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輓歌) ; 죽은 이를 위한 노래
1949년 2월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불쌍해서 으짜쓰까!”
“오메, 오메! 천불나서 못살겄네!”
그날따라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대청 마루 끝에서 흰 소복을 입은 어머니는 손뼉을 치며 곡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놓았단 표현이 맞다. 머리는 산발하고 펄쩍펄쩍 뛰다가, 손뼉을 치는가 싶더니, 악을 쓰며 욕을 하다가, 다시 대성통곡이다.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몸짓에 죄다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다. 얼마나 오래도록 진을 뺐는지 입가 언저리엔 하얀 거품처럼 침이 말라붙어 있었다. 기둥을 치다가 어루만지다 도무지 끝이 나질 않을 서러움이었다.
분합문 새로 빼꼼히 나이 어린 두 딸들이 본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리고 건너 큰 방엔 몸이 검푸른 빛으로 퉁퉁 붓고 여기저기 피투성이인 큰 오빠가 죽어있었다. 사람이 죽은 것도 처음이거니와, 그렇게 맘 착하던 큰 오라버니의 죽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죽음이 믿기지 않았고, 큰오빠가 그렇게 맞아 죽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할 일, 더욱이 죽었다면 슬퍼서 울 일을 왜 그리 소리치고 입에 버끔(거품) 물고, 정신이 나가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에는 슬픔이 아니라 호기심뿐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동네 어느 누구 하나 말릴 수도 없고, 그저 조용히 한숨만 쉬며 진정되길 바라고 있었다.
“빨랑 문 닫으라고!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이제 중학생이나 된 오빠의 울먹이는 호통이다. 동생들이 어머니의 광분한 모습을 보는 게, 형의 주검을 보는 게 미운 일은 아니나, 단지 그렇게라도 화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슬픔 대신 호기심 어린 저 눈빛이라니... 철이 없다는 것은 슬플 때 슬프지 않다는 것인지, 자꾸 동생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아니, 어쩌면 제 자신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인 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니들은 이게 그냥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보고 있지 말란 말여!”
매서운 오빠의 눈초리에 동생들은 얼른 문을 닫았다. 그리곤 혹여라도 들어올까 문을 걸어 잠그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조용히 하란 말 들었제? 인자 우린 자는 척 하는거여...”
“그래도 엄니는 봐야제...”
“쉿, 아부지 오시믄 그때 나가보게!”
코흘리개 동생은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하고, 언니라고 해봐야 이제 여덟 살이 갓 넘었으니, 이런 일에 대해 자세히 알 순 없었다. 단지 며칠 동안 경찰들과 무서운 아저씨들이 들락날락하며 집안을 헤집었고, 그럴 때면 조용히 어머니와 숨어 있기 급급했었던 일이 있던 터였다.
“혹시 내가 순심이 꿀밤준 것 때메 그랬으까?”
혜진은 일전에 순심이란 옆집 여자 애가 얄미운 짓을 하길래 꿀밤을 때렸는데, 그날 어찌나 섧게 울던지 조마조마한 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일로 경찰이 닥쳤나 싶었었다.
“언니가 그 때 순심이 때려가꼬...”
“쉿! 니는 암 소리도 말고 걍 있어!”
그 때 아버지가 동네 청년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오셨다. 딸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마중나가려 했지만 작은 오빠는 또다시 엄포를 놓았다.
“느그는 끼어들지 말고 여그 가만 있으란마다!”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올려봤지만, 작은 오빠는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재차의 애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생들의 사정에 작은 오빠는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 방에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사실 우는 어머니보다 피투성이로 누워있는 큰 오라버니에 눈이 더 갔다. 왜 죽어야 했는지, 죽으면 또 어떻게 되는지 한참 호기심 많은 나이였다.
“치, 나도 볼라고 했는디...”
어린 혜숙은 땅을 발로 쿵쿵거리며 못마땅했다. 그래도 나온 게 어딘가, 아버지가 들어오시자 쭈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고 우는 어머니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딸들을 끌어안자 잠시 정신이 돌아온 듯 딸들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비볐다.
“오메, 내 새끼들, 혜진이, 혜숙이... 니들 보고 살아야제 험서도... 오메 성균아!”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의 눈물에 공명하듯, 어린 혜진, 혜숙도 같이 울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젊은 아낙이 부엌에서 들어와 어머니를 함께 끌어안았다. 큰 오빠와 갓 결혼한 새댁이었다. 이제 막 입덧으로 임신을 알았는데, 신랑은 딴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품에 안긴 혜진이의 시선은 아버지가 들어가시는 방으로 향했고, 죽어있는 큰 오빠와 있었던 일을 더듬어 보았다.
큰 오빠는 여수항 부근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을 뿐, 자세히는 모른다. 항상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고, 이야기를 잘 해주었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니가 크면 그때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옆에 있는 것처럼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세상이 올거야...”
“시방 나 놀리는거여, 뭐여? 그기 뭔 말이당가? 전화기가 얼굴도 보여준다고?”
“그럼 그 시대는 라디오보다 더 좋은 게 나올거여!”
“그기 뭐신디?”
“테레비라고 사람이 네모난 상자 안에서 움직인다고 하드라고...”
“오빠는 봤는가?”
“아녀, 나도 듣기만 했제!”
텔레비전이 54년에 처음 국내에 나왔으니, 49년 시골은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큰 오빠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해주곤 했다. 혜진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그만큼 신식 문물에 대해 잘알고 있는 사람을 없을 정도였다.
“아따, 거 서울서 꽤나 글 좀 읽으신 분이고만!”
“인테리랑께!”
인테리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부는 많이 했으나 일도 못하고 아무 쓸 데도 없는 사람을 그냥 <인테리>라고 하는 줄 알았지, 인텔리전트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서울도 아닌 이곳 담양 촌에서는 칭찬이 아닌 조롱이었다. 좋은 대학 다니다말고 여수 공장이나 어디 시골에서 밤에 사람들 모아서 공부나 가르치는 야학선생이라고 했으니, 앞에서는 저리 말해도 돌아서면 <헛똑똑이>라 비웃는 곳이었다. 게다가 몸도 병약해 야학교사도 얼마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하필 그곳에서 여순 반란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환영받을 리 만무했다.
“여수서 왔다며?”
“워메, 그 동네 시방 난리가 났다구만!”
그곳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란 소문이 나돌았으니, 엉뚱하게 같은 마을에서 자란 이 집 아들 성균도 그만 오해를 받고 있었고, 그 오해가 만들어낸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오메, 우리 불쌍한 내 새끼...”
어머니는 큰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거적에 아무렇게나 싸여 수레에 실려 온 어젯일이 황망하기 그지없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새벽부터 서청(서북청년단)에서 데려가더니만 저녁에 송장을 만들어 돌려보냈으니 그 지경이 될 법도 하다.
“아따, 니는 밥이라도 해주제 그랬냐?”
그 말을 듣고 있던 큰 며느리도 울면서 말을 잇지 못한다. 어려운 시어머니를 겨우 안아드렸지만 오히려 역정을 내시고 만다. 화풀이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누군들 밥이라도 따숩게 해 먹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사단이 난 것은 불과 어제 새벽이다. 새벽부터 청년단원 2명이 남편을 찾았다. 불길한 기분은 들었지만 잘못도 없는데 설마 별 일이 있겠나 싶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밥이라도 채려 드리까에?”
라 분명히 물어봤다.
“산 사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디, 그만 일 보소! 내 금방 다녀오리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웃음 한 켠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밥 한 끼 못 챙겨 주었는데 홀연히 저승 길 가버린 남편에게 미안함은 어머니보다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연히 “산 사람”이라는 말에서 남편은 죽을 것이란 예감을 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말이라도 해줬으면...’
푸념같아도 할 수 없다. 처음 만날 때도 그랬다. 뭐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단 말도 없었던 사람이다. 성균은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한없이 꺼리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촐싹대지 않는 멋이었다. 여수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나긋한 목소리로 한글을 가르치는 성균에 반했다가 몸이 약해 요양간다는 말에 불쑥 따라나서 이곳까지 왔으니 그때 당시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연애 결혼이었다. 좋았던 것도 아주 잠시, 예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람들은 그 흉흉한 일이 일어나니 모두 며느리를 잘못 들여 그랬다는 말만 하고 있었다.
“이기 다 색시를 잘못 들여서...”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중매도 없이 지들끼리 방정맞게 연애결혼헝께 그라제...”
“자식 농사 잘 했는디 요망한 년이 들어와서... 에라!”
마을 사람들의 생각도 그랬거니와 자신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못난 죄인이었다.
“내 같은 년이 무슨...”
그 날 변고가 생긴 뒤로 입에 인이 박힌 푸념이다. 그래도 입 밖으로 내어선 안될 소리였다. 아내의 모습도 궁색하기 짝이 없다. 슬픔은 슬픔이고, 뱃속의 자식 걱정에 더 이상 슬퍼할 수도 없고, 남은 사람 밥 걱정도 해야 하므로, 게다가 염(殮)도 준비해야 하므로 슬플 겨를도 없었다. 정신을 놓을 지경인데 정신을 놓을 순 없는 형편처럼 궁색한 것은 없다.
어머니는 숫제 그 비를 맞으며 마당에서 한 차례 곡을 하기 시작했다.
“오메, 오메, 내 아덜! 이제 가믄 언제 보나, 아이고~ 아이고~”
방에서는 빗소리, 곡소리,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에 다녀오셨는게라?”
“그래, 서에서 무슨 진술서를 쓰라고, 내 아들이 그리 나쁜 놈이었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긴 침묵을 깨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위를 잡고 아들의 옷을 자르고 염을 했다.
“성현이 니도 다 컸응께, 눈 돌리지 말고 잘 배워둬! 눈물 나도, 분이 나도 느그 형이 이라고 된 거 똑똑히 지켜봐, 글고 어디가서 딴 소리 말고...”
“야, 아부지...”
흐느끼면서도 염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며 아버지를 도왔다.
“쑥이라도 넣는단마제...”
향이 강한 쑥을 끓인 물로 시신을 닦으려 하는데, 이제 2월이라 봄 쑥은 멀다. 그래 그냥 물만 끓여 솜이불에서 솜을 꺼내 아들의 시신을 닦아주는데 스멀스멀 시신에게서 나오는 악취에 미안해 하는 말이었다. 썩은 내가 결코 싫은 게 아니었다. 엉겨붙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고, 옷은 잘라내고, 간간히 보이는 가시쪼가리를 다 빼냈다. 얼마나 잔인한 고문이었는지, 손발 끝마다 대꼬챙이가 박혀있었고, 다른 부위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냥 한 번에 죽인 게 아니라, 하루 종일 고문으로 죽였던 비정함이 느껴진다. 인두로 지진 자국이며, 생니를 뽑아낸 자리며, 너덜너덜 뜯긴 살자국에, 다 뽑힌 손톱들, 게다가 머리 한 쪽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하게 함몰되었으니 어머니의 반응도 이해될 만 했다.
아버지는 자기 몸에서 빼내는 가시마냥 조심스럽게 다 빼고 정성스럽게 시신을 주무르며 닦아주고는, 쌀도 입에 넣어주고 마지막으로 삼베 천으로 결박까지 해서 염을 끝냈다.
“내, 내... 잊지 않으마...”
큰 아들의 죽음에 담담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잠시 후 오열하는 아버지의 입에 피가 흘렀다. 입술을 깨문 줄도 모르셨을 것이다.
1949년 2월의 일이다. 비는 어느새 밤이 되자 부슬부슬 눈이 되어 온 마을을 덮었다. 담양군 수북면 미산이라 부르는 작은 동네, 삼인산과 영산강이 만나는데다 좋은 평야까지 드리운 풍광이 좋았던 그 동네에 그 집을 시작으로 온통 곡소리가 가득해졌다. 현재는 풍수리로 되어 있지만 그때에는 미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람들 말이 물고기 꼬리 산이라 했지만, 용의 꼬리라 보는 게 맞다. 장성 동현리 쪽에 용의 머리가 되는 용두산이 있고, 그 산으로 쭉 이어진 허리에 용암리, 용흥리, 용강리가 있다. 그 산세의 끝이 영산강에 닿아 있으니, 미산은 용미산이 되는 게 맞다는 소리다. 조선 태조가 꿈에 삼인산 계시를 받았고, 산 북쪽에 아래 있는 삼인동 마을은 박해언이 풍수지리설을 따라 명당이라 하였건만 그때만큼은 박복하기 그지없었다.
일이 벌어지기 몇 달 전인 1948년 12월 담양읍내 장터에서 공개총살이 거행되었다. 공산당의 말로가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무 기둥에 묶고 공개적인 총살을 한 것이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데, 한가하게 주역을 보며,
“상화하택(上火下澤)이네. 불이 밑에서 물을 끓여야 하는데 물은 아래로 내려가고 불은 위로 올라갔으니 사람들의 생각과 나랏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동떨어진게야...”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 힘든 일제시대에도 그 집만큼은 큰 변고가 없이 지났으니, 지금까지의 일로 나중 일에도 안심하고 말았던 것이다.
“담양은 못 담(潭)에 볕 양(陽)이 깃든 그야말로 이름조차 수화기제(水火旣濟) 아니겄는가?”
평소 담양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말이었다. 정든 곳이기도 했거니와 담양은 여간 가물어도 물이 끊이질 않는 곳이며, 햇볕까지 좋아서 떠나질 못했던 곳이었다. 당장 집만 해도 그렇다. 마을 여기저기로 실개천이 나오는데, 담 안쪽으로 물이 들어와 밖으로 나가는 물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았고, 여름엔 어찌나 시원하든지, 물맛도 달거니와 가족들이 씻고 쓰고 다 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이런 곳에 햇볕이 가득 들어오고, 대청에 오르면 담 밖으로 마을이 한 눈에 다 담겨지니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다른 덴 다 위험해도 담양은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수화기제, 물과 불이 적당하다 했는데, 덕업을 쌓으면 적이 없다 했는데, 평생토록 한학을 수학했던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그를 넘어뜨렸다. 인근에서 총살형이 거행되었음에도 남의 일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자신의 집에 커다란 변고가 생긴 것이었다.
“어찌하여 내 그 괘를 내 집에, 내 아들에 대보지 않았을꼬?”
비단 담양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죄명은 “공산주의자”가 전부였다. 나라를 뒤엎었거나 사람들을 죽였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사건을 일으켰다면 모르겠거니와, 이런 시골에서 공산주의자라 낙인찍힌 사람들은 아닌 사람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냥 쑥맥 시골 사람들이었다.
서구에서야 공산주의 혁명이네 뭐네 해서 난리가 났지,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생소한 나라에서 무슨 공산주의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저 지주에 대한 반항이나 막연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 정도였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의 간곡한 바람은 친일파 청산이었지만, 정부는 그 소원을 외면했고, 공산주의자들만 죽이는데만 몰두해 있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을 공산당이라는 죄명으로 옭아 죽였다. 심지어는 공산주의가 뭔 줄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까지 공산주의자라는 죄명으로 죽였다. 중세 마녀사냥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빨간 책은 쳐다봐서도 안되는 금서였고, 마르크스나 레닌은 입에 올렸다간 당장 잡혀가야 했다. 아니 어수룩해보여도, 동네 사람들에게 밉보여도 명단에 오르면 여지없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낮에는 부역에 사상교육까지 받아야 했고, 밤에는 공비들이 약탈하는 것을 도와야만 했다. 입에 총을 들이미는데 쌀이나 닭을 내어주지 않고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런데도 다음날이 되면 공비들을 도왔다는 죄목을 씌워 죽였다. 앞으로 가도 맞고, 뒤로 돌아가도 맞아야 하는 딜레마의 시대였다. 좌경(左傾), 용공(容共)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까지 누명을 쓰고 죽어야 했다. 소위 껀수 올리기에 열을 올린 자들은 일제 앞잡이보다 더 잔혹했다.
제주에서 한 어린 아이가 말을 탄 병사에게 다친 일이 있었는데, 시민들이 행렬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총으로 난사한 일을 계기로 반경(反警) 시위가 일어났다. 이런 일로 미군 부대에서는 제주도민 70%가 좌익이라 호도하며 그 후 7년 동안 근 3만 명을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다. 밥하다가 죽었으며, 자다가도 죽어야 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한라산에서 쫓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 산에 올랐다고 죽였고, 올라간 자의 부모라고 죽이고, 자식이라고 죽였다. 제주도민 70%가 좌익이라는 말도 되지 않을 미군의 조사에, 우리나라는 그 수만큼 죽여서 증명해야 했다. 이 사건을 <제주 4.3 사건>이라 칭하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가 여수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이틈에 남로당 공산주의자들까지 가세하여 진흙탕도 이런 진흙탕이 없었다. 눈뜨기가 무서웠고, 눈감기가 무서운 곳이 되었다.
기록적인 전쟁이야 2년 뒤에나 있을 일이지만 그곳은 이미 전쟁이었다. 해방이라고 좋을 게 전혀 없었던 시기였다. 사람의 목숨이란 게 껀수 취급당하던 시절이었으니,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들이나, 아니면 국군과 경찰들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이 된 이들이 “공비(共匪)”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산에 숨어들게 되었다. 담양 역시 내장산~병풍산, 무등산~추월산, 강천산~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밤에는 반란군 때문에 괴로웠으며, 낮에는 국군 때문에 괴로운 게 그 때 그곳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생활(生活)은 두 글자 모두 산다는 뜻이 들어있지만, 죽음이 사방에 드리워져 있었다.
미산의 이 집 큰 아들, 최성균도 이런 시국의 흐름에 비참하게 죽었다. 대대로 학자 집안의 장남, 그것도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다말고 야학교사를 한다는 게 아니꼬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집에서 나온 빨간 책, 공산주의 책이 발견되었으니 더더욱 난리날 일이었다.
“이 책 어디서 났소?”
“난... 난 모르는 일이오. 집에 책이 있길래 그냥 보다가 투쟁하라는 말에 버렸소...”
“아니 그게 말이 되냔 말이지, 빨간 책이 어디서 났는지 말하라우!”
어두운 바닥, 의자에 묶인 채 그 바닥에 쓰러져있고, 너덜너덜한 옷과 살이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미 고문당하는 자의 눈은 빨간 인두에 의해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딱 입과 귀만 남겨두었나 싶다. 듣고 답만 하라는 식이다. 일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진 않았을 고문이다. 이곳에서 최성균은 장차 태어날 아이 이름을 부르다 차갑게 죽어갔다.
“혀... 형석아...”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