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야로우! 이거 밖에 버리고 와.”
“...네. 근데 야로우라고 부르지 마세요.”
“뭐? 이 놈 봐라. 야! 신입주제에 어따 말대꾸야. 사장님이 오냐오냐한다고 네가 정말 뭐라고 된 줄 아는 모양인데.......”
“이거만 밖에 버리면 되죠?”
“야! 고참이 아직 말씀중인데 어딜 내빼? 야!”
부주방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화랑은 얼른 주방을 빠져 나왔다.
이전에 일식 전문점에서 일을 했다던 부주방장은 요리는 제법 잘했지만 가게 사람들 중 그의 뒷담화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격에 문제가 많았다.
헌데 문제는 성격 나쁜 부주방장이 화랑이 알바를 시작한 이래 그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걸고넘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며칠 전부터는 그를 난데없이 ‘야로우(冶郞/(일본어)야랑:난봉꾼, 탕아란 의미)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화랑은 언짢고 귀에 거슬려 몇 번이나 그렇게 부르지 말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부주방장은 그의 요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화랑은 음식물 쓰레기를 뒷문에 붙어있는 쓰레기통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곧바로 주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나온 김에 잠시 바람을 쐬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바람이 한줄기 그의 얇은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위생용 마스크로 가려져 있는 그의 입에서 무심코 새어나온 긴 한숨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여름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서늘해지는 이 무렵의 바람은 유독 날선 독설처럼 그의 가슴속을 아리게 만들곤 했다.
화랑이 주방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뒷문을 열려는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두 번 진동하다 마는 것을 보아하니 전화는 아니고 채팅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볼까 말까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낼 사람이라야 한정된 몇몇 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것이 누구의 메시지인지 대충 짐작갔다.
‘얘, 일자리는 아직이니? 그러니까 저번에 엄마가 소개한 데 그냥 취직해. 거긴 월급 또박또박 주지, 월급 외에 가욋돈도 쏠쏠하단 말이야. 괜히 또 푼돈이나 주는 알바 따위나 하지 말고. 내가 너 그런데서 일하라고 쌔빠지게 길러준 줄 알아?
엄마도 요즘 힘들어 죽겠어. 일하고 싶어도 나이 먹으니 누가 써주기라도 하나. 그래서 말인데 월세가 또 두 달이나 밀렸어. 이번 주 내로 해결하지 않으면 쫓겨 날 판이야.
부탁해 아들,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고 있지? 그럼 너만 믿을게.’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바로 그 사람이 보낸, 익숙한 내용들이었다.
이미 몇 년간이나 우려먹은 똑같은 레퍼토리를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읊어대는 어머니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럼에도 입도 뻥끗 못하고 있는 자신이 멍청한 건지 구분조차 하기 힘들었다.
화랑은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그는 인터넷뱅킹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쯤 직접 은행에 가서 송금을 하기로 하고 어머니와 돈 문제는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렸다.
대신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또 다른 여자의 일이었다.
“은 동 명!”
지난 밤, 술에 취해 그를 향해 갈지자걸음으로 걸어와 대뜸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리던 그녀 때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 했었다.
혹시 자신을 알아본 것은 아닐까, 아니면 뒤를 몰래 따라온 것을 들켰나 하고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인사불성이 된 상태여서 그의 얼굴 따위는 보고 있지도 않았다. 뭐, 얼굴을 보았더라도 그녀가 그를 알아 볼 확률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화랑은 눈을 들어 요란한 조명들로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고 있는 가게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런치박스 전문점 프린스’
이 근방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가게다.
이곳이 유명한 데에는 물론 맛도 맛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프린스라는 가게 이름처럼 왕자님이 주문을 받고 포장을 해서 상큼한 미소와 함께 손님을 접대하는 점이 이 가게를 일약 유명한 명소로 부상시킨것이다.
카페 프린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런치박스 프린스’의 사장이 공공연히 말한 그대로였다.
커피는 되고 도시락은 안 될게 뭐냐는 신념 아래 차용한 아이디어로 시작한 장사는 주변 이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소문난 맛 집이자 명물로 입소문이 자자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런 탓에 점심과 저녁 시간에는 30분씩 줄을 서야 겨우 도시락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붐볐고 먼 곳에서부터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화랑은 약 두 달 전부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이곳에서 일하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조금 전 받은 것과 거의 유사한 메시지를 보낸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돈 요구는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만약 그가 돈을 보내 주지 않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전화와 문자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은 질색이었고 심지어 그의 집을 찾아와 한바탕 눈물바람을 할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마침 이사를 한 것과 맞물려 그는 인턴으로 일하던 작은 회사의 일을 그만두었다. 그 참에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려 했지만 결국 그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물론 어머니가 원하는 돈을 주기 위해서 다시 일을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외적인 밥벌이로 하고 있는 일 외에 그의 비밀스러운 다른 직업으로 번 돈은 단 한 푼도 어머니에게 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미 내심 굳힌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일거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마침 이사한 집 근처에 있는 이곳에 우연히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가 가게에 붙어있던 구인광고를 보았다.
생각보다 시급이 쏠쏠했다. 화랑은 이력서를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그의 이력서를 쓱 훑어본 사장은 화랑의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두꺼운 뿔테 안경을 노려보았다.
화랑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머리카락은 시간이 없어서 자르지 못했던 것이라 당장이라도 자를 수 있습니다.”
“흠.......”
“안경은 렌즈로 교체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키가 얼마나 되죠? 몸무게는?”
“키랑 몸무게까지 아셔야 하나요?”
“물론이죠!”
도시락 전문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데 키와 몸무게가 왜 중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이 일이 하고 싶었다. 마침 이사한 집과도 겨우 5분 거리 안에 있다는 장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였고.
“3년 전에 마지막으로 쟀을 때 183이었습니다. 몸무게는 대략 67 정도고요.”
“말랐군요.”
“한동안 실내 근무만 해서 그렇지 체력적으로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아주 좋습니다. 딱 좋아요.”
“네? 무슨.......”
혹시 건강하지 않다는 오해라도 받을까 얼른 말을 덧붙이는 그에게 사장은 손 사레를 치며 흡족한 듯 웃었다. 사장이 다시 말했다.
“여기 이 고무줄로 머리를 하나로 묶어 봐요. 안경도 벗으세요. 자, 자. 좋아요. 이제 나를 쳐다봐요.”
화랑은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일단은 사장이 시키는 대로 머리를 묶고 안경도 벗어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와우! 눈동자가 갈색이군요. 그러고 보니 피부도 하얗고 혼혈 같다는 말 많이 들어보지 않았어요?”
화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아주 싫어하는 화제였다. 그러나 사장은 더 없이 즐겁다는 투로 노래하듯 이렇게 말했다.
“채용하겠습니다. 줄리앙!”
“네?”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세요. 지금 당장 교육부터 시작합시다.”
“교육...이요?”
“실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트레이닝이 되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가게는 아주 바쁩니다. 특히 점심과 저녁 피크 타임에는 거의 전투와 다름없어집니다. 어리버리한 직원 하나로 인해 빈틈없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야 쓰겠습니까? 안 그래요?”
사장의 설명은 상당히 일리 있어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요. 제 안목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 날 면담이 끝나자마자 화랑은 주방 보조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오리엔테이션이란 명목으로 사장이 그에게 교육시킨 항목은 주방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주방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었다.
더욱 황당한 일은 그는 화랑을 ‘줄리앙’이라는 버터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데 있다.
화랑은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파격적인 시급에도 불구하고 당장 일을 때려 쳐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낸 사장의 두꺼운 얼굴과 3류급 아이디어를 마구 욕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곧 사장이 보기와는 달리 대단한 수완을 가진 장사꾼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타인의 비밀스럽고 다소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는 환상을 현실세계에서 교묘하게 풀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다소 과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지는 않게, 로맨틱하지만 느끼하지는 않게라는 식이었다.
‘런치박스 프린스’의 왕자들은 모두 잘 생겼지만 연예인들처럼 범접하지 못할 아우라를 가진 미남들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출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자신의 앞에 서 있다면 운 좋게 좌석을 차지했더라도 메트로눔처럼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졸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정도쯤의 미남 말이다.
그는 주 5일 근무 중 이틀은 줄리앙으로 일했고 나머지 3일은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사장은 상당히 불만스러워 했지만 아무튼 그 부끄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주방 구석에서 냄비나 씻고 야채나 다듬는 쪽이 그에겐 훨씬 더 마음 편한 일이었다.
껄끄러운 부주방장과 다시 얼굴을 맞대고 몇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주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화랑은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라운지와 카운터를 둘러보았다.
“어! 왔다!”
은동명이 계산대 앞에서 신중하게 도시락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도시락을 가게에서 직접 먹지 않고 포장해가곤 했었다. 화랑은 허겁지겁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동명은 허기진 뱃속을 달래기 위해 보리차를 연달아 두 잔이나 마셨다. 그랬더니 오히려 나아지기는커녕 허기가 배고픈 강아지들처럼 뱃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커플들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동명은 시치미를 뚝 떼고 핸드폰을 보는 척 했다. 하지만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숨기기 위해서는 외투로 배를 감싸고 몸을 앞으로 조금 구부려야만 했다.
“지독한 인간 같으니라고! 먹을 걸 버리면 벌 받는 것도 모르나? 멀쩡한 밥상을 엎긴 왜 엎어? 아니, 그냥 말만 하면 되잖아. 싫다! 안 된다! 평소엔 그렇게 말도 잘하더니만 오늘은 왜 전갈 같은 혀가 아니라 손발이 먼저 나서냐고? 에이 씨!”
남자가 저지른 만행을 수습하는 데에만 무려 2시간이 걸렸다. 녹초가 된 그녀는 그의 집을 나설 무렵엔 거의 기다시피 움직여야 했다.
계속 허리를 구부리고 걸레질을 했더니만 나중에는 몸을 일으키려 하자 허리에서 뿌드득하는 불길한 소리마저 났던 것이다.
“그나저나 원고는 어떻게 하지? 백장미는 어디 가서 잡나? 이번 달 변제는 또 어쩌고.......”
허기와 피로에 더해진 양념 같은 걱정들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은 그녀가 주문한 도시락이 완성됐다는 알림음이었다. 평소대로라면 포장을 해서 집으로 가져가 먹었을 테지만 지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윤기 반지르르한 돈까스와 생선가스의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갖 시름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튀김류를 그다지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배가 고팠고, 그녀가 식비로 쓸 수 있는 금액은 한정되어 있어서 도시락을 두 개나 살 여유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가장 큰 포만감을 줄 수 있는 돈가스와 생선가스 도시락을 선택했다. 침을 꿀꺽 삼킨 동명은 먹음직스러운 돈까스 조각에 소스를 듬뿍 바른 후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으...으... 맛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밥과 양배추 샐러드를 먹고 튀김들을 먹었다. 곁들여 나온 국물마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어치웠다.
“벌써 다 먹었네.”
깡마른 몸의 여자가 며칠은 굶은 사람마냥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본 커플들은 이미 애 저녁에 사라지고 없었다. 동명은 아쉬운 눈길로 텅 빈 도시락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젓가락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 더 시켜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씨..., 그냥 집에 가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어야지.”
마침내 동명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라, 그녀의 앞에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뭐에요?”
허기가 덜 가신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이..이거 드세요.”
“뭐요?”
“드세요!”
“이게 뭔데요?”
“장어 도시락인데요. 이번에 새로 출시된 메뉴예요.”
장어라고? 말만 들어도 입 속에 절로 침이 고였다. 동명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장대처럼 키가 큰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기 직원인가? 옷을 보니까 주방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 이걸 준다는 거야? 혹시... 나한테 한눈에 반해서......?”
동명은 주방직원이 내밀고 있는 도시락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냥 받아들고 싶은 강렬한 욕구와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는 경계심이 치열하게 그녀의 심중에서 격투기를 벌렸었다.
“이 장어...도시락을 왜 나한테 주겠다는 건데요?”
동명은 장어 도시락에서 간신히 눈을 돌리며 일부러 시큰둥한 투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남자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에? 뭐야? 정말 나한테 반한건가? 손 떠는 것 좀 보라지.’
화랑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다행이 위생 마스크가 눈 아래 부분은 거의 다 덮고 있었고, 커다란 뿔테 안경이 그의 눈을 가려주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여전히 배고픈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도시락에 관심이 없는 척 하는 동명이 왠지 안쓰러웠다. 그는 대뜸 도시락이 든 쇼핑백을 그녀의 손에 강제로 쥐어 주었다.
“어, 어머머...”
“신제품 출시 기념으로 무료 서비스하는 겁니다. 손님이 오늘 저녁 888번째 손님으로 당첨되셨거든요. 혹 장어가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것으로 교환도 가능합니다. 다른 걸로 바꿔드릴까요?”
당황한 화랑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이유를 설명 했다. 약간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던 그녀는 당첨이라는 말과 무료 서비스라는 설명에 얼굴빛이 밝아졌다.
“아뇨! 서비스로 받는 건데 너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냥 이걸로도 됐어요.”
“그럼 받아주시는 거죠?”
“뭐...네.”
“감사합니다!”
“아니 뭐 감사하실 것까지야.......”
은동명이 어물어물 답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몰래 훔쳐 본 화랑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장어도시락을 목을 빼고 기다릴 사장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그녀의 허기 어린 표정을 본 순간 전후좌우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서 일체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잘 먹을게요. 그럼.”
동명이 모기처럼 작은 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화랑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눈으로 배웅했다.
“아차! 그걸 돌려줬어야 했는데.”
일부러 가게까지 가져 왔건만 정작 그녀를 만나고도 돌려주지 못한 물건이 마음에 걸렸다.
“내일 오면 그 때 돌려주지 뭐. 내일도 분명 올 거야.”
은동명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저 이따금씩 그녀의 소식을 접한 것이 다인데.......
그 사건 당시 그들을 상담했던 심리 상담사와 그녀가 아주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덕에 그는 그녀의 소식을 지나가는 말로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악몽 속에서만 나오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와 조우하자 그가 간혹 경우의 수처럼 예상했던 그녀와의 만남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찾아들었다.
불쾌한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전에 헤어졌던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마주친 것처럼 그의 가슴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화랑은 무거운 안경을 고쳐 썼다.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급한 일은 다름 아닌 사장이 주문한 장어 도시락을 다시 준비하는 일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은동명이 사라져간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