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러니까 니 말의 요점은 내가 너무 큰 갈래만 보고 있고... 사실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큰 갈래가 아니라 생활 속 삶의 의미라는... 거야?”
“꿈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렇지. 꿈이 있으면 그걸 위해 노력하면서 살면 되지만. 너가 말한 대로라면 삶이 그렇게나 힘든데, 뭔가 있어야하지 않겠어? 그 힘든 삶을 버틸 뭔가가.”
“...그런 거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난 불행해보여.”
“...왜.”
“꿈도 없고, 꿈 대신할 삶의 의미도 없고.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살아가겠어?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거잖아...”
“...그러면, 꿈 없이도 삶의 낙을 찾으면 괜찮다는 거야? 취미생활이든 뭐든?”
한여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말, 니가 지금까지 했던 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말이라는 거 알고 있냐?”
“응?”
“꿈 없으면 생활 속 삶의 낙으로 살면 된다며? 그러면 평범하게 살면서 낚시나 하면 되겠네?”
“......”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나 이제? 드디어 승리한 것인가?!
항복선언을 기대하며, 상담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온 대답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전혀.
“너 정말...”
“왜.”
“왜 그렇게 이기지 못해서 안달이야?”
엥?
“뭐가?”
“왜 그리 매사에 이기려고 그렇게 애를 쓰냐구.”
“...당연한 거 아냐?”
“그게 당연한 거니...?”
“당연하지. 경쟁사회잖아?”
난 한여름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지만, 내 앞의 여자애에게서 내가 바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해야 한다.
세상은 내가 지금부터 말할 문장을 요구하고 있으니까.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조심스럽게 열어, 입안에 담겨 있던 문장을 꺼낸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많이 이겨봐야 앞으로 있을 경쟁들에서 이길 수 있을 거 아냐.”
말을 하는 동안의 내 눈은, 시종일관 한여름의 입술에 박혀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잘만 봐왔던 한여름의 눈을, 이 말을 하는 동안에는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게 안소은의 상담을 끝내고, 별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하교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학생들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아직도 대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는 축구에 미친 놈들은 빼고.
“선배~”
조금이라도 집에 더 빨리 가기 위해 서둘러 가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선배라고 부르는 애는 한명밖에 없다.
몸만 살짝 돌려보니 역시나 안소은이었다.
나와 5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조깅하듯 천천히 뛰어오고 있었다.
설마 나랑 같이 가려고 오는 건가...
좀 더 빨리 가야겠군.
발걸음을 재촉했다.
“......”
자,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만약 안소은이라고 해보자.
저~기 앞에 혼자 가는, 알게 된지 얼마 안 된 어색한 선배가 있다면?
그렇다면 먼저, 거리가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도록 보폭을 맞출 거다.
행여나 뒤를 돌아봐서 나를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하고.
만약 뒤돌아서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끔찍하게 어색하겠지.
만나서 할 얘기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그냥 안녕히 가세요~ 한다고 해도 서로 불편할 테니까.
그러니까 역시, 그냥 모른 척하고 발걸음 맞춰 각자 갈길 가는 게 최-
“선배!! 왜 그냥 가는 거예요?!”
고다.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오자,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넌 줄 몰랐어.”
“거짓말하지 마요. 저인 거 알았잖아요.”
돌아보니 입이 댓발이나 나온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소은이 보였다.
“진짜 몰랐다니까?”
“...치. 눈까지 마주쳤으면서.”
안소은이 중얼댔지만 너무 작게 말해서 그런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아녜요.”
“.....한여름은?”
“언니는 문 잠그고 가신 대요!”
“그래? 너 집은 어딘데?”
“저어~기 살아요 저!”
안소은은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학교 바로 옆이라 지각할 때마다 항상 부러운 곳이다.
“집 가까워서 좋겠네. 지각할 일은 없을 거 아냐.”
“네. 선배는 어디 사는데요?”
“난 버스타고 가야돼.”
“아, 그래요...? 힘드시겠네.”
“응.”
“...몇 분 걸리는데요?!”
“걷는 거까지 합치면 40분.”
“우와. 대단해요!”
“으, 응.”
“...헤헤.”
““......””
‘헤헤.’를 끝으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이래서 같이 가기 싫었다니까...
할 말이 뭐가 있다고...
그런데 안소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선배.”
“...응?”
“선배는 어떻게 살아오셨길래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거예요?”
“어떤 생각?...아. 꿈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거?”
“그것도 그렇구, 선배는 그냥 만사에 다 부정적인 사람인 것 같아서요.”
“뭐래? 그건 아니거든?”
날 뭘로 보는 거야.
곁눈질로 쓱 안소은을 보니 특유의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고 있다.
‘그럼, 왜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냥, 살다보니까 이렇게 됐어.”
“...그래요? 그래도 너무 비관적인 거 같은데...”
“너무 긍정적인 것보단 차라리 부정적인 게 낫지.”
“왜요?”
“너무 긍정적인 태도로 살다가 나중에 실패하면 어쩌려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야.”
“아, 네...”
““......””
다시 말 한 마디 없는 어색한 상황이 됐지만, 다행히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휴. 대화 사이에 공백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다.
“난 여기서 간다.”
“넵! 내일 봬요~”
“그래.”
안소은은 애처럼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철부지 어린 애 같은 모습이 귀엽긴 하네.
점점 작아져가는 안소은을 보면서 버스를 기다린다.
참 이상한 애다.
어색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랑 여기까지 같이 온 이유가 뭐지...?
“......”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역시 우물이 태평양을 이해할 수는 없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버스가 왔고, 집으로 가는 길.
아까 나눈 대화들을 되짚어본다.
꿈이 없다면 뭘 보고 살아야 하나.
이 말을 뒤집어보면 안소은이 생각하는 꿈의 무게를 알 수 있다.
딱히 뭘 보고 살아야 하나? 그냥 살면 되지.
물론 꿈이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은 엄청 많을 거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시기로 20대를 꼽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난 뭘 하면서 살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할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은 그냥 흘러가는 구름이라고 생각한다.
꿈 없어도 어차피 뭔가 하게 되어 있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꿈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왔던 길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권한다.
왜냐? 본인들이 그렇게 살아보니 그게 편하니까.
노인들에게서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오래 산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인생의 진리가 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게 편하다.
어찌 보면 정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라는 걸 착실히 따르는 게 정상적이라면, 인생을 결정할 시험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꿈 찾겠다고 그렇게 용쓰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이다.
편하게 사는 길을 놔두고 왜 그리 시간낭비를 하는 건지, 바보들.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내 몸과 마음에서 감지했는지,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가끔 가슴이 울렁거린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이 느낌의 정체는 뭘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났을 때처럼 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기분이다.
“야.”
“응?”
“안소은 말이야.”
“응.”
“학원은 안 다닌대? 너보단 학원이 낫지 않겠냐.”
“음... 너도 알지 않아? 점수대별로 반을 나누잖아?”
“아~”
박수를 짝 쳤다.
“안소은 성적이면 분명 제일 낮은 반에 갈 텐데, 거기는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거지?”
“어머,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알아들었네?”
한여름이 말하다 말고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순간 심장에 손을 갖다 댈 뻔했다.
드르륵
“저 왔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활력 넘치게 들어오는 안소은이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지 얘기 하자마자 딱 등장했다.
“어서 와~”
한여름은 반가운 게 얼굴에 딱 드러났지만, 난 그저 손을 까딱할 뿐이었다.
뭔가 어색하단 말이지.
내가 어색하든 말든 안소은은 자리에 앉았고, 최근의 3인방이 모두 모였다.
“언니, 선배. 이것 좀 들어봐요... 글쎄 옆반 소현이가~”
그렇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오늘 있었던 웃겼던 일들이나, 선생들 뒷담 등의 이야기를 안소은이 재밌게 풀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듣고 있는 와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 비스무리한 게 들려왔다.
똑.
삽시간에 웃음을 뚝 멈추는 한여름.
“...지금 노크소리야?”
안소은도 덩달아 웃음을 멈췄다.
“그런 거 같은데요...?”
똑똑.
“노크소리 맞네요!”
“들어오세요~”
내담자 주제에 안소은이 활기차게 외쳤다.
그런 적극적인 태도, 아주 마음에 들어.
니가 나 대신할래?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선 건 평범하게 생긴 남자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앉은 곳에서 문까지는 열 걸음 정도 돼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상담 때문에 오신 거세요?”
말은 건 것은 역시 한여름이었다.
거리를 감안해서인지 바로 옆의 내가 듣기엔 조금 큰 목소리였다.
귀 아프게시리.
“ㄴ...네.”
잘 들리지도 않는, 작은 성량이었다.
말을 더듬는 걸로 봐서 다행히 이번 내담자는 안소은과 정반대 성격인 거 같았다.
그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이제야 뭔가 보통의 상담실에 있는 것 같아서 기쁘네, 정말.
“이쪽으로 오실래요?”
아니, 그나저나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러지 않았는데... 사람이 안 와서 고민이라고 했는데...
“소은아, 저쪽에서 해줄 수 있을까?”
한여름이 안소은에게 상담실 문 앞 책상을 가리켰다.
“넵.”
안소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순식간에 짐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보니 문 앞에서 오고 있는 새 내담자와 안소은이 필연적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안소은이 고개를 까딱거리는 게 보였고, 평범해보이는 내담자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을 할지 궁금증이 돋았다.
“......”
안소은 얼굴을 보긴 한 건가...?
내담자는 바닥에 돌맹이라도 있을까봐 염려되는 건지 상담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종일관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안소은이 인사를 하든 말든.
인사가 씹히자 안소은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 갔고 한여름은 그런 시니컬한 내담자에게 손짓으로 앉을 자리를 알려줬다.
드르륵, 안소은과 내담자의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상담실장이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학년, 반이 어떻게 되세요?”
가까이서 보니 영락없는 평범한 고딩이었다.
평범한 체격에 여드름 자국이 적당히 난 큰 얼굴, 거기에 검고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검은 더벅머리.
한 학급에 적어도 두 명은 있는 얼굴.
그야말로 평범의 극치다.
“1학년... 10반...이요.”
한여름이 적으라는 눈치를 줬고, 노트에 인적사항을 적었다.
이 노트에 이렇게 빨리 두 번째 펜질을 하게 될 줄이야... 1학년... 10반...
“이름은요?”
“이......평범...이요...”
이...평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