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난 무작정 꿈 찾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그저 지금 교육시스템 및 사회시스템 상으로는 살기 불리하다는 것뿐이지.”
“어... 어떤 면에서요?”
안소은은 또 혹했는지 얼굴에 물음표가 써져있다.
보니까 내 말을 듣고 난 직후엔 ‘꿈을 찾는 게 손해인가...?’하고 한여름 말을 듣고 나선 ‘역시 꿈을 찾아야겠어!’하는 거 같은데.
“너, 진짜로 갈팡질팡하네.”
“하하... 네. 여자는 갈대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쪼끔 그래요....”
말은 역시 “헤헤헤.”로 마무리됐다.
“둘 다 병행할 수 있어. 잘 들어보렴. 쉬는 시-”
“아!!”
“......!”
아씨. 뭐야?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했네.
한여름도 놀랐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꺅! 깜짝이야. 소은씨, 왜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뭘?”
“두 분이 지금 의견이 안 맞으시잖아요?! 완전 정 반대이신 것 같은데.”
“그렇죠.”
“근데 제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요!”
“응?”
“제가 궁금해 하는 주제에 대한 두 분의 생각을 말씀해주시면 제 진로에 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어...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토론이라도 하라는 거야?”
안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사실 제가 여기오기 전까지 고민을 되게 많이 했거든요. 열심히 꿈을 찾아보는 게 나을지 그냥 공부나 하는 게 나을지요.”
“네.”
“근데 혼자서는 도저히 결론을 못 내리겠는 주제가 몇 개 있더라구요!”
“아~ 그런 주제들에 대한 우리 의견을 듣고 싶다?”
힘차게 안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넵. 그래주실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들은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난 괜찮은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음...... 잠깐만.”
흐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얻게 될 것은?
바로 답이 돌아왔다.
과도할 정도로 낙관적인 한여름을 짓밟아줄 수 있을 거다.
좋다.
이 이유라면 아주 좋아.
“나도 좋아.”
나까지 동의하자 안소은이 결론을 지었다.
“제가 이렇게 못 믿음직해보이고 와리가리해도 나름 객관적이거든요. 두 분 다 소신이 있는 분들인 거 같으니까 저한테 많이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아니에요 소은씨~ 당연히 이렇게 해드려야죠.”
“감사합니다~ 헤헤. 여기 오기 참 잘한 거 같아요!”
“정말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한여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주변까지 밝게 해줄만한 환한 꽃이 폈다.
“그럼, 난 간다.”
“잘 가렴.” “안녕히 가세요!!”
드르륵
작성할 게 있다고 한여름은 안소은을 불러 세웠고, 난 먼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오늘 처음 본 사이끼리 참 많은 얘기를 한 거 같아 기분이 약간 거시기하다.
보통은 서먹서먹하게 조금씩 얘기해가는 게 정상 아닌가...
그래도 결론은 마음에 든다.
지난번부터 한여름 태도가 뭔가 거슬렸는데 이 기회에 처참히 밟아줘서 생각이 바뀌게 해줄 기회를 줬으니까.
아주 따끔하게 세상이 무섭다는 걸 알게 해줄만한 기회다.
반복되는 일상은 역시 빠르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안소은의 두 번째 상담일이 됐다.
난 한 번만 하면 되는 건줄 알았지만 또 온단다.
상담은 웬만하면 장기간에 걸쳐 해야 하는 거라나 뭐라나.
“지난번엔 간단한 얘기만 나눴으니까, 오늘은 좀 더 건설적인 대화를 해보도록 하자.”
“넵!”
“...그래.”
한여름이 다리를 꼬았다.
살짝 말린 치마 아래로 드러나는 그 새하얀 각선미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충분히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소은씨, 오늘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를 해보죠.”
“네!”
“잠깐만.”
“왜요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니가 꿈을 가지는 쪽으로 생각을 한다고 해보자.”
“네? 네.”
“내가 한 번 선택의 가짓수를 줄여줘 볼게.”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얜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야?
“어디 보자... 너, 연예인 하고 싶어?”
“어... 하면 좋겠지만 딱히 엄청 하고 싶거나 하진...”
“그럼 만화나 소설 작가는?”
“그건 별로 하기 싫어요.”
“기타 예체능 쪽은? 음미체는 이미 늦었고.”
“음... 별로 끌리지는...”
“그럼, 공부나 해.”
“예에?”
안소은은 마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곳에 힘들게 가서 땅을 팠는데 아무것도 없는 걸 본 도굴꾼 같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요? 왜요?”
그 세상 다 산 듯한 얼굴에게 완벽한 답변을 해주었다.
“왜냐하면, 저것들을 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업은 공부만 잘 하면 할 수 있으니까.”
난 한여름을 가리켰다.
“상담사 일을 미리 해보고 싶다고 설치는 얘가 특이한 거지, 사실 상담사도 공부만 잘 하면 할 수 있어. 자기한테 맞는 일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설치다니. 죽을래?”
바로 앞에 도끼눈을 뜬 한여름이 날 살벌하게 쳐다봤다.
“그럼 설치는 거지,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그럼 뭔데?”
“하고 싶은 걸 미리 해보는 거지! 말해줬잖아? 나한테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하게 됐다고!”
그러더니 분이 덜 풀렸는지 한 마디 더 했다.
“금붕어도 아니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멍청이.”
“뭐?”
우리 부모님을 욕하는 거면 몰라도 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본격적으로 박살을 내주려는데 안소은이 끼어들었다.
“저기...”
“응?”
“차지가 무슨 뜻이죠?”
엥?
“어... 제외한다고.”
“아~ 말을 어렵게 하시네.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긴 하네요!”
“......”
뭐지...?
“너도 몰랐냐.”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여름에게 묻자,
“...모를 리가 있니.”
‘지금 장난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수치스러운 질문은 삼가줄래?”
“수치스럽다니... 그 정돈 아니거든?”
간단히 받아쳐주고 안소은에게 말꼬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너, 공부 못하지?”
“예?!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별건 아니고, 공부 말고 딴 거 하겠다는 애들이 보편적으로 공부를 잘 못하더라고.”
“별거 맞는 거 같은데요... 그건 성급한 일반화죠!!”
“니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도 알아?”
말하면서 한여름 쪽을 슬쩍 보자 ‘죽을래?’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아... 너... 남 무시하는 경향이 좀 있는 거 같네. 고쳐주지 않을래?”
옆에서 “맞아요!!” 하면서 안소은도 동조했다.
“무시라니. 기초상식은 알고 이러는 건지 궁금해서 그런 거야. 내 행동으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다면 사과할게.”
“그런 미안한 마음이 쥐꼬리만큼도 안 느껴지는 사과는 필요 없단다...”
어떻게 알았지... 신기하네.
“어쨌든, 공부 못하지?”
“아... 아니거든요?!”
안소은이 펄쩍 뛰었다.
“몇 등인데?”
잠시 멈칫하더니,
“...298등이요...”
“1학년이 총 몇 명인데요?”
“320명쯤이요......”
“반에서 뒤에서 세 번째 정도 되네. 그치?”
“......네에.”
기가 죽은 목소리로 안소은이 대답했다.
“소은씨.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요~ 공부가 적성이 아닌 거겠죠.”
“그...그럴까요...?”
“그럼요~”
기운을 다시 차리게 하기 위함인지 한여름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한여름이 나긋나긋하고, 착하게 말해주니 안소은은 다시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사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인지 딱히 집중도 안 되고 안 하게 되더라구요... 헤헤.”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럼?”
“잠시 동안의 도피처지.”
“도피처요?”
“어. 머리로는 공부를 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안 따라주고, 그게 계속되는 거야. 의지가 모자라달까?”
“......”
“...그게 오래 지속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합리화하는 거지.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아직 못 찾았어. 그래서 공부를 못 하는 거야. 꿈만 찾으면 그때부턴 잘할 것 같기도 한데... 꿈 찾다가 인생 망하면 어떡하지...?’라고.”
“...너어.”
말을 듣는 한여름과 안소은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근데 실제로 진짜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은 거의 안 그러거든. 반 1등이 맥락 없이 ‘나 꿈 찾을래. 그때까지 공부 안 해.’ 이런 거 본 적 있어? 그냥 넌...”
“...의지박약이야. 공부하려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가 모자란 걸 괜히 꿈이 없다고 탓하는 거고.”
“......흑.”
안소은은 아무 말도 안 한 채 울먹이기 시작했고, 그런 안소은을 본 한여름이 “얘.” 하며 말을 걸어왔다.
열 받은 듯 볼이 상기돼 있었다.
야, 야. 왜 니가 열 받고 난리야.
“지금 소은씨가 의지가 부족해서 공부 못 하는 걸 합리화한다는 거야?
“요약하자면 그렇지.”
“너가 몰라서 그렇지 공부가 적성이 아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그런 사람도 분명 있겠지. 근데 그런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공부를 못 해서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알 게 뭐야?”
“아니, 네 말은 틀렸어. 오늘부터 소은씨가 그걸 보여줄 거야.”
“뭐?”
말없이 침통한 표정만 하고 있는 안소은에게 한여름이 말을 걸었다.
“소은씨.”
“...네?...... 훌쩍.”
“이 나쁜 놈 말이 너무 심했죠?”
“......아뇨. 일리 있는 것 같은데...훌쩍... 그냥... 뭔가 슬퍼서요.”
“소은씨도 이 나쁜 놈이 말하는 것처럼 본인이 공부 못 하는 걸 합리화하려고 여기 온 거 같아요?”
“......아니요.”
“전 소은씨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이유를 찾으려고 여기 왔다고 생각해요. 물론 결국에는 남들 하듯이 다시 수능공부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요. 그렇지 않아요?”
안소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그것보다 한여름 너, 방금 한 문장에 ‘찾을’을 두 번 썼다는 거 알고 있냐....
“그럼 오늘부터 그걸 증명해보는 건 어때요?”
본인이 ‘찾을’을 몇 번 썼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지 한여름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요...?”
“오늘부터 저랑 같이 공부해요.”
“네...?”
“저놈한테 소은씨의 의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난 공부를 이렇게나 잘할 수 있지만 적성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동안 안한 것뿐이다!’ 이렇게요. 중간고사를 잘 봄으로써 의지를 보여주고 본격적인 적성을 찾는 거죠.”
“...그럼, 제가 궁금해 하는 주제들은요...?”
“그것도 하구요! 어때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냐...
“......”
안소은은 훌쩍이던 걸 멈추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돌연 내 쪽을 보더니,
“그럼, 내기해요.”
“무슨 내기?”
“제가 의지박약인지 아닌지 내기해요.”
내기?
친구들이랑 축구나 야구를 보면서 오천 원씩 거는 건 재밌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랑 해본 적은 없는데...
날 쳐다보는 안소은의 눈을, 작고 동글한 얼굴에 박혀 있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응시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 내가 그렇게 나쁜 짓 한 건 아닌데.
나쁜 짓은커녕, 맞는 말 한 것뿐인데.
죄인이 된 기분이다.
뭔가 억울하군.
할 수 없지.
“좋아. 뭐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