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밀 번호를 아무한테나 알려주면 어떻게 해?”
“아는 아줌만데. 그래도 안 돼?”
“안 돼!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너한테 물어보지 않았을 거고, 만약 모른다면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출입문 비밀 번호를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것도 몰라? 이 맹꽁이!”
“나 맹꽁이 아냐!”
“맞아. 넌 맹꽁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몇 번이나 말해줘도 매번 똑같은 잘못을 할 리가 없잖아. 맹꽁이, 맹꽁이.”
“아냐, 오빠 바보! 미워!”
“정말? 정말 오빠가 미워? 동명이한테 미움 받으면 오빠는 너무 슬픈데.......”
“오, 오빠.......”
“내가 미워?”
“아니야. 거짓말이야. 안 미워. 하나도 안 미워.”
“그럼 이 세상에서 오빠가 제일 좋다고 말 해줘.”
“하지만 우리 엄마랑 아빠도 제일 좋은데.......”
“그럼 너희 엄마 아빠랑 똑같은 정도로 내가 좋다고 말해. 안 그러면 나 삐질 거야.”
“삐지지 마! 엄마랑 아빠랑 오빠가 젤 좋아.”
“참내! 내가 손해네. 나는 이 세상에서 동명이가 제일 좋은데. 물론 우리 엄마 아빠도 좋지만... 아무튼 이제부턴 절대 아무에게나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거나 문을 열어 주면 안 돼. 알았지? 나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젠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나한테 맹세해.”
“응, 다신 안 그럴게. 자 손가락 도장 꾹!”
“잘했어! 우리 동명이 너무 예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동명이.”
***
‘삐빅 삐빅’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묘하게 신경을 파고드는 알람 소리에 마침내 굴복한 듯 이불 속에서 헤엄치던 은동명이 몸을 일으켰다.
몸에 감겨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자 어둔 불빛 아래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부드러운 나신이 드러났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유난히 기다란 목선, 그 아래로 이어져있는 유연하고 탄력 있는 상반신이 기지개를 펴듯 쭉 펴졌다.
“에이 씨! 아침부터 청승맞게 옛날 꿈이나 꾸고.......”
잔뜩 잠긴 목에서 나지막한 투덜거림이 새어나왔다.
은동명은 새둥지처럼 헤집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어 남아있는 잠기운을 쫒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더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새털처럼 가볍고 포근한 순백의 이불과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매트리스. 은은한 조명 아래 보이는 공간은 그녀의 집은 당연히 아니었고 심지어 그녀가 아는 장소조차 아니다.
“뭐야? 여긴 어디? 내가 왜 여기 있어? 이게 뭐야? 왜 옷은 또 홀라당 다 벗고 있는 거냐고? 미치겠네. 가만 보자. 그러니까 어제 밤에......, 젠장! 또 장미 언니한테 당했구나.”
은동명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개 같은 성질머리라는 소리를 듣는 장 감독에게 닦달 당한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쓰려온다.
“어떻게 하지? 오늘도 촬영 있으니까 장미언니가 어디로 튀지 못하게 잘 감시하라고 신신당부 했었는데. 아이고! 돌겠네. 나라고 무슨 용뺄 재주가 있나?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그 사나운 백장미를 내가 무슨 수로 잡아 두냐고!”
혼잣말로 하소연을 하던 은동명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딘가로 튄 백장미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알몸으로 세상모르고 퍼질러 잤던 자신의 현 상황이었다.
“필름이 끊어진 상태로 내가 혼자서 여기까지 기어와 체크인한 다음에 이렇게 비싸 보이는 침대로 다이빙 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내가 정신 줄을 놓지 않고서야 이런 데 돈을 쓸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결국......, 미친! 원 나이트을 한 거야? 돌았구나, 은동명!”
은동명은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며 잠시 혼자만의 자학타임을 거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침대 곁 의자에 주름 하나 없이 차곡차곡 잘 접혀서 있는 자신의 옷을 찾아 재빨리 껴입기 시작했다.
폭신한 양탄자 위를 까치발로 걸어서 자신과 베드 인했을 다른 이의 기척을 찾았다. 욕실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그대로 줄행랑치기로 마음먹었다.
“어쩐다......, 그냥 내빼긴 좀 그렇고. 이런 경우에는 숙박비를 반땅 하는 게 옳긴 한데......, 에잇, 침대만 있으면 되는데 뭐 하러 이런 비싼 곳까지 와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아! 미안하지만 도저히 반 땅은 불가하겠다.”
은동명은 지갑 속에 든 재산을 확인한 후 눈물을 머금고 거금 오 만원을 꺼내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어제 하루 분의 일당이 날아가 버리는 가 싶어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소나기처럼 바닥을 때리던 샤워기의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문으로 향했다.
“안녕!”
최대한 소리를 죽여 문을 닫은 그녀는 계단을 이용해 두어층을 내려갔다. 그리고 내려간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동명은 결국 입속으로 혀를 찼다.
‘미친 거 아냐? 잠 한번 자자고 무려 5성급 호텔씩이나 잡다니!’
지난 밤 원 나이트 파트너는 아무래도 상당한 기분파거나 철딱서니 없는 초보 바람둥이였던 모양이다.
헝클어진 머리로 화려한 호텔 로비를 걷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이 흘낏 거렸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을 확인한 동명은 서둘러 지하철역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지각이다.
대문은 소리 하나 없이 열렸다.
은동명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무사히 부엌까지 도착해야 할 텐데.......’
현관에서 얼굴만 들이밀어 내부를 살폈다.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만큼 조용했다. 다행이어야 할 텐데도 동명의 얼굴은 시무룩하게 바뀌었다. 이런 날은 대략 3가지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가 외박을 했거나, 전날 과음을 해서 평소보다 조금 늦잠을 자거나 아니면...... 여자와 함께 있다는 의미니까. 부디 3번째 경우가 아니기 만을 빌었다.
동명은 거실을 지나 식당과 부엌이 있는 집 안쪽까지 발끝으로 걸어갔다. 겉옷을 벗고 식당 한 구석에 있는 장을 열어 옷과 가방을 넣고 앞치마를 둘렀다.
그 때였다.
별안간 식당 불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둠에 익숙해 있던 동명은 눈을 심하게 찌푸렸다.
“지각이야!”
“안, 안녕하세요?”
“내가 안녕한지 안 한지는 네가 알 것 없어. 그보다 10분이나 지각하다니 정신상태가 엉망이군.”
“죄송해요. 지하철에서 깜빡 조는 바람에.......”
“그만! 변명 따윈 질색이야.”
“......죄송합니다.”
동명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었다.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던 남자는 그녀의 옷이 어제와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한층 더 인상을 썼다.
“너... 어제 어디서 잤어?”
“네?”
“외박했나?”
“아니 그게.......”
“지금 네 몰골이 어떤지 모르나? 웬만하면 거울 좀 보고 살지.”
은동명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졌다. 그러나 그녀가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의 눈은 더욱 찌푸려지기만 할 뿐이었다.
“네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던 누구랑 있던 별로 상관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집에 올 때에는 정결한 상태로 와줬으면 좋겠군. 내 식탁을 책임지는 사람이 불결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내 말 알겠어?
“......네.”
“은동명,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야! 명심해!”
동명은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더럽게 아프네. 아파서 그런 거야. 아파서 눈물이 나려 할 뿐이라고.’
“명심하고 있어요. 바로 아침 준비 할까요?”
“...... 아침 준비 전에 침실에나 가 봐.”
“침...실이요?”
“깨워서 내보내.”
“......네.”
역시 일진이 나쁜 날인가 보다.
아침부터 하루 일당을 모두 털리질 않나, 지각에다가 가시 돋은 소리만 잔뜩 듣고 결국은 3번째 경우인 최악의 상황까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다니.
“......예쁘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여자는 비록 두꺼운 화장과 하얀 볼에 부스러진 마스카라 가루를 묻히고 있음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동명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집으로 데리고 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모델 같은 체형을 지닌 여자들뿐으로, 여자에 대한 그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높았다. 보통 사람은 언감생신 꿈도 꿔 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동명이 막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려 할 때였다. 때 마침 여자가 잠에서 깨어나는지 몸을 뒤척거렸다. 그 바람에 여자의 맨 몸이 적나라하게 동명의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여자는 종잇장처럼 가는 몸매인데도 오랜 트레이닝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단단한 복근과 등 근육을 지닌 짜임새 있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은동명 자신처럼 살찔 틈도 없으리만치 고단하고 팍팍한 일과로 인해 생성된 빈약한 몸매가 아닌 것이다.
괜히 심통이 난 동명이 입을 삐죽 내미는 찰라, 불현듯 여자가 눈을 반짝 떴다.
나신으로 이불을 휘감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의 몸매를 감상하고 있던 동명의 시선이 엄폐물 하나 없이 부닥쳤다.
“아! 저기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런 게 아니면 이런 거 말인가요?”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미인이 자신의 나신을 휘감고 있던 이불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문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드러났다. 동명은 바보처럼 입을 떡 벌렸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직접 보신 감상은요?”
“몸이 참... 멋지시네요.”
동명의 대답을 들은 여자가 콧등에 주름을 접은 채 동명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진지한 투로 다시 물었다.
“댁이 소문 속의 그 본댁인가요?”
“본댁이요?”
“본댁, 정실이냐고요?”
“아니요!”
은동명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라고요? 음... 아닐 리가 없는데. 난봉꾼 남편이 데리고 온 여자들을 아침마다 깨워서 옷 입히고 차비 줘서 보낸다면서요? 그거 당신 아니에요?”
“그...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전 그, 그거 아니고요. 그냥 가정부에요.”
“가정부? 농담이죠?”
“아...니요. 진담이걸랑요.”
여자는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은동명을 바라보더니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나신의 미인이 손을 내밀었다. 동명은 멀거니 여자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차비 달라고요?”
여자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차비는 나도 있어요. 초면에 인사나 하자는 뜻이에요. 악수 몰라요? 악수!”
“아, 네....... 저기, 그런데 저랑 인사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왜요? 이제부터 자주 마주칠 텐데 서로 안면은 트고 지내야죠.”
“자주 마주친다니... 저랑요? 왜요?”
“왜긴 왜겠어요? 여기 자주 놀러올 거란 소리죠.”
“네엣? 그건 좀...힘드실 것 같은데.......”
그동안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여자들 중에서 다시 얼굴을 본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동명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동명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나신의 미녀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더니 상큼하게 웃었다.
“괴팍한 짠돌이 사장님 성격은 잘 알고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요. 이전 여자들처럼 하룻밤 같이 잤다고 애인인척 하거나 들러붙지도 않을 거구요. 나도 그런 건 딱 질색이거든요.”
“그런데 왜.......”
“서로 심심할 때 침대를 데워주는 상대로는 최고니까요. 복잡한 머리를 식혀주는데다가 ... 사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상대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거든요.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모릅니다!”
동명이 정색을 하고 부인하자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
“일단 옷부터 입으세요. 저는 빨리 아침식사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어머! 그럼 저도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어요? 집 밥이 정말 그리웠는데.”
“ 뭐... 사장님이 허락하신다면야.......”
남자가 허락할 리 없다.
동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나신의 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