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들었을 텐데 얼마 전부터 내가 반 애들이랑 진로상담을 하고 있단다. 알고 있니?”
“네. 얘기 들었어요.”
“너도 그거 때문에 부른 거야. 빈칸으로 냈더구나?”
담임은 옆의 종이뭉치를 슥슥 넘기더니 내가 낸 진로상담서를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장래희망 :
“네.”
“왜 빈칸으로 냈는지 말해줄 수 있니? 보통 뭐라도 쓰는데.”
물어보는 담임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굳이 조심스러울 건 없는데.
답은 뻔한 걸.
“꿈이 없으니까요.”
담임은 예상한 답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좋아하는 거나 잘하는 건?”
“모르겠는데요.”
“그렇구나.”
할 말이 있는지 담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른 말로는 ‘분위기를 잡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리한아,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마디 해줘도 될까?”
“...그럼요.”
말은 된다고 했지만 사실 “안 되는데요.” 하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 많은 게 벼슬인줄 아는 사람이 많다.
특히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게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마디 해도 되겠니?’하는 관습이 아주 성행이다.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날수록 듣기 힘들어지는데 말이야.
담임도 아직 20대일 텐데, 벌써부터 꼰대질이야 뭐야?
“내가 애들한테 다 하는 얘기이긴 한데, 너희 나이에 꿈이 없는 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일이란다. 지금은 모르겠어도 나중에 다 공감할 거야. 나랑 같이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음... 딱히 불행하진 않은데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경쟁사회니까요.”
“그래서?”
“꿈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담임은 계속해보라는 듯 턱으로 날 가리켰다.
분부대로 합죠.
“남들 하는 대로 대학도 가고 학점도 따면서 적당히 살다보면 적당한 곳에 취업할 테니까요. 지금 취업난이 심하다곤 하지만 제가 취업할 때쯤이면 지금보단 낫겠죠. 8년이나 남았는걸요.”
“흠....... 그러니까 너 말은 지금, 넌 꿈이 없을 뿐더러 딱히 가질 필요도 못 느낀다. 왜냐하면 적당히 살다보면 뭐라도 하게 될 테니까. 이 말이지?”
“적당히...는 아니고요. 평범하게 사는 게 더 좋다~ 이거죠.”
“하고 싶은 걸 하기보단 평범하게 대학 가고 평범하게 취직하는 게 좋다?”
“어... 대~충은 그렇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취직하고 나서 취미로 하면 되니까요.”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나중에 취미로 하면 된단 말이지...”
“네.”
담임이 팔짱을 꼈다.
“너, ‘재밌어서’가 어떤 취미를 하는 큰 이유인 건 알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너가 작곡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작곡을 할 때면 기쁘고 행복한 감정이 느껴지겠지 그럼?”
“평균적으로는 그렇-”
“물론 평균적으로.”
“...그럼 그렇겠죠.”
“그렇다면 리한아. 기왕 직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 재밌고 신나는 작곡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노력 정도는 해봐도 되잖아? 어차피 일은 해야 되는데 흥미가 가는 분야가 있으면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데요.”
내 말에 담임은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호오...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니?”
“먼저, 성과를 낼만한 재능이 있어야죠. 음악적으로 개미 발가락만큼도 재능이 없는 사람이 백년 천년 작곡공부만 한다고 해서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 작곡에 관심을 가질 확률은 낮지 않겠어? 따로 흥미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이미 최소한의 재능을 갖춘 걸로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음악을 예시로 드셨으니까 그걸로 얘기해보면, 너무 리스크가 커요. 기회비용이라고도 하죠.”
예를 들어-로 말을 시작하려는데 담임이 내가 할 말을 해버렸다.
“안정적인 직장을 위한 노력을 하는 대신 음악을 공부함으로써 얻을 거라고 기대하는 값보다 손실이 더 크다?”
“음... 제가 말하려는 걸 미리 말하셨네요.”
그러자 미소를 짓고 있던 담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좀 심각한데.”
“...예? 뭐가요?”
지가 말해놓고 나보고 심각하다는 건가? 당황스럽네...
“보통은 꿈이 없는 거에 대해 너처럼 당당하지 않거든. 조금이라도 불안해하거나, 걱정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넌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다르구나.”
“그런가요.”
꿈 없는 게 풀죽을 일은 아니지.
“친구관계는 어떠니? 보니까 재호랑 은범이랑 친한 거 같던데.”
“네. 학기 초라 걔들 빼곤 아직 잘 몰라요.”
그냥 의례적인 질문인줄 알았는데, 담임이 더 깊이 물어왔다.
“친구를 사귈 때 넌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는지 말해줄래?”
“...네?”
“친구 사귈 때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냐구.”
“그런 걸 신경 쓰면서 친구 만드는 사람이 있나요...?”
“있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실한 사람은 피한다거나 허세가 심한 사람은 별로라거나 성격상 말이 없는 사람은 좀 꺼려진다거나 등등.”
“그런 걸 왜 신경 써요? 기대를 안 하면 되잖아요?”
“기대?”
“네. 말씀하신 그런 사람들을 선생님이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라는 말을 뒤집어서 기대를 안 하면 꺼려지거나 피해질 일도 없죠.”
“...?”
내 인생철학 중 하나를 특별히 말해줬건만 담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나 짓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요... 누굴 만나든 기대를 안 하면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을 일이 없어요.”
“...그러면 진심으로 대할 수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실망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
“......”
대화를 이끌어나가던 담임이 말이 없자 나도 덩달아 침묵했다.
“...여자친구는 없지?”
어딘가 체념한 듯한 말투다.
“네.”
“연애를 하고 싶기는 하고?”
“아뇨.”
“...왜?”
“여자친구 사귀면 기대를 할 거 아녜요. 돈도 더 쓸테고요.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을 거 같은데요?”
“그러니...”
“네.”
“부모님이나 형제재미랑은 잘 지내고?”
진로상담이 아니라 심문 아니야 이거?
“부모님이랑은 잘 지내고요, 저 외동입니다.”
“그러냐...”
하더니
“...진짜 심각하네.”
‘그러니까 뭐가 심각하냐고. 이 멍청아!’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뭐가요...?”였다.
“생각이 심각해.”
“......”
“리한아.”
“네.”
“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뭐에 가장 가치를 두니?”
“...모르겠-”
“꿈도 없고, 연애도 하기 싫고, 사람들한테 기대도 안 하는데 말이야.”
내가 대답하고 있는데 말을 끊었다.
“다른 말로는, 무슨 낙으로 사니? 라고도 할 수 있겠지.”
“모르-”
“내가 너 나이 때도 심각했었는데 넌 그때의 나보다 더 심각한 것 같구나.”
“어떤 면-”
“넌 생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
“......”
내가 답할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서 절묘하게 계속 내 말을 끊는다.
설마 노리고 이러는 건가...?
“그런고로 너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마.”
담임의 얼굴에 어딘가 사악해 보이는 미소가 깃든다.
느낌이 좋지 않다.
“네? 어... 어떤 조치요?”
담임은 하라는 대답은 않고 실실 웃고만 있었다.
어... 이거 진짜 느낌이 안 좋은데?
김한처럼 과외라도 하는 거 아니야...?
학원숙제 하기도 귀찮은데 절대 그건 안 된다.
절대!
“저, 저기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어떻게 하면 꿈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하고 싶은 게 없습니다 선생님...”
“그래. 걱정하지 마. 널 위한 방법이 있어.”
“...여자친구도 만들고 싶-”
“그래. 방법이 있어.”
“싫어하는 인간타입도 있-”
“그래. 좀만 기다리렴.”
“......”
“잠시만 기다려줄래?”
담임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담임 맞은편이라 글씨가 뒤집어져서 뭐라고 쓰는지 보이진 않았다.
“됐다.”
볼일을 다 봤는지 휴대폰을 내려놓는 담임.
뭐야?
“너 벌점이 좀 많더라?”
“네? 네.”
“아 참. 조치를 내리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되지?”
“.......”
...만약 새로 만들어진 유행어를 사용하는 데에 현실에서의 사용 예가 필요하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담임과의 상담이 분명 쓸모 있을 거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즉 답정너의 예시로써.
“너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나이도 몇 살 차이 안 나는 게 뭐래.‘라고.”
잘 아네.
이런 생각까지 알고 있다니 역시 세대차이가 안 나.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니? 오히려 몇 살 차이 안 나니까 너희들이 나중에 후회할 걸 알고 미리 이러는 거라고.”
“후회라뇨?”
“내가 너희 나이일 때 했던 생각이 지금 네 생각이랑 정확히 똑같다고 하면 믿겠니?"
아까부터 느꼈는데, 조용히 읊조리는 담임의 말은 참 논리정연하다.
나도 한 말빨하는데 도저히 논파할 수가 없을 정도이니.
수학교사 말고 국어교사를 했어야 할 것 같은 말솜씨다.
“아, 그러셨어요?”
“그래. 그런데 난 지금 정~말 후회하고 있거든. 왜 그때 하고 싶은 걸 찾으려고 노력을 안 했을까 하고.”
아니, 공부 잘해서 교대 들어가놓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교사가 적성에 안 맞으시나 봐요?”
담임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임마, 교사만한 직업이 어딨다고 그래? 초등학교 교사만큼은 아니지만 고등교사도 신의 직장이야.”
“아 네...”
결국 우릴 생각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자기만족이라는 소리잖아.
지 후회되는 걸 왜 우리한테 풀고 지랄이야 지랄은?
“어쨌든 난 그래서 너희를, 특히 널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왜 하필 전가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빈칸으로 낸 게 너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생각이 고딩 때 나랑 비슷해.”
“......”
빈칸이 나밖에 없다고?
거짓말쟁이 놈들.
하고 싶은 일 없을 게 뻔한데, 감히 억지로 뭔가 적어서 내?
‘진로상담서’라는 작은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 사회엔 거짓과 날조가 판친다.
이런 썩어빠진 학생들의 정신세계를 고쳐야 우리나라가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갈 텐데, 멍청한 놈들을 봤나.
그리고 이 아저씨는 생각 비슷하다고 지금 하기 싫다는 학생한테 억지로 이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기요 아저씨, 성격이 다르잖아 성격이!! ...키도 다르지만.
“양자택일해.”
담임이 질문을 툭 던졌다.
“...뭘요?”
“하라는 거 할래 말래?”
“안 하고 싶은데요.”
“자, 그럼 선택지를 제시해주도록 할게. 1번은, 방학이든 학기 중이든 골라서 너가 쌓은 벌점만큼의 봉사활동을 가는 거야. 농사나 양로원 같은.”
“안 하는 건 없-”
“안 하는 건 없어.”
“......2번이요.”
안 들어봐도 1번보다 나을 거라는 건 뻔하다.
담임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무조건 시킬 거 같은데 따지다가 나만 손해 볼 바엔 그냥 하는 게 나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