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부추를 듬뿍 넣고 끓인 다슬기된장국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부엌 안을 가득 메웠다.
마침 정의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동명은 재빨리 그릴에서 굽고 있던 굴비를 꺼내 가늘게 채 썬 초 생강을 곁들여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렸다.
그와 동시에 정의가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동명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여 밥공기에 3분의 2 정도만 채운 현미밥과 커다란 사발 가득 푸짐하게 뜬 다슬기 부추 된장국을 상에 올렸다.
수저를 들려던 정의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다슬기 된장국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국을 먹기 전 그는 동명을 한 3초쯤 지그시 응시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동명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신고 있는 슬리퍼 코만 내려다 봤다.
“일전엔 해물전골이었고 오늘은 다슬기 된장국이라... 미리 말해 두지만 무슨 말이든 할 생각이면 내가 이걸 다 먹고 난 다음에 해. 아까운 음식들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특히 이 건 말이지.”
냉랭한 음성으로 심술궂은 말을 한 것과는 달리 그는 아예 국을 그릇째 들고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아침 메뉴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동명은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삐죽거렸다.
‘저 못돼먹은 심보 좀 보라지. 좋아하는 걸 해줘도 투덜투덜. 내가 미쳤지? 괜히 혼자 찔려서는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걸 만들고.......’
항상 수면부족에 더해 저혈압에까지 시달리고 있는 동명은 아침에 일어날 때면 거의 비몽사몽을 헤매곤 했다. 그런 그녀가 꼭두새벽에 가락동 농수산 시장까지 가서 직접 공수해온 싱싱한 다슬기였다.
사실 그녀는 다슬기 국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슬기국은 동명이 어렸을 때 그녀를 친딸 마냥 예뻐하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즐겨 만드시던 추억의 음식이었다.
대부분의 어린 아이가 그렇듯 쌉쌀한 맛을 싫어하는 그녀를 위해 아주머니는 다슬기를 국수와 함께 새콤달콤하게 무쳐 주곤 했었다.
‘오빠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아주머니의 아들인 오빠와 함께 맛있게 먹어치우던 추억의 음식이, 그 시절이, 새삼 그립게 떠올랐다.
아무튼 다슬기란 것은 무척이나 손이 많이 가는 요리 재료다.
국 하나 끓이는데도 들여야 하는 품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일단 싱싱한 다슬기를 구해 두 세 시간 물에 담궈 해감을 한 후 소금물에 살짝 데쳐낸 후, 일일이 껍데기에서 속살을 발라내야 하는 사전 준비만으로도 무려 몇 시간이나 잡아먹는 번거로운 일인 것이다.
“한 그릇 더! 가득!”
정의가 순식간에 커다란 국그릇을 비운 후 말했다.
동명이 처음 보다 훨씬 더 푸짐하게 건더기를 담은 국그릇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밥 한술 뜨지 않고 된장만 풀어 심심하게 끓인 국으로만 배를 채운 그가 동명에게 시선을 주며 짧게 말했다.
“말해!”
“네? 무슨...”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이걸 내 놓은 거 아닌가? 변제일이라면 며칠 늦춰줄 수도 있어.”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저도 모르게 발끈한 동명이 드물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한데 그렇게 대답해놓고 보니 ‘아차, 그게 있었지.’ 라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와 속이 쓰렸다.
“그럼 무슨 속셈이지?”
“속셈은 무슨... 그냥 된장국일 뿐인데요.”
“일전에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땐 거절했잖아.”
“거절이라니... 제가 언제... 만들 줄 모른다고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억울한 마음에 동명이 항변했다.
그러나 정의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만들 줄 알게 됐다는 말인가?”
“그 사이 배웠어요. 그래서 한 번 만들어 본건데... 사장님이 싫으시다면 두 번 다시 만들지 않겠습니다.”
‘내가 이걸 두 번 다시 만드나봐라’ 속으로 씩씩대며 동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아무 의도도 없다고?”
“네! 손톱만치도 없어요!”
“그래..., 좋아! 본인이 그렇게 우긴다면 그런 거겠지. 그건 그렇고 어제 내가 제안했던 건 생각해 봤나?”
“그게......”
갑작스러운 일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던 어제 일을 떠올린 동명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어제, 퇴근을 하려는 그녀를 불러 세운 정의가 느닷없는 제안을 했다.
입주식 풀타임 업무, 파격적인 대우.
솔직히 그의 제안을 듣는 순간엔 마음이 살짝 흔들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솔깃 하는 마음만큼이나 반발심도 그에 비례해 강했다.
‘칫! 월급을 아무리 많이 주며 뭐해. 어차피 그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그의 주머니 속으로 도로 들어갈게 뻔한데.’
게다가 동명은 그의 개인적인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지금보다 단 일초라도 더 늘어나는 건 죽었다 깨도 싫었다.
만약 안 그래도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태인 그녀를 완전히 질식시켜 버리려는 의도를 지닌 게 아니라면 그는 그녀에게 그런 제안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건 좀 힘 들것 같아요.”
“이유는?”
“일단 달리 하는 다른 일들도 있고.......”
“다른 일을 그만 둬!”
“네!?”
말문이 막힌 동명이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마치 더러운 물건을 가리키는 것 같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제 그 일은 그만 둬. 언제까지 남의 잠자리나 엿보고 있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 일 역시 사장님 사업 중 한 가지 아닌가요? 그리고 제게 그 일을 소개해주신 분도 사장님이셨고요. 하루라도 젊은 몸뚱이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돈이나 갚으라면서.”
분하고 억울했다.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동명이 기어이 말대답을 하고 말았다.
정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신호다.
동명은 내심 ‘아차!’ 싶었지만 지금은 그녀도 좀 화가 난 상태인지라 매서운 그의 눈빛 공격을 꿋꿋하게 견뎌 냈다.
“그래서 나 때문에 그만 둘 수 없다는 거야? 그렇다면 잘 됐군. 그 일에서 손 뗀지 벌써 한참 됐으니까. 그럼 다 해결 된 거지?”
“아뇨!”
“정확한 사유!”
“그... 보수가 다른 일보다 좋고... 촬영도 주로 밤이나 새벽에 몰려있어서 여기 일이랑 겹치지 않기도 하고요.”
“또?”
“익숙해진 일이라서 새로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해요. 사람들이랑 친해지기도 했고.......”
정의가 짧고 강한 헛바람 소리를 냈다.
“이제까지 들어본 변명들 중에서도 가장 어의 없고 한심한 변명이로군.
남의 정사신이나 지켜보면서 더러워진 침대보나 빨고 여배우들 알몸이나 가려주는 잡일이 익숙해져서 그만두기 싫다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야.”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막 하시고... 아무튼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면 뭐지? 혹시 관음증 같은 거 있나? 남의 정사를 훔쳐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던가 하는.”
“아니에요!”
“그럼 왜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거지?”
“거부하는 게 아니고요 ... 악착같이 벌어서 빨리 빚 갚으려 그러는 거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그런 날이 올까 싶은 암울한 전망에 동명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그도 그녀의 그런 속내를 익히 알고 있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부지런히 벌라고 일부러 풀타임을 제안해 준거잖아? 그 난장판을 쫓아다니며 여배우들 속옷이나 챙기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보수를 주겠다고.
게다가 낯 설은 일은 싫다며? 잘됐군. 이 일은 익숙한 일이기도 하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빨리 갚으라는 내 말을 그렇게나 잘 듣는 너한테 딱 맞는 일이잖아? 이래도 또 반박 할 텐가?”
동명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려 애쓰며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아니 왜 이렇게 집요해? 보수도 좋고 일도 어렵지 않다는 걸 누가 모르나.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강요해? 아오! 사람이 좀 쉽게 넘어가는 맛도 있어야지.’
정의는 집요하게 그녀의 대답을 강요했다.
두리뭉실한 대답으로 일단 자리를 좀 모면해 보려던 그녀의 시도는 그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동명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냥 당분간은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요. 만약 그... 그만두게 되더라도 어차피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는 일을 봐주기도 해야 하고요. 제가 갑자기 그만두면 곤란하니까.......”
“너도 꽤나 병이 지중하군. 너 없으면 뭔가 잘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 착각 하지 마. 결국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 먹는 곳이야. 너 하나쯤 당장 빠져도 충분히 잘 돌아가.”
“사장님은!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해요?”
“내가 뭐? 헛된 망상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충고해 준 건데. 귀에 쓴 말이 일신상의 안녕에는 특효약이지.”
“저는... 아무리 좋아도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남에게 하는 것도 싫어요. 그러기... 싫어요.”
정의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 졌다.
짧고 깊은 침묵이 흐른 뒤, 그의 총평은 아주 간단했다.
“넌 아직 쓴맛을 덜 봤어.”
동명은 억울했다.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많은 부채와 그 빚에 인질처럼 잡혀 일 년 삼백 육십 오 일중 365일을 일해야 하는 내가, 이제야 겨우 월세 단칸방 하나 마련하고 이십대의 꽃다운 나이임에도 계절마다 단벌로 버티며 지지리 궁상을 떨고 사는 내가, 일에 치여 누구도 돌아보는 이 없는 삐쩍 마른 벽의 꽃이 돼버린 내가 아직 삶의 쓴맛을 덜 본 거라니!’
“억울하다는 표정이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여다보여. 하지만 너는 역시 아직 멀었어. 너에겐 아직 세상이 달콤해 보인다는 뜻이니까.
넌 아직 수면 위에 있어. 그리고 그 수면 아래는 물속에 잠긴 빙산처럼 끝없는 지옥이 이어져 있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옥이.”
“......!”
“명심해! 네가 아직 물속에 잠기지 않고 수면 위에 떠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내 덕이야. 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듣는 게 좋아.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너는 그대로 지옥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져 버릴 테니까.”
동명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가 말하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이미 또 다른 지옥 속에 떨어진 채다. 그는 절대 알지 못하겠지만.
정의는 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꼴이 심기에 거슬리는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사납게 말했다.
“좋아.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주지. 이것이 마지막 기회야. 영리하게 결정해.
그리고 참고로 말해주자면 꼭 그 일을 계속하고 돈도 벌고 싶다면 잡일이 아니라 차라리 카메라 앞에 직접 서는 편이 좋아. 하기야 누가 마른 장작 같은 몸을 가진 여자를 보고 싶겠냐마는.”
‘우씨! 보자보자 하니까 사람이 보자기로 보이나.......’
가장 아픈 곳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그에게 분을 참지 못한 그녀의 입에서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대답이 불쑥 튀어 나갔다.
“뭐 그런 제의도 받긴 했죠.”
“뭐?”
“데뷔하면 A급으로 출연료를 챙겨주겠다는 감독들도 있었어요.”
“......!”
정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나마 흔들리는 것을 본 동명은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그에게 반박할 거리가 있다는 데에 기쁜 나머지 입단속 하는 것도 잊고 말을 이어나갔다.
“사장님이야 빅토리아 시크릿 무대에나 설법한 미녀들 외엔 눈에 차지도 않으시겠지만 사람들의 취향이 모두 사장님과 같지는 않잖아요. 저도 나름.......”
“누구야?”
“네?”
정의의 입 꼬리가 드물게 위로 살짝 올라갔고 목소리 또한 냉기 펄펄 날리던 평소와는 달리 조금이나마 온기를 머금은 듯 들렸다.
불길한 징조다.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었던가, 하는 뒤늦은 자각에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녀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은 것과 다름없었다.
“누가 네게 그런 제안을 했지? 장 감독인가?”
“아, 아니요! 장 감독님은 절대......”
“그럼 누구지? 김 감독?”
“아니요!”
“그럼 누구야?”
“그게... 사장님은 잘 모르는......”
“내가 잘 몰라? 이 바닥에서 내가 모르는 인간이 있을 것 같아? 혹시, 거짓말을 한 건가? 그냥 나를 한 번 떠 보려고?”
“떠보다니... 제가 사장님을 한 번 떠봐서 뭐하게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그냥 촬영장에 들렀던 사람인데 거기서 제안 받았던 거라서.”
“쯧!”
정의가 짧게 혀를 찼다.
“너!”
“네!”
“혹시 앞으로도 그런 제안을 하는 놈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당장 나한테 전화 걸어.”
“네? 왜요?”
“그건 쓰레기를 찍는 일당들이야. 최악의 밑바닥에서 노는 위험한 놈들이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던 분노가 눈 녹듯 녹아 사라졌다.
뭐라고 타박을 하던 간에 그가 동명의 안전을 염려해서 했던 말이라고 생각하니 찔레꽃 가시 같던 말들마저 솜털처럼 보드랍게 느껴졌다.
“......네.”
“어디서 굴러먹던 잡놈들에게 원금은 차치하고 이자도 못 받은 채 뺏길 순 없지.”
“넷?”
“내 집에 있는 뼈다귀를 누가 몰래 가져가는 건 용서할 수 없어.”
“뼈다귀라니..., 저기 혹시 그 뼈다귀라는 게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
“왜 뼈다귀라니까 듣기 싫어?”
동명은 어이가 없어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그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더러 뼈다귀라고 하시는 건 좀 그런데요.”
“그럼 신선한 고기라고 해 줄까?”
“사장님!”
“은동명! 기어오르지 마! 넌 아직도 네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 눈엔 넌 그저 작고 볼품없는 뼈다귀일 뿐이야.”
“...... 인간인 사장님이 그렇게 별 볼일 없는 뼈다귀인 저 같은 걸 갖고 계셔서 뭐하시려고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동명이 부루퉁하게 물었다.
정의의 한없이 차가운 눈길이 그녀에게 내리 꽂혔다.
“인간? 아니, 나는 인간이 아니야. 예전에는 아주 잠깐 인간이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들개다. 그러니까 너 같은 하찮은 뼈다귀는 땅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굶주림이 극에 달할 때 뼈째 삼켜 버릴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