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게 재미없네.”
이평범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임에 가깝게 내뱉었다.
속으로 해도 되지만 곡 직접 말로 하고 싶었다.
할 말 못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힐 말을 입 밖으로 낸 것처럼.
그리고는 이번엔 이평범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만한 목소리를 냈다.
“왜 저희에게 오셨는지 알겠네요.”
“재미...없나요?”
“네. 아직 안 올리셨다고 했죠?”
“...네.”
“잘 하셨네요. 만약 올렸으면 아마 악플도 못 받았을 걸요. 안 봐서.”
“......그런가요.”
“네.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셨어요?”
“중학교... 2학년 정도부터요...”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한여름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야, 언제까지 볼 건데.”
진행 안 해?
“...다 봤어.”
한여름이 고개를 들더니, 다시 한 칸 옆의 자리 자리로 돌아갔다.
내 코끝을 맴돌던 향기가 멀어져가는 게 느껴졌다.
시야 구석에 들어온 태블릿의 스크롤이 눈에 띄었다.
한참 내려가 있다.
난 1화만 보고 말았는데, 대체 어디까지 본 거야?
“저, 평범씨...”
“...네..?”
“이거... 본인 경험이 많이 들어간 거죠...?”
“......”
“...많이 들어갔죠?”
한여름이 재차 물었다.
“......네.”
“왜 이런 내용의 만화를 그리신 거예요...? 보통은 이상향을 많이 그린다고 알고 있는데...”
이상향? 음... 본인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걸 말하는 건가?
“...그게...중요한가요?”
“네?”
“...스토리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완고하군.
상담실장이 여기서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생각외의 반응이었을 텐데, 한여름은 머뭇대지 않았다.
“상상이 잘 안 되시는 거 아니에요?”
“......”
“정상적인 학교생활, 정상적인 대화, 정상적인 본인의 심리상태를 상상할 수 없으셔서 만화 안에 갇히신 게 아닐까요?”
“......는요?”
“네?”
“...토리...는요?”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스토리는요...?”
“네?”
“저는... 스토리 때문에 온 거예요. 이런 얘기들은...필요 없어요.”
“야. 스토리 얘기나 하자.”
뭣 하러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쟤도 안 듣고 싶어 하는데.
“...치.”
한여름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상담실장이 이제 몇 분간 말을 안 할 걸 직감적으로 알기에, 대신해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나로서는 귀찮음에 짜증이 살짝 났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싶으세요?”
“...잘 모르겠어요.”
그걸 모르니까 여기 왔지, 이 등신아. 알면 내가 왔겠니? 이건가...
“제가 웹툰 좀 봐서 아는데 이런 내용으로는 절대 성공 못 할걸요.”
이평범은 대답도 않은 채 내 다음 말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수난을 겪지만 결국은 이런 어두운 성격에서 벗어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라도 있거나, 이런 겉도는 내용을 웃기게 한다든가 해여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음... 웹툰 같은 거 많이 안 보셨어요?”
“...네.”
“그럼 이따 집에 가셔서 한 번 본인 만화랑 약간이라도 비슷한 만화들을 보는 건 어떨까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난 추천을 부탁하는 이평범에게, 최대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의 웹툰 몇 개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 알려줄 때쯤, 삐죽 나온 입이 다시 들어갔는지 한여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범씨.”
“...네.”
“그리신 만화 좀 저희에게 복사해주시고 가면 안 될까요?”
“아... 네....USB 있으세요?”
“얘.”
한여름이 날 툭 쳤다.
“응?”
“내 가방 좀 갖다 줄래?”
“내가 니 하인이냐?”
얼마나 멀다고 그걸 갖다 달래...
“너가 더 가깝잖아~”
“......”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길래 할 수 없이 세 걸음씩이나 움직여 친히 가방을 전달했다.
나도 우리 엄마아빠한텐 귀한 집 아들한테 이런 중노동을 시키다니.
“옛다.”
“고마워.”
전혀 고마워하지 않아 보이는, 마치 치킨엔 콜라를 먹어야지! 급의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이더니 금세 USB를 꺼내 이평범에게 건넸다.
“여기요.”
이평범은 그걸 받아들더니 태블릿에 꼽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용량이 커서 좀 걸리네요...”
“그런가요? 괜찮아요~”
““......””
이평범이 오고 나서 처음으로 상담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와 이평범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서 보기 시작했다.
한여름은 팔짱을 끼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다 된 거 같은데요.”
3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평범이 한여름에게 다시 USB를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가방을 메고, 문 쪽으로 이동하는 이평범.
“네. 다음 상담 때 봬요.”
포기했는지 다시 한여름의 얼굴에선 여유가 느껴졌고, 그 여유를 기반으로 한 부드러운 미소를 뒤로 하며 문이 드르륵 닫혔다.
“후우...”
지쳤다... 짧지만 힘든 시간이었어...
기지개를 하면서 한여름을 보니, 예의 그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
“뭘?”
“평범씨가 너무 강하게 거부를 했잖아...”
“근데 그게 그 정도였어?”
“응?”
“만화 말이야. 난 초반만 봐서 뭔 내용인지 자세히는 모르거든. 아싸 얘기인 건 알지만.”
“이따 보내줄 테니까 집에 가서 봐봐.”
“뭘로 보내주게?”
“어... 이메일?”
“내 이메일 알아?”
“아니. 알려줄래?”
이메일을 알려주는 김에 휴대폰 전화번호도 서로 교환했다.
야호.
“...이따 보내줘 그럼.”
“응...”
“그리고.”
한여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너무 해결해주려고는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
“바뀌기엔 늦었어. 너도 알면서.”
“......”
“너도 알겠지만, 겉도는 애들은 다 티가 나잖아. 분위기나 말투나 행동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한여름.
“그걸 단기간에 고치려고 달려드는 건 무리야.”
“알고 있어... 그냥... 답답해서 그래.”
씁쓸함이 가득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한여름이 대답했다.
안 지 몇 주 되지 않기는 했지만, 이렇게 기운 없어 보이는 한여름은 처음 본다.
“그래. 난 간다.”
“만화 읽어보렴.”
“오냐.”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다.
반복적인 하루를 보낼수록 시간 가는 게 빨리 느껴진다더니, 시간이 날아가는 화살 같이 빨리 가는 거 같다.
집. 교실. 상담실. 집. 학원. 집.
맨날 이 패턴이니 시간이 느리게 느껴질 리가 없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좀 더 천천히 갈까? 하면서도 귀찮아서 결국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 ‘의미 있는 일‘하니까 안소은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걔도 이런 기분이려나?
...머릿속을 떠도는 잡념들에 몸을 맡기다가 한여름이 만화 읽어오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1화부터 다시 읽어볼까?
휴대폰을 꺼내 한여름이 보내준 이평범의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
1화를 읽고 나니, 이평범의 만화 속 주인공이 주말에 하는 일은 ‘오후에 일어나서 밥 먹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본인 경험이겠지만.
그야말로 잉여생활의 전형적인 표본.
다음 화로 넘어 갔다.
가끔씩 외출할 때면 아는 사람을 만날까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건 나도 종종 신경 쓰이는 일이다.
적당히 친했던 애를 멀리서 볼 때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된단 말이지. 며칠 전에 안소은이랑 같이 갈 때도 그랬고.
......
스토리에서 나오는 흡입력이 없다.
매력이 없다.
온통 어두운 주제에 지나치게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카타르시스가 필요한데 그냥 어둡기만 한 내용이라 끌리지가 않는다고나 할까.
지이-잉.
다음 화를 보려는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하승표였다.
“왜.”
[왜라니, 우리 사이에.]
“왜.”
[......]
잘 안 들리나?
“여보세요?”
[왜......어와.]
“뭐라고?”
[왜 게임 안 들어오냐고.]
“아 몰라. 요즘 바빠.”
[뭐?!]
놈의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호들갑떨긴.
[너...... 귀차니즘에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니가, 바빠서 게임을 안 들어와?!?! 니 유일한 낙이었잖아!!!]
“...래퍼냐? 뒤질라고... 그게 아니라....”
난 녀석에게 근 몇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게 된 거야. 알겠어?”
[음... 그렇게 된 거였냐. 하긴, 넌 예전부터 꿈 가지는 건 시간낭비다 돈낭비다 노래를 불러댔으니까... 그건 그렇고 너네 담임도 참 대단하네. 너 같은 애를 잡고 꿈을 박아주겠다니.]
“나 같은 애?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근데 이상한데?]
대꾸해봤지만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지 말만 해댄다.
“또 뭐가.”
[아니, 우리가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쭉- 붙어다녔었잖아?]
“그래서?”
[내가 10년 동안 봐온 너는, 담임이 하란다고 곱게 네~ 하는 애가 아니었단 말이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안 하거나, 만약 어쩔 수 없이 하게 돼도 어떻게 해서라도 안 했을 텐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세상을 모르는 것들이라며?]
하더니,
[...아, 물론 열심히 한다는 건 보편적인 ‘열심’이 아니라 순전히 니 전용 ‘열심’인 거 알지?]
띠꺼운 말을 덧붙여댔다.
“아, 닥쳐. 그딴 소리 할 거면 끊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잔소리질이야? 니가 우리 엄마냐?”
[공부를 안 하다니~ 내가 저녁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밤에 잠깐 게임 들어가는 거 아는 놈이 이러네? 너희 어머니한테 널 신경써달라는 부탁을 들었기 때문에 넌 내가 주기적으로 관리해줘야 한다고. 니가 그렇게 개판으로 사는 걸 너희 아버지어머니께서 보시면 행복한 자취생활이 끝날 거라는 건 안 봐도 뻔하지?]
그러고 보니 요즘 집에 전화를 안 했네.
혼자 살게 된 작년부터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전화했었는데 요 몇 주는 갑자기 할 일이 많아져서 그런지 깜빡했군.
“아, 알았어. 끊어.”
[야 잠깐만, 그게 아니라 게임 들어오라니-]
뚝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하승표는 나랑 다섯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
부모님끼리도 서로 알고 계신다.
그만큼 오래 알고 지내서인지, 한동안 교류하지 않다가 느닷없이 불쑥 연락해도 전혀 어색하거나 거리감이 생기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착 붙어있다 보니 서로 취미생활도, 말투도, 심지어 사고방식까지 비슷해졌지만, 선천적인 건지 뭔지 안 맞는 부분은 있다.
이 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좁혀지거나 서로가 수긍하지 않아서 그냥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는 느낌이다.
바로 꿈.
나는 꿈이 없을 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반면, 하승표는 의사를 희망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잘 걸어가다 갑자기 뜬금없이 ‘나 의사 할래.’라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게 한 순간의 치기 어린 말이 아니었는지,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해서 그 결과, 나랑 비슷했던 성적도 최상위권으로 끌어 올렸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역시 꾸준히 그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 덕에 엄마가 맨날 나한테 넌 왜 승표처럼 못하니? 같은 말을 얼마나 들었었지...
몇 번이나 의사를 왜 하고 싶은지 물어봤었다.
‘왜 하고 싶은데?’
‘음... 그냥?’
‘뭐?’
‘그냥 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왜 하고 싶냐고. 돈? 명예? 환자를 치료하며 얻는 만족감?’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걸 어떻게 설명해?’
‘......’
이 문제를 물어봤을 때 하승표가 헛소리를 안 했던 기억이 없다.
논리도 없고 공감을 사지도 못하는, 그냥 하고 싶다던 말.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천장을 향해 돌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승표의 말대로다.
평소 같았으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절대 열심히 하지 않았을 텐데 나답지 않게 그들의 고민에 참여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내가 생각해봐도 며칠 전부터 하게 된 학생상담에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긴 하는 것 같다.
한여름은 꿈을 위해 복잡하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서 학생 상담실을 차렸다.
안소은은 뜬금없이 꿈을 찾고 싶다며 무작정 들어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우리가 해주는 말을 열심히 듣고 갔다. 두 번이나. 거기에 공부도 따로 하고.
이평범은 본인이 그리는 만화의 발전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겉도는 생활로 인해 상담실에 들어오려는 시도 자체가 힘들었을 텐데도.
이들과 나의 차이점은 뭘까.
어떤 동기가 이들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는 걸까.
꿈의 유무?
아니지.
같이 꿈이 없는 입장인 안소은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걸 보면 꿈의 유무는 아니다.
조금 더 그들과 같이 있다 보면 뭐가 다른지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울렁거림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
......
아, 각자의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노력하는 그들이, [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