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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베이다
작가 : 셰리프a
작품등록일 :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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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성일 : 16-10-28     조회 : 353     추천 : 0     분량 : 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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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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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하지만 원래 오늘은 저녁을 밖에서 드시는 날인데 왜 갑자기..., 그야 물론 그 이유까지 제가 알건 없죠. 하지만 오늘 저녁엔 저도 급히 할 일이 있어요. 이렇게 갑자기 변경하시면... 네, 아니 저기, 잠시만 제 말 좀, 실장님, 여보세요? 여보.......”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 온 최세황이 뜬금없이 사장님이 오늘 저녁식사를 자택에서 하시겠다고 하니까 준비를 해 놓으라고 통보하듯 말했다.

 동명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당장 어제 저녁만해도 그 잘난 사장이 저지른 만행 때문에 퇴근시간이 무려 2시간이나 지체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백장미의 사보타주로 인해 생겨난 모처럼의 여유가 단박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는데.

 그런데 또 다시 예정에도 없던 저녁 식사 준비를 지시하다니 그에게는 정녕 양심이란 것조차 없느냐, 고 마구 따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졌다.

 동명은 어떻게 해서든 곤란한 상황을 피해보려는 생각에 아니꼽지만 최세황에게 좋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최세황은 자신이 전해야 할 용건만 일방적으로 말하더니 인정사정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장미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처럼 싹퉁머리 없기는 그 사장이나 부하나 매한가지였다.

 

 “어우! 당장 이 놈의 일을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내가 아주 스트레스로 요절하겠네.”

 

 생각할수록 분이 난 동명은 허공에다가 삿대질을 하며 울화통을 터트렸다.

 지난 3년간을 통틀어 이런 갑작스러운 일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물론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려는 듯한 지시들은 종종 있었지만 근무 시간외 따로 일을 시켰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휴~ 심사가 아주 단단히 꼬였나본데... 이를 어쩐다.......”

 

 당장 오늘 밤까지 백장미를 찾아오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는 장 감독도 문제였지만, 직원이라야 달랑 다섯뿐인 출판사 주제에 대표 편집자 겸 사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오만수의 낯짝에 완성된 원고를 집어 던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쉬웠다.

 

 

 동명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어느새 단골이 되어버린 도시락전문점 앞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전시간은 백장미가 갔을만한 곳마다 전화를 걸어 그녀의 행적을 수소문 하느라 모두 잡아먹어버렸다.

 

 “우선 밥부터 먹자. 밥을 먹어야 머리도 돌아갈 거 아냐.”

 

 지난 달 가스레인지가 고장 난 후부터는 이동용 작은 레인지로 겨우 라면이나 끓여먹고 전기밥통으로 밥이나 하는 것이 고작인 형편이었다. 뭐, 그 덕분에 이 도시락전문점에 왔다가 지금은 단골처럼 됐지만.

 

 “헤이! 화랑!”

 “어?”

 

 탈색한 금발머리만 주방 안으로 빼꼼 들이민 루이가 손을 까딱까딱 움직여 화랑을 불렀다. 화랑은 부주방장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루이에게 다가갔다.

 

 “왜? 지금 바쁜데.”

 “뭐야? 일부러 여기까지 말해주러 온 사람한테.”

 “무슨 말?”

 “왔어.”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 네가 반한 글래머 미인에 혹처럼 붙어 있던 빼빼로 같은 여자 말이야. 지금 막 내가 주문받았거든. 그런데 오늘은 그 미인은 안 보이고 혼자더라.”

 “그래? 은...왔어?”

 

 화랑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저녁쯤에나 들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늘은 아주 이른 방문이구나 싶었다. 루이가 다소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수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째 굉장히 반가워하는 거 같은데. 너... 설마 글래머 미인이 아니라 그 빼빼로 몸매의 여자한테 반했냐?”

 “헛소리!”

 

 화랑은 루이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머리를 쭉 빼고 홀 안을 기웃거렸다.

 

 “안에 없어. 바깥 야외 탁자에 앉아있어.”

 “인이야 아웃이야?”

 “인”

 “뭘 시켰어?”

 “콩나물 비빔밥”

 “...그래? 저기 오늘의 정식 주문서 한 장 주방으로 넣어줄래? 내가 이따가 결재할게.”

 “야! 너 농담 아니고 진짜냐?”

 

 루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럴 일이 좀 있어서 그래.”

 “그럴 일이라니?”

 “당사자는 전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예전에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어.”

 “하지만 저 여자는 널 못 알아보는 거 같은데? 원래 자기가 받은 건 쉽게 잊어도 해준 건 아무리 작은 것도 절대 안 잊는다잖아.”

 “저 사람은 몰라. 자신이 내게 얼마나 큰일을 해주었는지.”

 “야! 자세하게 설명 좀 해 봐. 궁금하잖아. 무슨 일이었는데? 응?”

 “그만 가 봐. 부주방장이 째려보기 시작했어.”

 “아, 그러니까 주방에서 나오라니까.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빨리 말해 봐. 앞으로도 내가 쭉 망봐줄게.”

 

 좋게 말하자면 인정이 많고 착한 성품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오지랖이 넒은 루이는 궁금한 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지옥의 사자 앞을 가로막아서 내 목숨을 구해줬어.”

 “에엑!?”

 

 루이가 괴상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동명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백장미가 찾아 갔을 만한 사람들 명단 중 가장 마지막 줄에 적힌 사람과의 통화를 막 끝마친 참이다.

 

 “도대체 어디로 내뺀 거야?”

 

 방랑벽이 있는 백장미답게 해외로 튄 것은 아닌지 몹시 염려스러웠다. 앞으로 촬영이 예정된 것만도 동명이 알기로 최소한 네 개는 넘는다. 그런데 주인공인 여자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다니 모두를 멘붕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직접 발품을 팔아서라도 백장미가 자주 출몰하던 클럽이나 주점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동명은 집에서 가지고 온 백장미가 핀업 걸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투명한 파일에 끼워 넣었다. 뭐니 뭐니해도 사람을 찾는 데는 사진을 들이밀고 물어보는 편이 가장 빠르니까.

 동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부터 뒤쪽에서 들리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뭐예요? 어? 당신은.......”

 “안녕하세요?”

 “그냥 그래요. 그런데 무슨 일인데요?”

 

 어젯밤 이 남자로 인해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본 행복을 떠올린 동명은 누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맛있는 장어였는데!’ 생각할수록 침이 고였다.

 

 “주문하신 도시락이 나와서요.”

 “아! 이리 주세요.”

 

 동명은 촌스러운 뿔테 안경을 쓴 키 큰 남자에게서 봉지를 받아 들어 확인하더니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기 이거 잘못 나온 거 같은데요. 내가 시킨 게 아니에요.”

 

 동명은 가장 저렴한 메뉴인 콩나물 비빔밥이 담긴 둥근 통이 아니라 제법 커다란 도시락세트가 들어 있는 봉지를 남자에게 다시 돌려주려 했다. 그러자 굉장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남자가 급하게 대답했다.

 

 “제가 실수로 주문하신 도시락을 쏟았어요. 그래서 대신 이걸.......”

 “그럼 다시 만들면 되잖아요.”

 “콩나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다고요? 겨우 오후 한 신데요.”

 “네, 매진입니다.”

 

 동명은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아무래도 이 촌스러운 남자는 자신에게 단단히 반한 모양이었다.

 

 ‘쳇! 겨우 도시락으로 사람을 낚으려 들다니. 뭐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는 척 하지 뭐.’

 

 동명은 못이기는 척 남자의 속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그가 자신에게 딱히 무언가를 바라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정 안되면 이 가게에 발걸음을 끊으면 그만이려니 생각한 것이다.

 

 “그래요? 그럼 하는 수 없죠. 뭐.”

 

 동명은 도시락이 든 봉지를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다 아직도 탁자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물었다.

 

 “저기요. 혹시 이 여자분 아세요? 여기 단골이신데.”

 

 화랑이 아는 얼굴이다. 동명과 늘 함께 오곤 했던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인.

 루이도 화랑이 그 미인에게 반한 걸로 오해해서 조금 전 그에게 동명의 출현을 귀띔해 준 것이다.

 

 “하긴 주방에서 일하시면 잘 모르시려나?”

 “아, 압니다.”

 “그래요? 잘됐다. 혹시 이 분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기억하세요?”

 “지난 주말에 두 분이 함께 오셨을 때요.”

 

 ‘얼씨구!’

 

 동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일기라도 쓰는 거 아냐,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이러다 스토커라도 만드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이 됐다. 하지만 우선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형편인지라 그를 격려하듯 미소 지어 주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아주 중요한 비지니스 때문에 이 분을 꼭 찾아야 하거든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그런데 이 분 자의적으로 어딘가로 숨으신 거죠?”

 

 제법 예리한데, 동명은 잠시 멈칫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했다.

 

 “이 분이 예술 계통에서 일하시는지라 신경이 좀 예민하세요. 중압감에 어딘가로 잠적하신 모양인데... 이후 일정이 엉망진창이 될 판이라서.......”

 “알겠습니다. 제가 이 분을 찾아 드리면 되는 거죠?”

 “네?”

 

 동명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찾아주다니? 기가 막혀서. 지가 뭐 코난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화랑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이 분을 찾으시도록 도와드리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야...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그런데 그게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대신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뭐야? 그럼 그렇지 맨 입으로 뭘 해주겠다고 나 설 이유가 없었다.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동명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뭘 요구하려는 거지? 데이트? 연락처? 혹시 사귀자는 거 아냐? 어쩌지?’

 

 동명이 눈만 위로 슬쩍 들어 올려 남자의 동향을 살폈다. 그는 시종 진지한 모습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돈 없어요. 시간도 별로 없고.”

 “네? 무슨.......”

 

 동명의 엉뚱한 말에 어리둥절해진 그가 되물었다.

 

 “저한테 부탁하실 게 있다면서요. 미리 말해두겠는데요, 그 쪽이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한테 무언가를 바라지는 마시라고요.”

 “아니, 저기 그 쪽이 곤란해 하실만한 부탁을 드린다거나 무언갈 요구하려는 의도는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

 

 동명은 더욱 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무언가를 공짜로 주고 무상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경계해야할 사람들임은 그녀 자신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그녀가 경계심을 내보이자 당황해서 변명하기 시작했다.

 

 “절대 곤란하게 해드리지 않을게요. 맹세합니다. 그냥 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돼요.”

 “무슨 부탁이요?”

 “매일 여기 와서 제가 드리는 도시락을 먹어주세요. 그거면 돼요.”

 “네?”

 

 이게 또 무슨 소리야? 동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보세요, 제가 무슨 결식아동인줄 아시나봐. 왜 갑자기 잘 모르는 여자에게 무상급식을 실현하지 못해 안달이세요?”

 “그쪽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에 만났다고요? 우리가요? 그게 언젠데요?”

 

 동명이 캐물었다.

 그가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뗐다. 그의 목소리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에요.”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요? 그리고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과 무상 급식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라도 있나요?”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죠. 다음에 해요. 그 얘기는. 지금은 우선 이 사진 속의 여자 분을 찾는 일이 급하신 거잖아요. 그렇죠?”

 “아!”

 

 백장미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던 동명이 목 안에서 탄식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쪽이 제공하는 도시락을 매일 공짜로 먹으면 이 사람을 찾는 일을 도와준다는 거죠?”

 “네. 그 여자 분을 찾아드리겠습니다. 몇 시간 내로.”

 “네엣? 정말요?”

 “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해주세요.”

 “......댁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화랑이라고 불러주세요.”

 

 ‘화랑이라고?’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가명이 분명했으니까.

 흥! 니가 화랑이면 나는 기파랑이다. 동명은 입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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