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이 다급하게 봉석을 밀어내며 당부를 했다. 봉석이가 조금이라도 멍청했거나, 조금이라도 영리했으면 혜진이와 혜숙이까지 다 걸렸을 것이다. 딱 그만큼이었다. 어릴 때 가르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잠시 후에 판결이 났다. 그는 무슨 정신에서인지 신나서 춤을 추고 형에게 왔다. 봉철이는 동생의 머리를 쥐박으며 마을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은께로, 여서 해산허시오... 나는 내일 서에 들어가 보고할랍니더. 욕봤소!”
능글맞게 웃더니 봉철이 다시 돌아와 부모님의 수급을 가져갔다. 그러고도 혜진, 혜숙은 나가질 못했다. 한참 후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와서 덥썩 절을 하더니 거적을 덮었다.
“아이고, 슨상님, 지들도 살라믄 우얄 쑤가 없었시오, 나가 낼 밝은대로 장사지내드릴랑께 고저 아무 원한 말고 저승 가입시데!”
이미 다 나가고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한데 한참이 지나도록 측간에서 나올 수 없었다. 부모의 죽음에도 부모의 시신이 겁이 나기도 했거니와, 숨어있다가 다시 나올 지도 모를 사람들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날이 새고 마을 사람들이 니아까(리어커)에 시신을 수습하고 나가는데도 나갈 수 없었고 그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꼬박 하루였다. 그러나 둘 다 기진맥진했는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
눈을 떠보니 전혀 모르는 곳이다. 처음 본 광경이다. 벽이건 천장이건 바닥이건 덮고 있는 것이건 온통 거적투성이다.
"아따, 인자 정신이 좀 드냐?"
작은 오빠였다. 딱 이틀만 일찍 돌아왔었으면 모든 식구들이 살아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하루만 일찍 돌아왔으면 그 역시 죽었을 것이다. 모든 사건이 정리되고 자매 둘이 측간에 쓰러졌을 그때에 동지들과 몰래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고 혹시 몰라 측간엘 가보니 동생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무슨 변고가 있나 싶어 얼른 동생들을 데리고 얼른 용흥사 땅굴로 피신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혜진인 뭐라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입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겁이 덜컥 났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카아아악, 카아아악!”
목에 커다란 가시가 걸려있는 느낌이었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며칠간은 물도 마시지 못할 만큼 괴로웠다.
"옴마, 너무 놀래서 벙어리 되아브렀는가봐야!"
옆 사람 말에 더 놀라 울음이 나오려는데 턱도 벌어지지 않아 끄윽, 끄윽 소리만 나왔다. 시골에서 똑순이로 불리며 동네 아이들 다 가르치고 다니던 자신이 이젠 말을 한 마디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겁이 덜컥 나서 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돌이켜보니 하루 꼬박 어금니를 물고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고만 있던 일이 기억났다. 그리고
‘오라버니 올 때까지 기다리란 말만 안했었더라면 부모님은 사셨을껀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단 죄책감이 그녀의 말문을 닫아버렸다. 하루 밤낮을 꼬박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온 힘을 써서 자기 입을 틀어막다보니 벙어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목으로 울음을 참느라, 그리고 더 이상 세상에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침 일어난 혜숙이 언니를 대신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주었다. 뒤죽박죽이 된 정황이지만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봉철 아제가..."
"내 이 새끼들을 그냥!"
하지만 힘이 없었다. 용흥사 빨치산들도 이미 패잔병이나 다름없다. 한때는 국군들도 꼼짝 못하게 할 힘이었으나, 지금은 도망치기 바쁘다.
"인자 인났응께, 여그 다 정리허고 지리산에 합류해야 혀. 거그서 우리가 이현상 장군님과 합류해야 살어!
“토벌 작전이 엄청난다 하더구만유.”
“그래도 별 수 있겄어? 여서도 디지고, 거서도 디진디, 니미럴 국군 새끼들이 우리 부모님만 안죽였어도 내가 이라고 살겄어?”
이미 후회를 할 수도 없었다. 혜진은 다시 부모님을 위한 만가를 적으려 했으나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아버지, 지가 밥먹을 때 콩 발라내지 말라고 머라 하셨지라? 그때 참 무서웠는디, 지금은 그 말해줄 아버지가 안계싱께 더 무섭소. 엄닌 큰 오라버니...>
혜진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을 적은 종이는 담양을 떠나기 전 용흥사 앞 부도탑 아래에 숨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이들이 지리산으로 떠난 날, 중공군이 가세를 하였다는 소식에 반란군들은 모두 함성을 질렀다.
“참으로 좋은날 잘 오셨소, 내 동무의 활약상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소! 동무는 20명의 소대와 함께 가맛골에서 주둔하며 교란작전을 펴도록 하시오.”
성현은 부대 20명과 함께 다시 담양으로 돌아와 가맛골에 들어갔다. 가맛골에 들어서자마자 성현은 추월산을 오르내리며 비트를 확보하고 다녔다. 지도를 그리며 헛굴까지 파놓고 몰래 위장해 놓은 것을 보면 굉장히 치밀한 전략가였음이 분명했다.
한편 봉철은 담양경찰서에 근무하면서 그곳에 주둔한 20연대 1대대와 함께 부역자들을 고문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인민군을 죽이는 것보다 인민군 부역자들을 죽이는 것은 참 쉽고 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진해서 부역을 했거나, 인민군의 횡포에 무서워서 부역을 했거나, 혹은 부역을 하지 않고 잘 숨어 있었거나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아무나 죽이고 부역혐의만 씌우면 되는 일이었다.
“텐찌에 민나 교산또데쓰다!”
봉철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술을 먹어도 그 소리였고,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도 그 소리였다. 봉철이 고문으로 얻은 정보를 토대로 20연대 1대대는 덕곡리 집집마다 수색을 해서 노인과 아이 빼고 30여 명을 잡아내어 9명을 언덕에서 총살했고, 다음날엔 용면 산성리에 가서 100명 정도 되는 비무장 피난민을 죽였다. 봉철은 이 작전의 공으로 일계급 승진할 수 있었다. 이 뿐 아니라, 11월 7일에도 20연대장 박기병 대령의 추성경기장 수복기념연설에 50여명이 총살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담양에서 함장수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건만 그 역시 공산당이라는 모함에 의해 검은 천을 눈에 가리고 총살당해야 했다. 살아있는 게 신기한 동네가 되어버렸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