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전... 꿈이 없거든요. 그런데......”
또 꿈이냐...
그놈의 꿈.
이제 꿈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한여름 몰래 공부를 한다는, 약간의 미안하던 마음도 사라졌다.
미련 없이 공부를 할 수 있겠군.
그 마음 그대로 안고 이어폰을 착용했다.
계속 문제를 풀고자 이어폰을 껴서 그런지,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 할 일은 끝난 거 같으니 마음 편히 문제를 풀어도 될 것 같다.
쉬는 시간 10분도 지났으니 다시 열심히 풀어볼까.
수학문제 풀 때 듣는 클래식 음악을 재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의 대화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됐다.
수학문제를 풀 때의 좋은 점은, 문제에 빠져들 때면 자연스럽게 주변의 잡소리들에게서 멀어질 수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문제에 몰입하게 된다.
이렇게 뭔가에 몰입할 때의 기분은 참 좋아서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몰입에서 벗어날 때면 상쾌하고 뿌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이 문제들을 푸는 건 아니고 학원 숙제일 뿐이지만, 몰입의 즐거움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때의 기분도 상쇄시켜줄 만큼 좋다.
“...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30초 정도만 있으면 다 풀 거 같아서 “잠깐만.” 하고 다시 풀어보려 했지만 옆에서 쿡쿡 찔러대는 통에 집중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어폰을 뺐다.
b형 4점짜릴 풀다가 방해받아서 그런지 차가운 대답이 절로 나갔다.
1반이면 문과반인데, 문과가 b형 4점을 깔끔하게 풀었을 때의 기분을 알기나 할까?
“뭐야?”
“이분이 하신 얘기 말이야. 너 설마... 아예 안 들은 건 아니지?”
한여름이 도끼눈을 뜨고 날 흘겨봤다.
날 보는 한여름의 눈동자가 ‘문제 푸는 건 알고 있었고, 만약 여기서 대답 이상하게 하면 논밭으로 보내버려 줄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그래? 뭐라고 하셨는데?”
“꿈이 없다며.”
“그 다음은?”
“음...”
......
그 다음부터는 들은 게 없어서 그런지 할 말이 딱히 없네.
다음을 부탁한다는 의미로 한여름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이분 말 다시 들어봐.”
“그래.”
한여름이 난처하다는 얼굴을 지었다.
“소은씨. 정말 죄송한데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럼요.”
정면을 보니 내담자, 안소은이었나...는 우리 쪽을 생글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왜 오신 거예요?”
“저, 꿈이 없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꿈을 가져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어요.”
“아, 네.”
사정을 들은 난 한여름을 쳐다봤다.
“끝이야?”
“응.”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하아......”
한여름이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뭔가가 답답한가 보다.
“꿈을 가지는 게 좋을지, 아닐지 우리의 생각을 듣고 싶으시대.”
“음......”
말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이름은 알아둬야 할 거 같아서 손을 내밀었다.
“서리한이라고 합니다...”
고등학생끼리의 대화에 이런 말투라니 적잖이 오글거리지만 달리 할 말이 없기에 할 수 없다.
“안소은이라고 합니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아주는 안소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알았지만 바로 앞에서 마주보니 역시 예쁘다.
맑디맑은,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모양 좋은 눈썹, 오똑한 콧날에 적당히 붉은 앙다문 입술.
이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박힌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는데, 느닷없이 안소은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씨, 깜짝이야!”
“...?” “왜 그래?”
“아, 아냐.”
갑자기 몸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꿈 말이에요 소은씨?”
“넵.”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한여름은 지금까진 볼 수 없었던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안소은을 대하고 있었다. 나름 진지하게 이 일을 생각하고 있다, 이건가?
“얼마든지요! 헤헤.”
그리고 안소은은, 방금 처음 본 사이에 이런 생각하기 좀 그럴 수도 있지만 조증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밝다.
천진난만한, 하얀 도화지 그 자체.
이런 애는 내 18년 인생에 처음이다.
“소은씨는, 왜 꿈을 찾을지 말지 고민하게 된 거예요?”
“으음....... 좀 부끄러운데...”
웬일로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모으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 딴에는 수줍은 사항인가보다.
“아, 말하기 그러시면 굳이 말해주실 필요 없어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요...”
안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시작했다.
산만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서.
“...그... 드, 드라마 같은 데에 고등학생들 나오잖아요...”
“네.”
“거기서 그 사람들이 막 꿈 찾아가고 그러는 거 보면 쫌 부럽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헤헤... 부끄럽네요 이거...”
내뱉는 고백의 음성은 점점 작아져, 마지막의 “원래 이런 성격 아닌데...”는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셨구나... 근데요 소은씨.”
“네?”
“그럼 그냥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도 됐을 것 같은데 왜 고민하시게 된 거예요?”
“음... 그건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지금 다 공부만 열심히 하고 꿈같은 건 대학가서 찾아도 안 늦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거 듣고 나니까 그럴 듯하기도 하고 해서요.....”
“다른 이유는 없구요?”
“또...... 제 친구들은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그러는데 저 혼자 꿈 찾겠다고 설치다가 뒤쳐져서 인생 망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기는 싫은데... 근데 그래도 꿈은 찾고 싶고 그래서요...”
보니까 지 얘기 할 때는 남들처럼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 외에 다른 얘기는 몽땅 다 조증 걸린 것처럼 말하는 애인 것 같다.
“인생이 망하다뇨 소은씨!”
한여름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평소엔 차분한 애가 왜 꿈 얘기만 나오면 열정적이 되냐...
“네?”
“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훌륭한 일이에요. 그런 일을 하는데 인생이 망할 이유는 없죠!”
“그런가요...? 사실 제가 원래 쫌 와리가리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선배 말을 들으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저희보고 결정해달라고 온 건가요?”
내가 불쑥 끼어들자 순간 흠칫하는 게 보였다.
나쁜 사람 아니니까 진정하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반응 보이면 상처받을지도 몰라...
“깜짝야. 헤헤. 아뇨!! 결정해달라는 건 당연히 아니죠~ 제 인생인 걸요! 그냥, 제가 결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하더니,
“...그래서 두 분은 제가 꿈을 가지는 게 좋다고 보세요, 아님 지금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좋다고 보세요?!”
““당연히...””
한여름과 내 입이 동시에 열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온 대답은 달랐다.
“가지는 게 좋죠.” “공부하는 게 낫죠.”
“오~ 두 분이 생각이 다르시네요!”
“그러네요...”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날 쳐다봤다.
질세라 나도 똑같이 해줬다.
“그러게...요”
“근데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내 질문에 눈을 말똥 뜨는 안소은.
“말 좀 편하게 해도 될까요? 좀 불편해서...”
“그럼요!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헤헤.”
“아, 감사합니다. 아니지, 고마워.”
...?
옆에서 냉기가 느껴져서 옆을 보니 한여름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아냐.”
음, 안소은이 환자처럼 보여도 명색이 내담자인데 말을 놓겠다고 해서 그런 건가 설마?
하긴, 감기로 동네병원에 갔는데 거기 의사가 반말 찍찍 해대면 기분이 팍 나빠지긴 하지.
그래도 내로남불이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막상 이런 상황에 닥치니 불편하다.
불편한 건 고쳐야지.
“...”
이런 생각을 하느라 여자들이 날 동물원 원숭이 보듯 보는 줄도 몰랐다가, 대화가 일정 시간동안 멈춰있자 그때 알았다.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얘기 듣는 게 좋을 거야..”
날 포기라도 한 건지 별로 반응이 없었다.
눈빛을 보니 이러다가 진짜 35도 땡볕에 농사하러 가게 생겼네.
열심히 해야지.
“얘기마저 하죠.”
한여름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영업용으로 추정되는 미소와 함께.
.......뭐야
지난 일주일 동안 본 한여름의 미소보다 안소은이 들어오고 나서 지어보인 미소의 횟수가 훨씬 많은 거 같다.
나한테는 안 보여주더니 지금은 아낌없이 방출하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고.
혹시 걸크러쉬를 유도하기 위한 동성전용웃음인가?
“아, 네. 그래서 여름선배...? 는 꿈을 갖는 거에 대해 찬성하시고 리한선배...? 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
“그렇죠.” “그렇지.”
“꿈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특히 요즘 세상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초롱초롱.
반짝반짝.
안소은은 진짜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리액션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참 말할 맛나네.
방긋 웃어 보이는 안소은을 보고 있자니 뭔가... 태양 같은 느낌이다.
여자의 웃음은 나라를 살린다고 했던가.
그 덕에 상담실도 한층 더 밝아 보였다.
“당연한 거 아냐? 요즘 세상에 꿈 있는 애는 별로 없지. 왜냐하면.”
평소라면 말을 잠깐 끊고 할 말을 생각할 타이밍이다.
혹은 말의 호흡을 조절하면서 다음 말을 생각하거나.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왔다.
술술.
“너네도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능을 위한 공부를 시키는 곳이잖아?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 일산만 하더라도 교육열이 장난 아닌 거 알지? 하고 싶은 게 생기려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하는데, 입시공부만 하는 애가 어디서 경험을 쌓겠냐.”
“우와...”
안소은이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이런 고급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데, 놀랄 법도 하지.
“...오빠, 아니 선배? 뭐라고 불러야 되지... 어쨌든!” “상담사 오빠요.”
한여름이 끼어들었다.
“베베 꼬이셨네요... 선배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한여름의 조언을 씹으면서 말을 마치고는 “헤헤.” 하고 웃어댔다.
“...뭐?”
아니, 기껏 좋은 말 해줬더니 이딴 식으로 답을 하고 앉아있어? 이런 건방진...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제가 적당히 걸러들으면 되니까요! 헤헤.”
...같은 어이없는 소리나 해댄다.
“얘한테 신경 안 써도 돼요. 억지로 끌려와서 앉아있는 거니까.”
내담자한테 말을 씹혀서일까?
말하는 한여름의 말투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끌려와요? 왜요?”
안소은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꽉 끼게 입은 와이셔츠가 자극되어 더 색기 있어 보이는 걸 알고 하는 짓일까?
가슴은 작아 보이지만.
한여름은 궁금해 하는 안소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설명은 당사자인 내가 듣기에도 꽤 객관적인 훌륭한 설명이어서 나름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