을 치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 사내를 향해, 장연우는 밝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거기 둘.”
“뭐?”
“심 의원은 놔두고 돌아가시지.”
“……허.”
수염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장연우를 보았다. 보자보자하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보아하니 제법 힘 좀 쓰는 놈인가 본데, 네놈이 이 만수도방의 경호대장인 조하투귀(皂河鬪鬼) 이동춘의 상대가 될 성 싶으냐!”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조하투귀라는 별호를 거저 얻은 게 아니라는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동춘이 자신 있게 내놓은 조하투귀라는 별호는 그가 활동하던 서안 남쪽의 작은 하천인 조하(皂河)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조하 일대에선 제일가는 싸움꾼임을 뜻하는 별호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장연우의 비웃음만 불러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조하(皂河) 제일의 싸움꾼이라니, 그딴 게 무슨 위협이 된단 말인가.
적어도 자신을 상대하려면 서안투귀(西安鬪鬼)라는 별호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기도 귀찮다. 그냥 좀 자라.”
장연우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이런 삼류에게 무공을 쓰는 것조차 과분하다 여긴 탓에, 장연우의 주먹은 아무 내공도 담지 않은 상태로 뻗어나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철심쇄혼수의 묘리가 담겨있는 주먹이었다. 겨우 서안 남쪽에서나 거들먹거리는, 그것도 일파의 주인조차 되지 못한 이동춘이 버틸 수 있는 공격이 아닌 것이다.
“혀, 형님!”
쌍칼이 외쳤다. 이동춘이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아서였다.
장연우는 말했다.
“너도 뒈질래?”
“아, 아닙니다.”
쌍칼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방금 전의 일 수(手)로 보아, 장연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고수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놈 치워라.”
“옛!”
쌍칼은 쓰러진 이동춘을 업고 자리를 떠났다. 굉장히 재빨라 보이는 동작으로 미루어 볼 때, 장연우의 주먹이 자신을 향할 것이 어지간히도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떠난 후, 장연우는 심영생을 보며 입을 열었다.
“도박하셨소?”
“험험.”
심영생은 헛기침을 터뜨린 후 말을 이었다.
“처방에 대해서나 말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