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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
작가 : 브로컬리
작품등록일 : 201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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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 05
작성일 : 16-11-05     조회 : 370     추천 : 0     분량 : 9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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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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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년 3월 1일

 

 담양경찰서에 새벽부터 난리가 났다.

 

 -뚜우, 뚜우-

 

 “긴급상황! 긴급상황!”

 “여그는 담양서, 말하라 오바!”

 “여긴 월산 지서, 긴급상황!”

 

 -치익, 치익-

 

 담양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월산지서에서 새벽 3시경에 담양경찰서로 연락이 들어갔다.

 

 “상황보고! 상황보고 바람!”

 “월산면 죽림에 무장 공비 2명 출현! 도주 중! 지원 요청 바람!”

 “지원 가능, 동태 파악 바람! 이상”

 

 병풍산 안자락에 용흥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으나 거의 빨치산 소굴이 되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하지만 여간 까다로운 곳이 아니다. 곳곳에 마실 물도 많고 피할 곳도 많다. 위에서 보면 그 계곡 쪽으로 누가 올라오는지 다 보이는 곳이다. 몇 차례 소탕 작전을 펼쳤지만 번번히 실패한 이유가 있었다. 무기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올라오는 병력을 보고 싸울지 말지 결정을 해도 늦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용흥사를 벗어나 아래 월산 마을로 내려왔다면 길이 하나라 추격이 가능하다. 2명 뿐이라면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2명을 잡기 위해 비상 명령이 떨어져 30명이 무장한 채로 모여 차에 올랐다.

 

 “인자 잡아불자고!”

 

 병풍산의 빨치산은 다급해졌다. 먼저 내려갔던 2명의 선발 대원이 쫓겨 오자, 뒤를 따르던 모두는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했다.

 

 바심재.

 

 숨이 턱에서 꼴딱꼴딱 넘어가도 그 고개는 넘어야 한다. 용흥사로 방향을 틀면 나머지 전우들까지 걸리게 되니 죽을 힘을 다해 그 고개는 넘어야 했다. 바심재는 장성과 담양의 경계이며, 그곳만 넘어가면 다시 피할 곳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담양경찰서에서는 새벽 5시 40분, 35명의 기동경찰을 완전 무장하여 군청 소속의 GM 트럭에 탑승하여 바심재로 보냈다. 트럭조차 오르기 힘든 곳이다.

 

 -탕, 탕!

 

 어디선가 총 소리가 났다. 반쯤은 자고 가던 트럭에 탔던 경찰들은 몸을 수그렸다. 하지만 트럭이 고개를 오르다 말고 시동이 꺼지나 싶더니 이내 뒤로 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빨리 브레끼 잡아!”

 

 트럭 뒤에서는 아우성이 났지만 앞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차... 차 멈춰!”

 

 알 턱이 없는 경찰들은 어수선하게 외쳤지만 차는 멈추지 않았고, 서너 명만 바로 뛰어내려 배수로로 몸을 숨겼을 뿐 차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쿵

 

 낭떠러지에 떨어져 차량이 반파되자 쓰러진 경찰들을 향해,

 

 “크하핫! 아새끼들...”

 

 빨치산들은 낭떠러지 위에서 기관총으로 난사했다. 공식적으로 31명의 사망이었고, 1정의 기관총과 35정의 소총, 그리고 수천 발의 실탄을 노획했다. 먼저 뛰어내렸던 4명만 몸을 숨겼다가 총성이 멈춘 뒤 겨우 내려와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성균의 동생 얼굴 성현이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난생 처음 쏴보는 총이었다. 누구를 맞추겠다고 쏜 것도 아니고 도라꾸(트럭)가 눈에 보여 총을 쏘았는데, 차가 멈추는가 싶더니 뒤로 빠꾸(back)하는 게 아닌가?

 

 ‘내가 총으로 도라꾸를 잡다니!’

 

 얼떨떨하던 그에게,

 

 “동무! 잘했어!”

 

 다들 등을 두드리며 칭찬을 하더니 언덕으로 내려가 시끄러운 총성이 산을 가득 메우도록 쏘아댔다. 흡사 남자들이 파리를 향해 소변이라도 보듯, 움직이는 조짐만 보이면 난사를 하며 웃고 있었다. 믿기지도 않았고, 그렇게 웃고 있는 게 무섭기도 했다. 성현은 총 두 방 쏘았을 뿐인데 일어설 힘도 없다. 감당할 자신도 없는데, 다들 잘했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우리 어린 성현 동지가...”

 

 밤에 빨치산들의 은거지인 용흥사에서는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다. 나이 어린 학도병이 경찰에 쫓기던 사람들을 구해내고 총과 탄환까지 노획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성균의 부모는 혜진, 혜숙 딸들과 며느리만 데리고 지내기로 하고, 성현만 공비들에게 들어갔다. 부모님께서 쥐어주신 노잣돈을 챙기고 들어와 대면식을 하고, 소개를 끝낸 다음날 처음으로 총을 잡아봤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심재 사건이 일어난 것이니, 본인도 놀라고 진정되지 않을 일이었다.

 

 밤중에 월곡마을 약탈을 나가면서 먼저 출발했던 2 명이 뛰어올라오며,

 

 “언능 피하시오! 경찰이 오요!”

 “여 바심재 넘어 장성으로 들어가!”

 

 라 하는 것이었다. 거의 고개 정상에 오를 무렵 열심히 뛰어오르다 말고 성현은 트럭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총으로 쏘았다. 뭐가 보이지도 않을 새벽이었다.

 

 -탕, 탕

 

 그러더니 시커먼 도라꾸 하나가 멈칫하더니 소리가 멈추고 이내 굴러떨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자... 잡았다!”

 

 다들 놀랐다. 트럭에 탔던 30명이 넘는 경찰들이 무서워 도망만 가야 한다 생각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사건으로 공비들의 사기는 더욱 등등해졌으며, 경찰들은 치욕스러운 패배로 이를 갈게 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힘없는 농민들이었다.

 

 “때를 봐주기나 허간?”

 “우리도 먹을 거 없는디 다 털어간당께!”

 

 밤과 낮으로 약탈꾼들만 늘어났다. 춘궁기에 먹을 것 달라는 공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갖은 부역에 사상교육까지 하며 뜬금없는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몰아세워 죽이려는 자들도 눈엣 가시였다. 일제가 갈라놓은 민심을 이념이 또 갈라놓았다. 하루하루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고, 죽지 못해 살아있는 것뿐이었다. 시종일관 무기력하게 만드는 현실이었다.

 

 담양에도 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별의별 청년단이 조직되어 새벽 다섯 시에 소집해서 죽창 들고 찌르기 훈련을 하고, 돌아오면 또 울력을 나가야 하고, 교량설치에 동원이 되고, 수시로 인주를 세웠다. 농사지을 틈도 없고, 있던 양식은 공비들이 모조리 수탈해갔다. 그 와중에 이나 벼룩은 왜 그리 많은지 아무리 막으려 애를 써도 어쩔 수 없었고, 봉철이의 악행은 날로 더 심해졌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지나가면 시비를 걸고, 지나가지 않은 일로 시비를 걸었다.

 

 “즈그 애비도 이라고는 안했는디...”

 

 성현은 농삿일도 도울 겸 집이 걱정이 되어 잠시 내려왔다. 그런데 있어야 할 큰형수가 보이질 않았다. 돌아온 날이나 얼굴을 보았지, 얼마 안있으면 조카도 태어나는데 걱정이 되어 동네 어르신들 문안도 드릴 겸 찾으러 돌아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하던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형수는 봉철의 집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는 것이다. 성현은 집으로 돌아와 낫을 챙기고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봉철이 아랫춤을 추스르며 방을 나오는데,

 

 “아따 우리 형수도 참, 죽은 양반은 냅두고 거그 김두식 투사님이나 잘 모시믄, 좋은 일 있지 않겄어?”

 “그라믄 우리 시댁은 제발...”

 “아따 당연히 그래야제!”

 

 산달이 얼마 남지도 않은 여인을 이런 협박으로 피할 곳 없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모양이다.

 

 “시댁 가족들 시방 다 죽여블라고 난린디 우짜쓰껴? 사정이 겁나 딱호고마잉...”

 “그럼 우짠다요? 지는 괜찮응께, 지발 가족들은...”

 “우리 투사님들 나라를 위해 저리도 힘쓰신디, 아랫도리도 한 번 거시기하게 해줘야제!”

 “인자 아가 나올 날도 얼마 안남은 지가 뭔 볼 일 있다고 그란다요?”

 “아녀, 아녀! 그런 소릴 말어! 나라에 대한 애국충정으로다가...”

 

 봉철은 이 말을 하고선 잠깐 뭔가 기억이 났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동네 아가씨들 몇을 공출한다며 데려갈 때 들었던 말이다.

 

 “썩을... 일본놈들헌티 대주는 것도 아니고, 다 나라를 위해서 허는 일인디... 고까짓 껄 못혀?”

 

 투사 두 명은 봉철의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봉철이 그녀에게로 들어갔다가 아랫춤을 추스르고 나오다 성현의 눈에 띄인 것이다.

 

 “이 개눔의 시키를...”

 

 성현은 낫을 들고 봉철을 향해 뛰었고, 봉철은 도망가기 바빴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말도 안될 사건이었다. 봉철이 도망간 곳은 엉뚱하게 성현의 집이다.

 

 “아부지, 지 쪼까 살려주시오, 성현이가 애매허게... 헉헉...”

 

 온갖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다. 뒤늦게 달려온 성현을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저새끼가...”

 “니가 시방 이라믄 쓰겄냐?”

 

 아버지는 되려 성현의 뺨을 때렸다. 성현은 아버지를 원망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봉철은 괜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아야, 성현이 니 그라는 거 아이다, 내가 니 얼매나 이뻐했는디, 오해 말고... 워메 징헌그...”

 “아이고 아버님, 시방은 지가 급헌 일이 있어서 먼저 가고, 난중에 사정 말씀드릴랍니더!”

 “그러시게.”

 

 봉철은 머리를 긁으며 바쁜 걸음으로 도망을 갔고, 성현은 아직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내 안다, 아직은 웅크릴 때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아니믄 언제 한다요! 저것들이 형수님을...”

 

 형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하고, 그날 밤에 아무도 몰래 들어갔다 아무도 몰래 집을 나왔다. 나오기 전 방문 앞에서 한참을 엎드려 숨죽여 울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시방은 지가 욕보인 몸으로 뵐 면목이 없응께요, 이기 다 지 업보라믄 업보지라... 여그로 시집도 와서 참말로 좋았어라. 서방님이 먼저 가신 게 지 팔자때문인가 싶을 때도 있고혀서, 어떻게든 부모님과 도련님, 그리고 뱃속에 아가 형석이만큼은 지켜드릴라고 했는디, 요라고 욕보여가꼬 살기 힘들게 되아브러서, 두 분 부모님께 이렇게 인사 올리고 지가 나갈랍니다. 지가 있는거이 부모님께 더 해가 되고 가문에 누가 되믄 지가 떠나야지라... 그간 고맙다는 말씀 올리요. 언제 살아있으믄 또 보겄지라... 성현 도련님도 지 너무 미워말고 학문에 힘쓰셨으면 하고, 우리 어린 아가씨들도 곱게 자라서 더런 꼴 안보고 살았으면 합니다. 장손은 지 목숨걸고서라도 지켜드릴랍니다. 아버님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비녀와 귀이개로 난중에 보여드리믄 손주다 여기시믄 되겄어라. 그라고 지가 시집올 때 들고 온 피리는 혜진이에게 맡겨두고 갈랍니다 부디 건강히....”

 

 서툰 한글로 울며 어두운 방 앞에서 쓰느라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렇게 형수는 떠났다. 산달이 가까워 오자 항렬로 형(炯)이 들어 있는 이름으로 형석으로 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살아있으믄 보겄제, 몸 성히 잘 있고... 손주 형석이도 못부르고 우짠다냐...”

 

 부모님은 한참동안 편지를 붙들고 우셨다. 붙잡을 힘조차 없다. 남은 기운이라고는 모조리 분노에 쏟았지만, 아직 뭔가를 할 순 없었다. 이젠 싫어도 공산당이 될 수밖에 없다.

 

 형수가 도망간 사실을 알고나자 봉철은 미친 듯 뛰어다녔다. 어머니를 살릴 절호의 기회였다 생각했는데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봉철은 흡사 정신병이라도 걸린 양 광분했다.

 

 "그년 애기집꺼지 꺼내가꼬 쌂아야 된디..."

 

 나병걸린 어머니에게 갓난아이와 태까지 삶아서 드릴 작정이었나 보다. 그러면서도 그게 당연하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눈까지 빠져 거동이 더욱 불편해졌다. 그 성질에 어떻게든 구해왔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결과는 달라지진 않았다.

 

 다사다난.

 이 말이 아니고서야 당시를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도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힘들다는 말도 사치였던 때가 있었다. 가난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저 하루 한 끼라도, 그것도 멀건 뜸물에 밥알이 떠있고, 누렇게 뜬 배추로 끓인 국이라도 넘어가서 아프지만 않으면 감지덕지였다. 아니 된장이라도 넣었으면 다행이지 소금조차 아낄 정도로 멀건 국물이 한 끼 두 끼 세 끼 식사였다. 그럼에도 온 몸에 벼룩이나 잡벌레들이 들끓어도 이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새벽에 논일을 하고 오면 아침 먹기도 바쁘게 죽창을 들고 마을 앞으로 집결한다.

 

 "자 다같이 지 구호에 맞춰서 팍허니 찔러보이시더!"

 "멸~공!"

 "멸~공!"

 

 마을 사람들을 다 모아두고 허구헌날 죽창 찌르는 연습이다. 내심 불만이 많다. 일제시대 때보다 더 심한 곤욕이다. 이 일이 끝나면 또 신작로를 내러 나가야 한다.

 

 "지난 밤에도 저짝 마을에 공비가 출현했다고 혀요! 우리가 그라고 안일허게 찔르믄 죽도 안해라!"

 "거그 최씨 아제! 밥도 안먹고 나왔소? 자꾸 그라고 헝께 빨갱이들이 자꾸 우리를 넘보는 거 아녀?"

 "에~ 거슥, 오늘은 특별히 읍내 장에서 보도연맹 놈덜 공개처형이 있다고 야그 안혔소? 모두 시간되믄 그짝 가가꼬 육시럴 놈들 꼬라지 좀 보이시더!"

 

 뒤숭숭하다. 총살형을 공개로 한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입도 뻥긋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가난보다 더 무서운 무기였다. 그러다 12월 엄동설한에 담양 지역 전체 주민을 읍내 추성경기장에 집결시켰다. 벤또(도시락)와 죽창, 도끼 등을 챙겨오라는 것이었다. 모인 수만 해도 5~6천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미산 앞 마을에 도착했다. 삼인산부터 병풍산을 완전 포외해서 지난 바심재 수모를 갚겠노라 벌인 작전이었다.

 

 마을의 구장들과 청년단들은 칼을 차고, 군인과 경찰들은 총을 들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키보다 두 배나 긴 죽창을 들었다.

 

 “예~ 다들 지난 바심재 사건에서도 목도하셨듯, 공비들이 이 산에 잔뜩 숨어서 우리의 소중한 식량과 재산을 탐닉하고 에~ 또, 거시기설라므네...”

 

 누군가 추운 아침부터 일장 연설을 길게 늘여놓았다.

 

 “으따, 추워 디지겄는디 이거이 뭐시여 시방?”

 “긍께 말이시, 눈이나 안내리믄...”

 

 날씨도 그날따라 하필 하얀 눈이 무릎 아래까지 쌓였는데 산을 오르라는 것이었다.

 

 “모두 좌우 옆 사람들과 열 걸음 정도 유지하고 오르셔야 헙니다잉!”

 

 12월 용흥사 토벌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비들의 일망타진이 목적이었다. 성현이도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전 성현의 아버지가 11월 20일 경 밤하늘을 보더니 뜬금없이,

 

 “백기경천(白氣經天)이야! 또 무슨 난리를 대비해야 해!”

 

 라고 소리쳤다. 큰 아들이 죽은 후로 잠이 오지 않으면 늘 천기(天氣)를 살피며 조심하고 있었는데, 혜성이라니, 달갑지 않은 소식이 있을 게 분명하다. 서둘러서 아들에게 기별을 전했다.

 

 “아무래도 큰 사단이 날 것 같구나, 어여 피신하거라!”

 “아따 아부지도 참, 인자 혁명이 시작될 것이구만 어디로 피해라우?”

 “숙종 때도 백기가 그라고 나타나고, 한파가 시작된 거여! 글고 느그 형을 생각해봐라, 인자 니가 장남인디 니라도 저기... 서울 가서 이 편지 좀 누구 주고 오거라!”

 

 성현은 불안해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용흥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용흥사 토벌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작전은 꼬박 8일이 걸렸다. 미산에서 월산으로 갔다가 용흥사로 오르는 길을 돌아 병풍산을 한바퀴 돌고 내려오기까지 말이다. 이 작전으로 용흥사까지 불에 태웠으며, 용흥사 부근을 기지로 삼았던 빨치산 60여 명이 사살당했다.

 

 “여그 이라고 이상허니 생긴 구녁(구멍)이 있으믄 가차없이 창으로 마구 쭈셔브쇼! 불로 태워블고...”

 

 비말 아지트의 준말, 비트를 그렇게 설명했다. 엄동설한에도 바위 틈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이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도 다 죽은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주민들은 자신들이 먹을 게 없으면서도 일부러 주먹밥을 한 덩어리씩 놓고 가곤 했다.

 

 “아니, 자넨 뭐허는 짓인가?”

 “암 말 말어! 우리 아들은 경찰이 죽였어!”

 “아따메, 우리 아들은 공비들이 죽였는디!”

 

 그들 내부에서도 균열은 많이 있었다. 서로 피해자들 있을 뿐 승자는 없었다.

 

 “이 빨갱이들만 없었으믄 이라고 고생도 안허제!”

 “말 말어! 민주주의라고 다 좋간?”

 “어따, 이 양반 끌려갈라고 지랄하네! 어이 여그 순사 양반! 빨갱이 여그 있소!”

 

 서로 피해자이면서 서로 미움만 가득한 곳이다. 이윽고 용흥사까지 이르렀다.

 

 “자 여그 절에 허벌나게 숨어있을 것인디, 싹 다 꼬실라불제!”

 “안되여!이 절을 우째 태운당가? 천벌받을라고...”

 “여그 공비 새끼들 싸그리 안죽이믄 부처님이 진노하실 것이네!”

 “공비들이 태웠다고 소문내믄 되지 않겄는가베?”

 

 봉철이었다. 죽창에 공비의 옷을 둘둘 말아 불을 붙여 절에 던졌다. 말릴 새도 없었다. 시초가 결성되자 여기저기서 불을 머금은 죽창이 절로 던져졌다. 용흥사까지 올라와 여기저기 숨은 빨치산들은 대경실색하였다. 물샐 틈도 없는 포위망으로 좁혀오는데,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가 숨이 가쁜 법으로 절간에 간신히 숨어들어 몇은 지붕에 오르고, 몇은 불상 뒤에 숨어 총격전을 하며 버티고 있었는데, 죽창에 불을 붙여 절간을 태우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 오랜 세월을 버텨왔던 절이 앞의 느티나무를 제외하고 모두 타버렸고, 그곳의 공비들 대부분이 불에 타죽었다.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굿을 한 곳이 바로 이 용흥사 앞이었고, 이 느티나무 아래서 치성을 드렸는데, 절은 다 타버리고 그 느티나무만 한 그루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다.

 

 민심은 겨울철 엄동설한보다 더 얼어붙었다. 8일이 지나며 작전이 끝나 다들 마을로 내려갔지만, 문들은 더욱 굳게 닫혔다. 무장 공비들 없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나 국군 또한 포악함에서 제외될 순 없었다. 이 작전은 50년 2월 하순까지 계속 되었다. 겨울 한 철이 지긋지긋하게 끝이 났다.

 

 서울로 올라갔던 성현이는 편지를 전해주고 얼마간 머물렀다 오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서울 아버지의 지인은 성균의 서울 유학 당시 하숙을 해주었던 분이었는데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큰 난관은 없이 살던 사람이었다.

 

 “친일 역적이라고 어제는 이 사람, 오늘은 저 사람 다 공개 재판으로 서로 죽이고 있는데, 다 아랫 것들 뿐이야... 죽일 놈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의식은 있어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결국 6.25 동란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해방 후 전쟁 전까지는 격변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 격변의 시기에도 조용히 넘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때려죽이고 싶던 일본사람들이 안전하게 본국으로 돌아갔고, 일제에 빌붙어 개인 잇속이나 챙겼던 이들은 공개 재판으로 죽이기도 했으나, 정작 높은 자리의 친일파들은 그대로였다. 경찰은 그대로 경찰이 되었고, 잘난 지주들은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세상은 꿈틀거리는 발밑의 지렁이마냥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이 죽어야 했다.

 

 3월에나 내려온 성현은 아버지로부터 용흥사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

 

 “그간 봉철이 빨치산되븐 거 아니냐고 몇 번이나 널 찾으려고 했었는디, 서울에 갔다고만 해왔응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용흥사 전우들 60여 명이 몰살당했는데 한가롭게 잘도 살았다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몰랐다.

 

 “그래도 니꺼정 안보내서 얼매나...”

 “웅크릴 때가 있어야 뛰어오르는 때도 있는 법이여, 시방은 우리가 이래도 호랭이처럼 뛰어오르는 날이 올 것이구만!”

 

 부모님의 말이 그래도 살아있는 책임을 져야겠노란 다짐을 더 굳게 만들었다.

 

 그 시절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는 이현상 빨치산 부대가 유명했고, 내장산~추월산~강천산~지리산으로 해서 빨치산은 폭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병풍산의 빨치산이 침공을 당하자 이들은 좀 더 담양지역에서 교란 작전을 펼쳤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집요해지는 것은 경찰들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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