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도은강 팀장의 호의를 사양했다. 이능반 건물부터 집이 그리 멀지도 않았고, 그에겐 잠이 시급해 보였다. 동정심이 바닥을 기는 그녀가 절로 불쌍함을 느낄 정도로 심각했다.
주말도 없이 야근한 샐러리맨, 숙취에 찌든 일용직 노동자.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혼자서 떠안은 시한부 환자 같았으니까.
집에 돌아와서 동생들은 학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친구 분을 만나러 외출해 집에는 백민 혼자였다. 쓸쓸하게 저녁을 차려먹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환상구현이라고 했던지? 그럼 가상의 인물을 내가 현실로 꺼냈단 얘기? 내가 뭘 했다고? 게임 광고 속 남캐의 윤곽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린 것밖에…….”
저번에 봤던 괴상한 우윳빛 아메바가 떠올랐다.
“설마…….”
백민은 A4용지 한 장과 펜을 꺼내서 치킨을 상상하며 닭 한 마리를 그렸다.
“으으음……?”
2차원적인 그림이 3차원적인 실체가 되어 살아나는 장면은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또 아메바? 후라이드 치킨 그렸는데? 흰 종이라서? 색칠을 해봐야 하나?”
동생 백영의 색연필을 들고 와서 다시 그리고 색칠까지 마쳤다. 하지만 완성한 그림에서 나타난 것은 똥색의 아메바!
“???”
이능이 아메바 생성은 아니겠지. 백민은 자신이 가지게 된 이능력이 의심스러웠다. 그 전사캐릭터를 실체화한 장본인이 그녀가 맞는다면. 타인의 그림은 그대로 생성해낼 수 있지만, 스스로 그린 그림은 아메바로 나타난다는 결론이 된다. 백민은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가정을 애써 지워버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지금으로선 이능반에 취업한 게 나쁘지 않았다. 근로계약서대로만 지켜진다면 꿈의 직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일 가서 어떤 일들을 하는지 직접 겪어봐야 알겠지만, 웬만한 억지는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다른 팀원들이 꼬장꼬장하게 텃세를 부리든, 잡일꾼 취급을 하든, 입이 떡 벌어질만한 황당한 요구를 하던 웃음을 지우지 않을 각오도 했다.
무작정 학교나 과외를 그만두지도 않았다. 아직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주일만 지켜보고 판단을 내리기로 마음먹으며 꿈틀거리는 아메바 두 마리를 없앴다.
*
드디어 첫 출근.
수업이 끝나고 백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능반으로 출근했다. 그녀는 신입사원처럼 흰 셔츠에 검은색 세미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학교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 다크브라운색 백팩도 매고 있어서, 바지가 데님 스키니진으로 바뀌고 단화가 스니커즈로 바뀌면 딱 학교 가는 옷차림이었다.
도은강의 충격적인 코디를 떠올려봤을 때, 자유로운 복장으로 와도 될 것 같긴 했지만 첫 출근이라 나름대로 신경 써서 단정하게 입었다.
어제는 도은강과 같이 들어와서 몰랐는데 출입통제가 삼엄했다. 델타팀 신입직원이라고 이실직고했는데도 팀장인 도은강이 데리러 내려온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이해해라. 알리우스들은 비밀 유지에 예민하기도 하고. 협회 측에서도 보안에 특히 신경 쓰거든.”
도은강은 어제와 달리 멀끔했다. 수염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하얀 폴로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상태. 여전히 편의점 다녀오는 듯한 프리한 옷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긴 했지만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수준이랄까. 그래도 회사 팀장의
옷차림을 평가할 주제는 못 되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가 심각하긴 했지만.
“……그래요?”
“가족이나 지인이 회사에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신분 확인 절차가 까다로워. 어쨌든 잘 왔다. 팀원들이랑 소개하고 간단한 의뢰 수행한 후에 신입환영회 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백민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부모님이 회사에 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 딸이 취업한 걸 아시면 아버지가 한번쯤 들르실 수도 있었다. 미리 대비해야 했다.
도은강은 귀찮아하면서도 궁금증 많은 신입이라는 점을 고려했는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천천히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전담 알리우스가 환각을 덧씌워 평범한 사무실과 직원들로 보이게 만든다나. 대신 그 알리우스가 작업을 끝낼 수 있게 미리 통보를 해둬야 한다고.
“참. 털 알레르기는 없지? 뭐, 있어도 상관없지만…….”
“없는데요. 사무실에서 동물 키우세요?”
“보면 알아. 자, 그럼 우리 팀원들을 소개하지.”
도은강이 씩 웃으면서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었다.
처음 왔을 때 비어있었던 소파에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준 그들은 개성이 넘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상당히 언밸런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쌍꺼풀 없는 눈에 송충이 눈썹을 가진, 사내냄새가 물씬 나는 남자였다. 겉보기엔 곰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산적 같았다. 그런데 그의 울끈불끈한 근육질 몸은 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동물들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까만 털을 가진 고양이가 무릎 위에서 고륵거리고 있었고, 어깨에는 깃털을 고르는 비둘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비둘기는 마술사가 쓰는 흰 비둘기와 닮아있었지만 깃털 색이 연한 회색이라는 점이 달랐다.
남자의 손 위에는 해바라기씨를 갉아먹는 작은 햄스터도 있었다. 남자의 커다란 몸집 때문인지 더욱 앙증맞아 보였다. 사람처럼 소파에 앉은 의젓한 세인트버나드도 보였다.
‘동물신의 축복이라도 받으셨나? 이 동물들의 향연은 도대체 뭐야?’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신비로운 음악이라도 깔면 거룩한 영웅전설 속 한 장면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궁금증이 깊어지기 전, 도은강이 그를 소개했다.
“먼저 여기는 가장 연장자인 이수철 아저씨. 알리우스 협회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아서 뒤늦게 알리우스로 등록된 케이스지.”
“은강아……. 처, 처음부터 아저씨라고 소개하는 거야? 아저씨 맞지만……. 갸옹.”
“미안. 오빠라고 부르게 할게, 형.”
“아니! 아니야……. 짹짹!”
험상궂게 생긴 이수철은 백민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는 눈동자에서부터 소심한 속내가 엿보였다.
‘그나저나 왜 말 끝에 동물 울음소리를 붙이는 거지? 버릇?’
다른 팀원들이 백민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얼른 소개받고 싶다는 마음이 엿보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도 했다.
“말투가 좀 특이하지? 키티 형님은 애니멀 커뮤니케이턴데, 이능 부작용이랄까. 그런 거니까 양해하고.”
“……키티는 별명이세요?”
“아, 아니요. 코드명……. 야옹.”
이수철이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하는 대답했다. 백민은 순발력 있게 바로 사과했다. 물어본 게 잘못은 아니지만 말투나 코드명으로 상당히 놀림을 받아서 주눅 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 소심한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는 기본이다.
솔직히, 백민은 ‘키티’라는 상당히 귀여운 코드명보다 그의 곁에서 얌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동물들이 더 신경 쓰였다.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는 그렇다 쳐도 실내에서 비둘기라니.’
백민은 동물들을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특히 성질이 사납지 않다면 더욱 애정을 쏟았다. 그녀는 앙증맞음과 귀여움으로 도배한 녀석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중간에 통역사도 끼어있으니 친해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신입. 웃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했어. 듣자마자 폭소한 누구도 있으니까.”
“내가 뭘!”
갑자기 젊은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상아색에 가깝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염색과 탈색을 반복했는지 머리카락이 개털이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시원스런 이목구비. 아이돌 못지않은 세련된 비주얼이었다. 귀, 코, 눈썹 위까지 점령한 피어스가 인상적이었다.
“지레 찔려서 발끈하기는. 이 성질 급한 녀석은 사권일. 스물네 살이고 흙을 이용하는 능력자다. 알리우스 간 전투 후 주변 지형이나 건물 복구를 담당하고 있어서 우리 팀에서 가장 바쁘지. 흙, 모래, 유리, 시멘트, 아스팔트까지 전부 퍼 나르는, 한마디로 흙수저.”
“형! 흙수저라고 하지 마요! 난 각성 알리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다이아몬드 수저라고요!”
“뭐, 그렇단다. 코드명은 그라운더. 땅볼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아, 진짜! 처음 보는 마드모아젤 앞에서 이럴 거예요?”
“이럴 거다. 날라리에 바람둥이니까 참고하도록.”
“형!”
울상을 지은 사권일의 말은 무시한 채, 나머지 어여쁜 여성분을 소개했다. 백민은 그들의 투덕거림을 보며 예의상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이쪽은 우리 팀 큰 누나 홍미지.”
“나머지는 내가 직접 할게.”
“그렇게 해.”
긴 웨이브에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콜라병 몸매, 도톰한 입술 아래 찍힌 점까지 섹시한 누님의 전형적인 외양을 한 여성이 눈앞에 있었다. 플라워 프린트의 미니스커트에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하얀 의사가운까지. 늑대들의 망상을 직격하는 차림새였다.
“반가워. 미지 언니라고 부르면 돼. 그런데 말 놔도 될까?”
“얼마든지요.”
철저하게 관리해서 어려보이지만, 홍미지는 30대 중반. 백민은 그녀의 자연스럽고 능숙한 태도에서 나이가 한참 위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반말을 허용했다.
“난 몸의 호르몬을 조절하는 이능을 가져서 의사 역할을 하고 있어. 진짜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잘 부탁해. 민이 씨.”
얼떨결에 악수를 청하는 홍미지의 손을 잡고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콧소리가 섞여 고막을 자극했다. 그녀는 섹시함의 결정체였다. 갑자기 그녀의 붉은 입술과 긴 속눈썹의 움직임이 느리게 재생됐다. 백민은 얼른 악수하지 않는 왼손을 꽉 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누나. 순진한 애 그만 놀려.”
도은강이 만류하자 몽환적으로 흐려졌던 시야가 맑게 개었다. 홍미지의 고유 능력인지, 아니면 타고난 매혹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백민은 곧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곤 똑바로 서서 팀원들을 보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민이라고 합니다. 성이 백이고 이름이 민. 외자 이름입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스물두 살이고 오늘부로 이능반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서툴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합 들어간 인사에 팀원들이 깜짝 놀라다가 곧 환영의 박수를 쳤다. 백민은 박수를 받으면서 여기저기 꾸벅꾸벅 잘도 머리를 숙였다.
“백민은 환상구현 능력자다.”
도은강은 싹싹하게 인사하는 신입의 이능을 밝히자 팀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환상구현? 그 환상구현? 여기 저기 쓸모가 많겠어. 내가 잘 부탁해야겠네. 민이 씨.”
“와, 한 세대에 한번 나오는 귀한 이능인데! 로또 당첨됐네! 다른 팀에서 견제 들어오는 거 아냐?”
“오……. 은강이가 네가 데려올 만한 능력이네. 축하해요. 민이 씨. 찌륵.”
홍미지는 믿기 힘든지 재차 묻다가 이득을 따졌고, 사권일은 부러운 눈을 하더니 벌써부터 다른 팀의 접근을 경계했다. 이수철만 순수하게 감탄하면서 축하를 전했다. 각자의 성격에 맞는 개성적인 반응이었다.
“각성한지 얼마 안 된 초보니까 다들 많이 도와주고. 한동안은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칠 거다. 다들 그렇게 알아.”
“걱정 마요. 형. 내가 옆에서 밀착 과외 해줄게요.”
도은강의 설명에 사권일이 성심성의껏 가르쳐주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에 눈을 가늘게 뜬 홍미지가 의심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수상한데. 바람둥이가 먼저 호의를 보이다니. 민이 씨한테 관심 있니?”
“사내연애 금지는 아니잖아요. 못할 거 없죠. 안 그렇슴까!”
희망에 부푼 사권일의 기분을 가라앉힌 사람은 백민이었다. 오늘 처음 출근한 신입사원치고는 당돌한 태도였다.
“전 싫습니다. 사내연애.”
그녀는 단호하게 치근덕거림을 끊어냈다. 농담으로라도 사내연애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은근슬쩍 밀어붙이는 압력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떠들썩하게 사귀다 헤어진 캠퍼스 커플보다도 골치 아플 게 확실했다. 철 안든 날라리 사권일은 백민의 취향에서 백만 걸음 떨어져 있기도 했다.
‘연애는 나중에. 대출금 갚고 진이, 영이 대학 보낸 후라면 괜찮나?’
막내 백영까지 대학에 보낸 후라면 7년 후. 그때까지 어느 어항에 들어가지도, 어항을 만들지도 않겠다고 철벽을 쳤다.
백민은 미래의 누군가를 상당히 괴롭힐 다짐을 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