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선택이야. 너가 고쳐야할 게 좀 많은 거 같지만, 일단 2번은 꿈 찾기였어. 하하.”
“......”
어이가 없네.
내 황당하다는 표정을 무시하는 건지 못 본건지 담임이 계속했다.
“그럼 이제 한 번 더 선택의 시간. 방학 동안 찾을래, 학기 중에 찾을래?”
‘방학에’도 아니고 ‘방학 동안’?!
이런 젠장.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가뜩이나 한 달도 안 되는 방학인데 여기서 뭘 더 시킨다는 거야?
내 한 몸 쉬기도 모자란데.
“......안 하면 안돼요?”
“안 하면... 다시 1번으로 가는 거지. 곧 닥칠 무더위에 땀도 흘리고 참 좋겠지?”
담임은 악마 같은 웃음을 지었다.
강아지상의 선한 얼굴이 순식간에 지옥개 켈베로스가 됐다.
이래서 벌점을 물어본 거구만.
타천사 루시퍼 같은 놈.
“......곧 찾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선생님.”
“그래? 뭔데?”
“......그건 아직이지만...”
“잔말 말고 빨리 고르기나 해.”
하더니
“학기 중이야, 방학이야?”
최후통첩을 날려왔다.
“무, 무슨 일을 하는 건데요?”
“학기 중엔 머리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는 일이고, 방학 때 하는 건 몸으로 여러 경험을 하는 거야.”
......아마 안 한다는 선택지는 절대 없을 거 같은데 기왕 할 거면 머리로 하는 게 낫겠지. 괜히 공부 못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할 거라는 게 아니니까.
“학기 중이요...”
“잘 생각했어.”
담임은 싱긋 웃으며 노트북 옆 노트를 한 페이지 찢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쓱 적고 내밀었다.
“여기 가봐.”
쪽지를 보니 별관 4층. 학생상담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서 상담 받으면 되는 건가요.”
제 상태가 전문가한테 상담 받을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아니. 가면 알려줄 거야. 오늘 상담은 끝.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게.”
“....언제까지 하면 되는데요?”
내 물음에 담임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말했잖아?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
젠장.
“아 참, 적극적으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실장의 판단 하에 봉사를 그냥 시킬지도 모르니까.”
뭘 하는지는 안 알려줄 건데 열심히는 해라?
안 그러면 땡볕에 농사나 시킬 테니까?
실장은 또 누구야.
“......예.”
“아! 마지막으로.”
사악한 웃음을 짓던 담임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만약 꿈을 찾게 되면 그때부턴 안 해도 돼. 넌 꿈 찾으러 여기 가는 거니까. 물론 내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아하하.”
“아, 네......”
18년 동안 없었던 게 갑자기 생기겠냐고... 하는 눈으로 담임을 봤지만 할 말 다 했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영 찝찝한 마음으로 상담실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바로 집에 가고 싶지만, 사내가 한 번 약속한 이상 가보라고 하니 가봐야겠지...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해보다가 못해먹겠으면 적당한 거 찾아서 ‘이게 제 삶의 낙입니다’하면 되니까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억지로 과외받으면서 성적 스트레스 받는 것보단 이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했나.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본관과 별관의 연결통로로 이동한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인 별관엔 동아리방들이 모여 있다고 들었다.
설마 상담동아리 같은 건 아니겠지?
담임이 준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걸 후회한다, 라고 했었지... 사실 내가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데 뭔가 좀 억울하네?
그냥 남들처럼 살다보면 인생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경쟁에 달려들게 되는 게 요즘 세상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적당~히 살게 되리라는 건 안 봐도 뻔하다.
나에게는 특별한 삶을 살 만한 재능도, 재력도, 재수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삼재다.
난 남들보다 조금 더 당당했을 뿐인데 이런 형벌을 내리다니.
점점 붉어져가는 해를 보며 걷다보니 그 쪽지에 적힌 곳에 도착했다.
본관 6층에 따로 상담실이 있는 걸로 아는데. 한 학교에 상담실이 두 개라니 신기하네.
상담실들은 찾아오는 학생들이 없어서 운영이 잘 안된다고 들었는데.
똑똑
두 번 노크를 한 뒤 조용히 기다렸다.
“들어오세요~”
청아한 여자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울려줄 만한 맑은 목소리다.
사악한 담임의 마수를 정화시켜 줄 것 같은 느낌이다.
기분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드르륵
원탁의 기사에 나올 법한 큰 타원형 책상에 거기 앉은 여자애 하나.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미모를 재보게 된다.
어깨까지 오는 갈색의 웨이브 머리에 새하얀 피부, 훤히 드러난 깨끗한 이마.
크고 짙은 쌍꺼풀의 눈에 또래답지 않아 보이는 맑고 깊은 눈동자, 적당히 높은 코.
미인이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면 무조건 들어갈 만한, 만약 누군가가 안 된다며 감히 어이없게 평가한다면, 그 놈을 한 대 후려치고 경찰서에 끌려가도 ‘난 후회하지 않아.’ 하고 만족스럽게 연행될 만한 외모다.
흔히들 말하는 고전적인 미인상이라고 해야 하나?
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야말로 주변이 화사해지는 듯한 미소.
“저기요?”
내가 얼타고 있자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한주석 선생님이 보내신 분 맞죠?”
“네. 어떻게 아시는지...?”
소녀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내 톡을 보여줬다.
아기자기한 스킨이 눈에 띄었다.
“아~”
아까 담임이 톡 보낸 사람이 얘였구만?
“어... 5분 뒤에 남자애 하나가 내려갈 건데, 당분간 상담에 참여시키도록. 이라고 왔어요.”
“......상담이요?”
“네.”
“...전 상담할 줄 모르는데요.”
“괜찮아요.”
“......”
“선생님이 그쪽이 여기서 저랑 같이 상담일하는 걸 원하시니 해야 해요. 저도 하라는 대로 해야 하거든요. 아하하.”
소녀는 천진난만하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네...”
“실례지만 몇 학년이세요?”
“2학년이요.”
“어! 저도 2학년인데. 말 서로 편하게 할까요?”
“아, 네. 아니, 그래.”
어버버거리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또 “아하하.”
“동갑인데 뭘 어른 대하듯이 대하니? 난 1반 한여름이야.”
“11반 서리한이야.”
이런 걸 두고 통성명 시간이라고 하는 건가?
친밀함에 비례하지 않는 대화의 진전 속도에 살짝 당황스럽다.
만약 이 한여름이라는 소녀가, 아니지. 소녀는 좀 오글거린다.
2010년대에 한 여성을 지칭하는 데에 소녀라는 말을 쓰다니.
어쨌든 소녀든 뭐든 내 앞의 애가 특출하게 예쁘지 않았다면 아마 평소처럼 말이 막 나갔을 거다.
(예쁜)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역시 속담에 틀린 말 하나 없다.
“11반인 건 알고 있었구, 방금 내가 얘기했듯이 여기서 날 도와주면 돼!”
“널? 상담선생님을 도와줘야지 왜 널 돕는 건데?”
어디 있을지 모를 상담선생님을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음... 그걸 설명하기 전에!”
“전에?”
“방학하기 전까지 거의 매일 볼 텐데 잘 지내보자.”
손을 내밀어왔다.
“으...응.”
떨떠름한 상태로 잡는 나.
떨떠름의 원인은 얘의 친한 척이다.
악수를 하면서 눈앞의 한여름을 가만히 응시해본다.
인간관계는 우물과 같아야 좋다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이런 애를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인간관계가 태평양마냥 넓으면 더 많은 사람에게 기대를 하게 된다.
기대가 크면 그 기대가 어긋났을 때의 실망도 자연스럽게 커진다.
그러다보면 그들에게 상처받게 되는 건 누구냐, 나다.
그런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기대를 하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철저한 인간관계 설정이다.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을 사귈 때 검증된 소수를, 좁고 깊게 사귀어야 좋다는 게 내 인생철학 중 하나다.
마치 우물처럼.
난 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얘는 태평양스타일인가 보다.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건가?
“그래서, 한주석 선생님이 왜 보내신 거야?”
“...어떻게 된 거냐면.”
난 한여름에게 조금 전 있었던 담임과의 일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아주 객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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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거야.”
“으음...”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꿈이 없어서 오게 됐다는 거지?”
“응.”
“요즘 애들이 꿈이 없긴 하지...”
한여름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뭔가 초연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
동갑주제에.
“넌 있나봐?”
“꿈 말이야?”
“응.”
한여름은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쫙 펴고 턱을 살짝 들었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드러나던 가슴윤곽이 더 부각됐다.
이런 건 좋군.
“당연히 있지.”
“뭔데?”
한여름은 대답 대신 밖의 팻말을 가리켰다.
“학생상담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한여름.
“아, 상담사야?”
“응.”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게 있었네.
쥐뿔도 없이 나한테 꿈 없다고 훈계질 하던 건 아니었군.
꿈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상위등급이라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보편적인 사회통념은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분위기이긴 하다.
지금 한여름의 얼굴에 떠오르는 자부심은 그런 측면을 고려한 결과겠지.
“그래? 왜 하고 싶은데?”
“난 예전부터 친구들 고민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상담’이라는 걸 참 많이 해왔거든. 그러다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상담사를 내 직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야. 아마...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 어쨌든! 그때까진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좀 놀았는데 상담사를 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더라구. 그래서 그걸 알고 나서부턴 공부도 많이 하고 이 직업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아봤거든.”
요즘 같이 큰 강 따라가는 세대에 작은 줄기를 개척해나가는 이런 애는 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을 받는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젊음이니 뭐니.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 같긴.
그런 걸 알아볼 시간에 수학문제 하나를 더 푸는 게 미래에 이로울 확률이 더 크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근데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거야. 난 당장 하고 싶은데. 그리고 또 내가 상담사를 하고 싶다고 해도 막상 하게 되면 생각보다 나랑 안 맞을 수도 있잖아?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있으니까 좋은 거라는 말도 있구, 다른 게 하고 싶을 수도 있겠더라구. 그래서 미리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교무실에 상담실을 열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수락해주셔서 이걸 하게 된 거야!”
“......아, 그래.”
““......””
긴 희망고백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근데 너.”
“응?”
“상담사 실정은 아는 거야? 심리치료사는 잘 모르겠는데 청소년 상담사는 상담 수요가 너무 없어서 고민이라는 기사를 봤던 거 같은데.”
“당연히 알지. 공부 많이 했다니깐.”
“그럼 처음부터 청소년 상담사 말고 심리치료사를 목표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가 너 굶어 죽을 지도 몰라. 사람이 안와서.”
내 말에 한여름은 한 소리 하려고 할 때의 엄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