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8월
“코노가 최쵸무식쎈쎄이노가데쓰까?”(이 집이 최첨식 선생의 집입니까?)
체구가 작은, 안경을 썼고 더운 여름날에도 말쑥하게 차려입은 일본인이 꾸러미를 싸들고 방문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기백이 있었다.
“누구시오?”
“하이, 오쿠보데쓰. 오아이 데키떼 우레시이데스.(예, 오쿠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성균의 아버지 최첨식은 담양에서 퇴계학의 정통을 잇고 있다 하여 여러 학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소문이 일본에까지 났었던 모양인데, 오쿠보 상이 지금의 광주 동명동 자리인 <농장다리>라고 부르던 곳에서 불원천리(천리를 멀다 않고)에 불치하문(아랫 사람에게 물어보길 부끄러워 않고)하고 찾아온 것이다.
“나를 스승으로 맞이한다는 게 과연 이치에 맞는가 모르겠소!”
단호하게 거절하려 했다.
“아노, 아따시 고오고끄(황국) 사람이어서 배우고 시포도 배울 수 없스므니까?”
집요하다. 주인을 만나기도 전에 가지고 온 보따리를 아이들에게 먼저 주었고, 이미 육포 몇 점은 아이들의 입에, 그리고 쌀과 굴비는 부엌으로 들어가려할 때,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못먹고 못살아도 사람이라면 예의는 지켜야지, 어딜 묻지도 않고...”
잠시 손님 앞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아이들을 훈계하려 했는데, 아차싶었다.
“사라므노 레이기(예의)를 배워야 하므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오쿠보 상은 간절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꼭 배우고 돌아가겠단 의지다. 최첨식은 마지못해 허락했고. 오쿠보 상은 여러 번 절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올 때마다 먹거리와 신학문의 책을 가지고 오길래 그만 가져와도 된다고 했으나, 한사코 사양하며 선물을 건넸다.
“공자님도 수업료를 이렇게 받았지요?”
참 편안한 웃음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예를 지키려 했고, 더 열심히 배우려 한 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음은 사실이나 마음 놓고 웃을 순 없었다.
“아따, 무슨 일본놈이 자꾸 찾아온다요?”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하진 않을 순 없었다. 대체로 반일 정서가 대부분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이 되었다.
“내가 봉께, 순사들도 쩔쩔매던 것 같은디...”
오쿠보 상이 다녀간 후로 순사들이 찾아오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던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도 어느 누가 되었건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갔을 정도이니 야박하게 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마을 최고의 지성인 최첨식 대감댁 일이지 않은가? 나쁜 일 한 번 해본 적 없고, 늘 꿋꿋하게 마을 대소사를 주관하였던 어르신의 일이라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딱 한 집만 빼고 말이다.
“니기럴, 워째 먹고 살 만해징께, 순사님들이 고만 하라고 헌 지 모르겄어!”
곰같은 몸집에 단발, 눈은 매섭게 찢어진 남자가 자다 깬 사내 아이 둘을 꿇어앉게 하고 술을 마시면서 하는 말이다. 집에 소중히 모셔져 있는 완장과 몽둥이가 그의 직업을 알게 한다. 순사 앞잽이로 포악하고 잔인하기 그지 없던 자였다. 오쿠보 상이 오기 전부터 순사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에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순사들조차 꼼짝 못하는데 앞잡이라고 딱히 할 만한 일은 없었는데, 할 일이 없다보니 술을 마시고 자식들을 붙잡아 놓고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선 참 공포스러운 시간이다. 작은 아이는 그런 아비만 보면 오줌을 싸곤 했다. 아버지는 똥오줌도 못가리냐며 또 행패를 부렸다. 형 봉철은 동생에 비해 준수한 편이지만, 동생 봉석은 동네에서 반푼이라 불렸다. 칠푼이, 팔푼이도 아니고 사오푼 쯤 된다는 뜻이다. 소문에 어머니도 맞다 못해 도망갔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니는 니 동생은 반드시 챙겨야 혀!”
이 말만 들으면 옳은 소리다. 하지만 옳은 소릴 한다고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자식 앞에서도 옳은 사람인 척하고 있었고, 자신의 능력으로 둘째를 키울 순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뜻이다. 그렇다고 곱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늘 귀를 잡아당기다가 쥐어박으며 이 말을 해대곤 했다. 그런 봉철이 동생을 고분고분 데리고 다녔을 리 없다. 그래도 무서운 건 봉석의 주변 어딘가에 항상 있었다는 점이다.
“갸는 나이가 어려도 매섭드랑께...”
마을 사람들이 그런 봉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봉철은 자기 아버지를 꼭 빼닮았으나 별로 말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동네 주민들의 앞에서는 눈도 제대로 못뜨면서 뒤에서는 항상 노려보듯 보고 있었다는 게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애들 속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속내를 모를 양반은 따로 있었다.
오쿠보 상은 농장다리 옆 형무소 소장으로 근무하다보니 악명이 높았지만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늘 정성을 다했다는 게 뒤늦게 알려지게 된 사실이다. 자신의 직업 역시 최첨식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최첨식 역시 직업을 묻지 않았다. 학자이자 장교로 본국에 돌아가면 요직에 오를 그였지만, 학자인 자신을 가장 좋아했다.
“고레와... 신가쿠모노(新學問) 수세끼(書籍)이므니다.”
그는 시간 나는대로 성균, 성현 두 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과 함께 여러 신기한 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첨식에게 배우면서 딱 한 번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 늘 배우는 자세도 적극적이었다.
“오늘은 시구(鳲鳩)편 시경-111 국풍 / 조풍(曹風) 제3편 시구4장(鳲鳩四章)
을 강(講)하겠네.”
“鳲鳩在桑하니 其子七兮로다 淑人君子ㅣ여 其儀一兮로다 其儀一兮하니 心如結兮로다
鳲鳩在桑하니 其子在梅로다 淑人君子ㅣ여 其帶伊絲ㅣ로다 其帶伊絲ㅣ니 其弁伊騏로다
鳲鳩在桑하니 其子在棘이로다 淑人君子ㅣ여 其儀不忒이로다 其儀不忒하니 正是四國이로다
鳲鳩在桑하니 其子在榛이로다 淑人君子ㅣ여 正是國人이로다 正是國人하니 胡不萬年이리오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 어진 군자여, 그 위의가 한결같도다. 그 위의가 한결같으니 마음이 맺은 것 같도다.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는 매화나무에 있도다. 어진 군자여, 그 띠가 흰 실이로다. 그 띠가 흰 실이니 그 고깔은 아롱지도다.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는 가시나무에 있도다. 어진 군자여, 그 거동이 어긋나지 않도다. 그 거동이 어긋나지 아니하니, 이 사방의 나라를 바루리로다.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는 개암나무에 있도다. 어진 군자여, 이 나라사람들을 바루리로다. 이 나라사람들을 바루니 어찌 만년을 아니하리오.) 참고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입니다.”
“뻐꾸기가 그렇게 군자같던가?”
“하이, 보쿠기노 소리도 크고 늘 위엄있게 앉아 있스므니다.”
“뻐꾸기는 자식들을 키우질 않는다네, 대신 몸집도 작은 박새둥지에 알을 낳고 머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어. 그 새끼도 얼마나 잔인한지, 나머지 알들이나 박새 새끼들을 다 둥지 밖으로 밀어내 죽여버리지. 혹여 박새가 잘못 키우는가 싶으면 뻐꾸기들은 즉시 박새를 죽여버린다네. 박새는 제 새끼는 못키우고 엉뚱하게 뻐꾸기 새끼를 키워야 하는 것일세.”
“난다요(뭐라구요)? 코이샤코 아야마르(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코이샤쿠노 소위다(해석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이것은 풍자에 들어 있으니 이 해석이 맞네!”
오쿠보 상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위험한 발언이 이어질 것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반항의사를 보이는 스승의 발언을 멈춰야 했다. 그러나 최첨식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식들은 다 여린 박새들에게 맡겨두고 나라를 바루겠다고 하니 말이 된다 생각하시는가?”
오쿠보 상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있던 성균 역시 얼굴이 굳어 있었다. 목숨을 걸기로 작정한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義)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는가?”
“불편부당(不偏不黨), 사리사욕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의입니다.”
“지금 황국(일본)과 조선의 관계도 의라고 생각하시는가?”
감히 해서는 안될 질문이었지만, 오쿠보는 냉정하게 답을 했다.
“조세이노(조선이) 힘이 약해서입니다.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 늘 강했어야 하는데 조선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황국(일본)은 시중(時中), 때에 알맞게 (메이지)유신을 했기 때문에 강할 수 있었스므이다.”
“온통 무장을 하고 죽더라도 싫증나지 않을<袵金革 死而不厭> 강함은 바른 강함이 아닐세.”
“난데스까? 그 강함이노 아니면 화이불류(和而不流)도, 중립이불의(中立而不依)도 할 수 없지요? 황국은 막히는데 없이 끝까지 뻗어나가니<不變塞焉>, 의라 하겠스므이다.”
‘그게 용기는 있으나 예가 없으므로 난리를 일으키는 것<勇而無禮則亂>이야!’
최첨식은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입 밖까지 나오면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자 재빨리 오쿠보 상이 고개를 숙이며,
“요이시(좋습니다), 센세이므노 말씀을 삼가 받들겠스므이다.”
최첨식의 말을 웃으며 가로 챘다. 사제의 정을 잃긴 싫었던 마음이 강했던 모양이다. 시경에 나온 구절로 화두를 시작해 일본의 잘못됨을 꾸짖고 싶었지만 오쿠보의 학문 역시 상당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데 무력만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었다. 조선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을 다 정리하고 땅의 기운을 파악해 말뚝을 박아놓고, 조선의 모든 문화와 습관까지도 다 파악하고 점령하는데 자료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 정세를 놓고 보더라도 당할 만하니까 당했을 만큼 조선은 무지했고, 일본은 철저하게 야비했다. 친일을 했던 누구라도 일본은 망하지 않을 나라였고, 조선은 불쌍한 나라라 여겼다는 것은 절대 빈말이 아니다. 최첨식 또한 이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남은 건 한학 밖에 없다는 자부심 말이다. 오쿠보 상의 표정은 도무지 알 길 없었다. 일본에도 유학이 없는 것은 아닐텐데, 굳이 이 시골까지 내려와서 배우면서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면 감탄하는 경지였으니, 만나기 전 그리웠고, 헤어지면 다시 그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야속하게 빨리 지나갔다. 사제의 정은 이제 그들의 원과는 달리 멈추어야 했다. 1944년 12월, 오쿠보 상이 부대원들을 시켜 차에 싣고 책을 가져오게 하였고 정중히 작별 인사를 고하였다. 군인들이 타는 트럭에 책과 이것저것 살림살이를 다 꺼내 집 앞에 놓았다. 집에는 더 들어갈 자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쿠보는 가족들과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첨식의 가족에게 절을 하였다. 이 파격에 따라왔던 군인들조차 놀랐을 정도였다.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더 배우고 싶지만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안타깝스니다.”
“아쉬우이... 자네같은 이가 조선에 몇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여기 주역 계사전을 풀이한 건 자네에게 줌세!”
“아리가... 아니 참 고맙스므이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 해 주시지요.”
평생 남에게 부탁같은 걸 해본 적도 없이 살아왔다. 소를 팔 때도 중개상에게 술과 돈을 찔러줘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 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아온 게 자부심이었는데, 꺼내야 할 말이 있었다.
“실은...”
마을 사람들이 오쿠보 상의 영향력을 알고 여러 차례 상의해왔던 일이다. 앞잡이 봉철이 아버지를 죽이는데 순사들이 묵인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었다.
“부하들에게 시키면 될 일인데... 굳이 그리 하시겠다면 사고사로 처리하도록 하겠스므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오쿠보 상은 첨식의 아들들을 만나,
“우리 학생들은 대학엘 가야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성균 상은 몸이 더 강해져야 하고, 성현 상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길 바란다. 내가 땅에 떨어진 박새새끼들을 키워야지...”
하며 두 형제에게 대학에 갈 돈을 꺼냈다.
“도꾜로 올 수 있으면 내 기꺼이 키워주마. 아버지에겐 내 떠난 후 말하면 된다. 그게 주는 이와 받는 이의 예의이다. 이곳에 와서 직무상 원치 않은 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사는 간략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나와 오쿠보 상을 배웅했다. 어떤 강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오쿠보 상은 차에 내려 다시 한 번 마을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밤에 봉철의 집에 모였다. 다같이 날카로운 죽창과 횃불을 들은 채로 말이다.
“상갑(봉철의 아버지)이 자네 게 있는가?”
“아니 머헌디 이 밤에...”
봉석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지만, 봉철이와 그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위세 등등하게 쳐들어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육시럴 놈을 그냥!”
아무리 힘이 세도 장정 여나믄 명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갔다. 봉철이가 아무리 달려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힘이 없었다.
“느그 아부지는 죽어도 싸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다요?”
말을 잘 꺼내지 않았던 봉철이지만 그 순간만은 악을 쓰며 반항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상갑을 죽창으로 여기저기 찔렀다.
“너 이 새끼, 인자 니는 디져야 써!”
“어디서 앞잽이 노릇을 혀?”
최상갑은 이미 목을 찔려 아무 말도 나올 수 없었다. 땅에 쓰러진 그를 사람들은 빈틈없이 죽창으로 찔렀다. 머슴 출신으로 순사 앞잡이가 되어 출세까지는 아니어도 마을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좋았는데 이젠 명을 달리 해야 했다.
“이번엔 자식 놈의 새끼도 죽여브러야제!”
“옳소!”
마을 사람들은 의기투합하여 후환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최첨식이 이를 막았다.
“이제 그만들 허시게, 아버지의 죄로 아들들까지 죽여야 한다면 이건 금수만도 못한 짓이야!”
더 이상의 반박할 수 없었다. 봉철과 봉석 형제를 최첨식이 잘 맡아 키워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일단 이렇게 죽였어도 사고사로 처리하게 해준 것만도 어딘가? 마을 사람들은 마을 한 쪽 대밭에 그의 시신을 던졌다. 대밭 위쪽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영락없는 사고사였으며, 사건도 일어나기 전부터 사고사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봉석이 헤헤거리는 짓이야 변함없었지만,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말없던 봉철이 수다스러워졌다. 동네 사람들 누굴 만나도 인사를 꾸벅 했고, 살갑게 다가갔었다. 동네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어르신의 덕택이라 믿고, 봉철 형제가 올 때마다 밥을 퍼주곤 했다.
“없는 살림에 이거라도 먹고 살자!”
“고맙네유, 지들 힘 필요한거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시랑께요!”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았다. 성균보다 개월 수가 적어 봉철은 성균을 형님으로 대했으나 그렇다고 하인 부리듯 한 적 없었다. 함께 공부하는 것도 더 열심히 하길 바랐으나, 봉철은 한사코 공부에 있어서는 손사래를 치곤했다.
“자네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겄는가?”
“지가 무슨 공부를 혀요? 지들은 그냥 놉이나 받고 살믄 되아라!”
“그래도 명석한 머리 그냥 썩히진 아깝네 그려.”
“아녀라, 공부헌다고 동생 못보믄 안되지라. 그저 형님이나 성공하셔서 지들 거둬주시믄 감지덕지허겄구만요.”
성균은 인근 동네 동갑 친구 3명과 의기투합했다. 모두 책읽기를 좋아했고, 어릴 때부터 함께 학교를 다녔으며, 부모님 모두 다들 교류가 끊이지 않던 죽마고우들이었다. 성균은 이들과 오쿠보 상에게 받았던 책을 나눠 읽으며 밤새 토론하곤 했다. 딱 학자의 집안 맏아들다웠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나 아랫사람 대하는 것, 공부하는 것 모두 마을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만큼 준수했다. 봉철은 이들 사이에 가끔 끼어있긴 했지만 자격지심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최첨식은 가끔이나마 봉철을 불러 소학이라도 가르쳤다. 봉철의 입장에선 배우고 싶은 것은 신학문이었는데 배우게 된 것은 한학이었다. 배우려고만 한다면 성균에게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고 최첨식에게 한학을 익혔다. 그렇다고 썩 많이 배우려고 하는 건 아니었다.
“퇴계께서 글을 읽었으면 뜻을 깊이 읽어 심성을 변화시켜야지, 책을 읽었는데 아무런 진전이 없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따, 쇤네들은 머리도 안됭께, 공부할 되련님이나 열심히 시키셔요.’
말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 욕심도 없이, 머슴이길 자처했던 봉철이었다. 적어도 말하는 것만 보면 이미 공부를 다 끝냈을 정도로 아는 게 많았으며 처세에 능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다. 마을에서는 아버지 닮지 않게 잘컸다고들 했다. 성균은 대학으로 진학했고 다른 친구들은 읍내 관공서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상이 가만 있질 않았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