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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
작가 : 브로컬리
작품등록일 : 201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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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 08
작성일 : 16-11-05     조회 : 547     추천 : 0     분량 : 13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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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 7월 13일

 

 먹을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산 아랫 사람들이야 멀죽(밥알이 동동 떠있는 정도의 숭늉)이라도 먹었지, 지리산 산속에선 그마저도 귀해 흙이라도 집어먹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고운 흙을 발견하면 체로 쳐서 물로 진흙을 만든 뒤 구워먹은 날도 있었다. 당장 죽지만 않으면 그걸로 다행이었고 기적이었던 셈이다.

 

 혜진과 혜숙은 어린 나이에도 전쟁 연습을 해야 했다. 공부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날마다 전쟁 연습과 토벌꾼을 피해 도망가는 일, 집을 보수하는 일에 애를 써야 했다. 하다못해 수화라도 배웠으면 좋았을 것을, 자기들만 아는 적당한 손동작만으로 의사소통을 했고, 아니면 필담으로 주고받은 게 다였다. 그러니 무슨 작전에 들어가거나 별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동생을 돌보는 일만, 딱 그만큼만 하는 것으로 다들 만족했다.

 

 “이번 작전은 남부군 동원령으로 장수 장계 경찰서를 습격하여 위대한 혁명의 뜻을 이어받아 일제 시절 약탈을 일삼아온 도당을 잡아 혼내주고, 인민들에게 혁명정신을...”

 

 인근 빨치산 부대에 아주 오래간만에 명령이 하달되었다.

 

 “리현상 동지께서 직접 하달하신 거여...”

 

 작전이 언제인지는 추후 공개이다.

 

 “니미럴, 인자 이 총에 때깔 좀 내야겄구먼!”

 

 다들 숨겼던 총과 끌, 도끼와 칼에 기름을 칠하고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다. 갑작스런 출격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마지막 만찬이랍시고 거하게 먹었다. 남긴 음식 하나 없이, 오래간만에 멧돼지까지 잡았으니 다들 풍족한 식사였으나, 하필 혜숙이 탈이 났다. 익히지 않은 고기가 말썽을 일으켜 계속 구토와 설사를 하니, 토사광란이라고들 하였다. 지금의 콜레라인가 싶다. 이 때문에 혜진이는 작전에서 제외되었다. 어차피 나이도 어린데다 말도 통하지 않아 놔두고 가려했는데 동생을 구실 삼았다.

 

 “니는 숙이도 아픙께 꼭 지키고 있어. 한 이틀이면 옹께로 먹을 건 읍다. 으짜피 숙이도 먹으믄 안되고, 니야 잘 참응께... 니들 참을 수 있겄제? 이번엔 먹을 것 많이 가꼬 오께.”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굶는 게 대수도 아니었으니 그땐 그러마 했다. 그러나 웬걸, 나흘이 되도록 돌아오는 소식도 없고 산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흘이 지나도록 먹은 게 없고, 오마던 오빠의 소식도 없다. 동생에겐 물이나 먹일 뿐인데 먹는 것보다 배나 되는 양을 다 토해낸다. 혜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적에 물을 묻혀 시원하게 닦아주는 것만 가능했기에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것만 했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날엔 뭔가를 먹어야 했고, 먹여야 했다.

 

 “혼자 나가면 죽어야...”

 

 오빠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당부였다. 이 말을 어기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여름 한 철이라 어지러울 정도로 뜨거운 날이었다. 군인들도 마을 사람들 눈에도 띄면 안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밤에 먹을 것을 찾을 수도 없다. 모든 신경을 눈과 귀에 쏟고 먹을 게 있나 찾아보았다.

 

 “저기다.”

 

 올라가기 어려운 절벽에 칡잎이 보였다. 진한 녹색 잎을 따라 뿌리가 저기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았다. 혜진이 오르려는 절벽이 여간 위태롭다. 칡덩굴을 붙잡고 오르고 오른다. 땀도 송글송글 맺히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한참을 오르려는데 그만 발 딛는 곳이 무너지고 말았다.

 

 “앗!”

 

 놀랄 새도 없이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평온한 꿈 속, 미산 고향에서 놀던 그 시절이 지나가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예쁜 목소리로 노래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고, 사람들의 표정에 행복이 보였다.

 

 ‘아, 칡...’

 

 정신이 반쯤 들자 칡을 캐던 꿈으로 또 이어졌다.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보려고 애를 썼다. 밥만큼 귀한 음식이었던 칡이라 손을 뻗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몸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따뜻했다. 바위틈이 아니다. 그리고 또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서 눈이 뜨였는데, 이제야 주변이 보인 모양이다. 가정집이다.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이런 이불은 덮어본 적도 없었다. 놀란 혜진은 얼른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려고 했다.

 

 “좀 더 누워 있으렴.”

 

 낯선 사람이다. 단정한 앞치마를 걸친, 난생 처음 도무지 알 것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받는 호의였다. 그런데 웃는 사람의 뒤로 아뿔싸, 국군 군복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혜진은 놀라 벽 한쪽에 기대 쭈그리고 앉아 어쩔 줄 몰랐다. 잡히면 죽는다는 것 말고 다른 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걱정 말고, 푹 쉬어!”

 

 낯선 여자는 놀란 혜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항하려는 손은 움직이질 않았다. 손과 머리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제서야 칡을 캐려다 떨어졌던 일이 기억났고, 이분들이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여러 차례 자다 깨었어도 일어날 수 없었던 게 그 충격 때문이었다. 둘러보니 하얀 가운이며 수술에 쓰는 도구들이 보였다. 이 역시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에구 어쩌다... 암튼 여기는 안전하니까 푹 쉬어... 군의관 선생님 댁이야...”

 

 꼭 헤어졌던 언니의 모습을 뵈온 듯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혜진은 불안과 안심의 교차선에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게...”

 

 어린데 상처난 게 가여운 게 아니라, 어린 빨치산이란 게 너무 불쌍했다. 나중에 돌아와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군의관의 이름은 이철민, 동생과 함께 빨치산 토벌대로 내려왔으나, 성품상 군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을 살리려 의사가 되었으니, 죽어가는 빨치산이라고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쓰러진 혜진을 발견한 것은 철민의 동생 철규였다. 엄밀히 말해 군인은 아니고, 형의 뒤를 따라 간호 보조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동생 철규 역시 형과 비슷하게 순했다. 야전 막사나 병동이 아닌 철민의 집으로 데려왔다. 부대에 알려지면 큰 사단이 벌어질 게 뻔했으나, 이런 어린 아이가 빨치산일 수도 없었고, 빨치산이어서도 안되었다.

 

 철민의 집은 대대로 철원에서 만석꾼 집안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절반 이상을 앗아가나 싶더니 해방 후엔 공산당이 나머지 것을 다 앗아가려 하자, 서울에 공부하러 간 철민에게 미리 가산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이 일로 인해 반동분자라는 명목으로 흥남교도소로 수감되어 소식이 끊겼고, 일치감치 가산을 정리해버린 남은 가족들은 빈털터리로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철원의 노동당사는 그렇게 많은 이들의 부역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철근 하나 없이 순전히 벽돌만 쌓아올려 3층 규모의 당사를 완공해 놓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건물 내부를 지었던 이들을 다 죽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반동분자라는 죄명을 붙여 고문하고 숙청한 악명높은 건물이 되어버렸다. 아니 건물을 지으면서도 숱하게 다쳤다.

 철규는 등짐으로 벽돌을 나르는데 비계가 헐겁나 싶더니 이내 무너지며 땅에 떨어져 다치고 말았다. 다친 다리를 치료해줄 병원은 없었고, 어머니는 큰 아들이 있는 병원에 보내 치료토록 하였으나 한참 클 나이에 다친 이유로 짝다리가 되었다. 그나마도 겨우 붙어있어 다행이지, 하마터면 다리를 잘린 채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철규는 서울에 머무르며 치료를 받았는데, 그 와중에 하필 전쟁이 나고야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시마고 미리부터 절대 못내려가겠다 하셨고, 형제만 국군 의무대에 귀속되어 남원까지 내려 온 것이다. 말로는 인민해방을 외쳤지만 인민은 죽어야 하는 공산당에 대해 어린 철규의 분노는 상당했다.

 

 “다 핑계야, 욕심이 죄를 낳았고, 죄가 사망을 낳는거지... 경제에서 경은 자본주의야,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을 말하고, 제는 구제를 하는 것을 말해. 그러니 공산주의랄까? 다들 경과 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니까 어렵지, 그게 뭐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닌데 자기 편 아니라고 이렇게 많이 죽여야 할까? 성경에 희년이라는 게 나와. 희년은 50년에 한 번씩 국민 모두가 다 공평하게 되는 날이라고 해. 얼마나 기막힌 세상이야? 49년은 열심히 살고, 그 다음 한 해는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이냐?”

 

 형 철민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어느 쪽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기독교 사상이지만, 이것도 너무 미국적이라는 데에는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랐다. 항상 멀리서 바라보는 습관 때문에 세상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한번은 눈이 많이 내려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는데, 구경만 하고 있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넉가래며 삽으로 저마다 눈을 치우고는 있지만, 무릎까지 쌓인 대설이라 치우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갑자기 수레를 꺼내어 넉가래를 잇더니 길을 쉽게 뚫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칭찬이 자자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말로 대꾸했다. 철민은 게으르기보다는 다소 허약했고, 책을 좋아했으며, 책을 읽고 나면 꼭 동네 뒷산에 올라 사색에 잠겨있곤 했다. 어느 날은 머리를 빡빡 깎고 절에 들어가 살겠다더니, 또 어느 날엔가는 의학 공부를 하겠다고 상경했다가, 얼마 후엔 결혼하겠다고 간호학교를 갓 졸업한 간호사를 데려온 것이었다. 숙맥이라 소문난 그의 행보가 그랬다. 천성은 늘 유순했고, 낙천적이었지만, 그 속에는 정말 알 길 없는 그만의 세계가 따로 있었다.

 

 동생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형은 따라갈 수 없었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철규는 형만큼은 유순하지 못했고, 감정이 많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공산당이 미워 학도병으로 지원했지만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군의관에서 단순한 잡일을 하는 소사를 맡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공산당을 무찌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을 만큼 반공주의자였다.

 

 이런 철규가 혜진을 처음 봤을 때는 참 아리송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행군을 따를 수 없어 잠시 뒤처져 있다 잠시 볼 일 좀 보려 했는데 바로 자기 앞에 피투성이가 된 남루한 여자아이라니, 처음에는 빨치산이라는 생각에 겁이 나서 숨었다가 다시 칼을 겨누고 앞으로 와서 호통을 쳤다. 호통을 치다가도 이내 또 걱정스러워 쳐다보았다. 자꾸만 눈이 가면서도 또 배운대로 호통을 쳤다.

 

 “소... 손들어! 움... 움직이면 쏜다!”

 

 총도 없으면서 칼, 그것도 아직 갈지도 않은 손바닥만 한 작은 칼로 작고 여리고 쓰러져있는 여자아이에게 허세를 부렸다. 겁이 났다는 증거다. 하지만 손에는 뜯겨진 칡잎이 있었고, 머리에 피가 상당히 많이 나온 채로 땀을 흘리고 있었던 모습에, 허세는 줄고 이제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했다. 주변에 대한 경계가 먼저여야 했음에도 쓰러진 여자아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설렜다.

 

 “아차차...”

 

 뒤늦게 깜짝 놀라 머리를 쥐어박으며 나무 뒤에 숨어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고 막힌 절벽에 누군가 굴러 떨어진 흔적만 보였다. 철규는 얼른 다가가 가만히 귀를 입가에 대어보니 가냘픈 호흡이 느껴졌다. 더 큰 일이었다. 얼른 치료를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빨치산을 치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무대에 데려가도 큰일나고, 안데려가도 큰일이지 싶어, 우선 가지고 있던 속옷을 벗어 상처 부위를 묶어두고 풀숲에 숨긴 채로 형에게 와서 사정을 말했다. 형의 답은 언제나 옳았다. 형은 즉시 동생과 함께 혜진에게로 갔다. 철규는 아직도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형은 철규의 칼을 치우며 다친 부위를 살펴보더니 부목을 하고서 업고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철규는 오는 길 내내 불안했다. 이제부터는 빨치산도, 또 군경도 알면 큰일나는 일이었기에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부지런히 경계태세를 갖추어 앞뒤를 조심스레 경계했다.

 

 “휴~”

 

 도착하자마자 철규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집에 내려오기 무섭게 집안의 모든 창문을 닫고 물을 끓였다. 나머지는 간호사 출신인 형수가 수술을 도왔다. 뇌진탕으로 의식불명 상태였던 혜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철규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미 본인도 낙상의 경험이 있던지라 혜진이 절벽에서 칡을 캐려다 떨어졌으리라 생각이 들어 얼른 깨어나기만 바랐다. 밤새 고열로 끙끙거리는데 물수건을 갈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혜... 혜수...”

 

 웅얼거리는 그녀의 신음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분명 처음에는 동정심이었다. 그렇게 동정심에서 시작되었다. 형수님에 의해 씻기고 나오니 이젠 동정심말고 다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쌕쌕거리는 작은 몸을 보니, 어릴 적 키우던 강아지 같기도 하고, 작은 새 같기도 하였다.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고, 무슨 일을 하다가도 빨리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형과 형수 역시 동생의 그런 눈빛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티나지?”

 “그럼요, 도련님도 어른이죠.”

 

 밖에서 이런 대화가 나오는 줄은 정말 몰랐을 것이다. 다행히 철규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혜진은 이틀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의무대에서 허겁지겁 돌아와 안부부터 물었더니 깨어났다는 말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앞에 가려니 이 또한 가슴이 두근거려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신 침만 삼키고 있었다. 모자만 만지작거리다 겨우 형과 형수가 끄집고 데려와 인사를 시키는데 정말 쳐다볼 수도 없었다.

 

 “얘야, 이 이가 너를 살렸단다. 절벽 밑에서 널 발견하고 자기 옷 벗어서 응급조치를 하고, 여기까지 데려와 널 정성스럽게 간호한거야.”

 

 혜진은 고마움에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간호사의 만류에도 기어이 고맙다는 신호를 보였다. 철규는 쭈뼛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혜진은 손바닥에 괜찮다고 또박또박 손가락으로 썼다. 혜진에게 있어서 유일한 대화법이었으나, 철규는 잡힌 손이 또 부끄러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너 말을 못하구나?”

 [예]

 “많이 불편하겠구나.”

 [할 말만 쓰면 되요]

 “가만, 어디 보자.”

 

 철민은 혜진의 입을 벌려 보고 목구멍을 살폈다.

 

 “성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실어증이 왔나 보구나.”

 

 가족은 마음이 아팠다. 전쟁 중에 불쌍한 사람이 어디 혜진이만 있겠느냐만 고아에, 여동생과 빨치산에 들어가 산속에서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혜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주 잠간만이라도 입이 열렸으면 좋겠단 생각도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그래서 시작된 필담이었다.

 

 [동생이 아파요. 얼른 가야해요. 제발 보내주세요. 저 하나도 안아파요.]

 “그럼 동생 데려오는 게 어때? 다른 가족은 없는거야?”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다른 삼촌들에게 걸려서는 안되고, 그 삼촌들이 발각되게 해서도 안되었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리 해야만 했다. 오빠에게는 더더욱 안될 일이다. 그리고 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오빠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자기를 도와주는 이들에게 모두 좋은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혜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스스로 내리는 첫 결정이었다. 철민과 철규, 혜진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지만 부인의 생각은 철민과 달랐다. 남을 돕는다는 범위를 모르겠다. 남편의 돕는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부인은 가만히 자리를 빠져나왔고, 이를 눈치 챈 철민이 뒤따라 나왔다.

 

 “입양인가요?”

 “글쎄... 그렇게 하고 싶긴 하지.”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는데, 너무 성급한 건 아닌가요?”

 

 결혼한 지 수년이 지나도 그들 부부에겐 아직 자녀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입양보다는 씨받이를 통하는 게 훨씬 보편적이었다. 게다가 입양을 하더라도 아들을 입양하지 딸을 입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시험관 아기를 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어쩔 거고, 미국에도 데려갈 셈이며, 왜 이런 결정을 저의 의견은 어떤지 물어보지도 않은거죠?”

 

 부인은 미국에서 살다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와 있었다. 잘난 집안에 뭐가 아쉬워서 한국에 왔겠느냐만 순전한 애국심과 봉사정신 때문이었다. 그렇게 숭고한 이상으로 왔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온 지 1년 만에 이제 막 졸업한 의사와 결혼하였고, 함께 그 뜻을 풀어보려 했지만 바로 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도 무섭고, 실려나가는 환자도 무서웠다. 그래도 나름 적응할 만 했는데, 남편의 이번 결정은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게 걱정이었는데, 남편은 상의 한 번 하지 않고 입양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입양을 결정한 건 아니지만, 미국에 데려가려면 입양을 하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다 생각했어. 학교라도 졸업할 때까지 키워주면 철규의 배필로도 괜찮겠다 생각했지. 설령 미국에 데려가지 않더라도 고아원에 잠시 위탁했다가 귀국해서 키워도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

 “그럼 우리 아이는 포기해야 하는건가요?”

 “아니지,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어. 걱정 마.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이해가 되었다고 맘이 풀린 건 아닌 거 알죠?”

 “내가 더 잘해야지.”

 

 철민은 부인을 달래고 밤에 혜진을 데리고 나왔다. 철규는 부대 사정상 나올 수 없었다.

 

 “너무 좋은 음식을 싸주면 다들 의심할 거야, 그래서 감자와 밀가루 넣었으니 허기라도 달래거라.”

 

 주소가 적힌 쪽지를 손에 쥐어주고 혜진이 발견되었던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여기 이 책도 시간나면 읽어보거라.”

 

 무슨 책을 건네주었다.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차도 처음 타보았으니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멀미나기도 했으며, 동생도 걱정되었을 뿐이다. 철민은 혜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혜진은 내려서도 계속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혜진은 저 멀리 차가 사라지자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붕대를 하고 가면 분명 오빠와 삼촌들이 가만 있을 것 같진 않았을 것이고, 동생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동생만 아니었으면 오지 않았을 곳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뒤에서 났다. 아마 사주 경계를 맡은 초병이었을 것이며, 모두 자신을 알 것이기에 모른 척 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뒤를 밟는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보니 주춤하며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아... 혜.. 혜진 동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 잠시...”

 

 이상하게 보지 말라는데 눈빛은 이상했다. 혜진은 얼른 뛰어 도망가고, 그는 혜진을 잡으려고 쫓아왔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혜진 동무... 암 말도 말어!”

 

 다친 혜진의 발걸음으로는 그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웅켜안으며 귀에 대고 말을 했다. 아니 처음에는 이전의 상황에 대해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를 안는 순간 더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 부대에선 혜진이 죽은 줄로만 알잖어? 게다가 암 소리도 못허는디?’

 

 한 사람의 생명쯤이야, 자신의 욕정이 먼저였다. 그녀를 땅에 눕히고, 옷을 벗기려고 하는 순간,

 

 “다시 입으라우!”

 

 나직한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였다. 작은 오빠는 반란군 부대에서 꽤나 높은 지위였다. 이전 담양 월산면 전투, 용흥사 전투에서 어린 나이지만 꽤나 큰 일을 했었던 게 알려져 있다. 당시 지리산 빨치산의 우두머리인 이현상과 직접 작전에 나섰던 경력이 있는 그였기에, 그쪽 산자락에 있는 소대에서 완장을 차고 다니고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소대장~중대장의 중간 정도였다.

 

 “도... 동무! 내 잠시...”

 

 성현은 그에게 옷을 입게 한 뒤, 혜진에게 사과를 시켰다. 혜진도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얼떨결에 사과를 받았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의 목은 성현의 검에 의해 잘려나가고야 말았다. 혜진은 눈을 꾹 감았지만,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니, 시방 어디 갔다 오는거여?”

 

 괜찮은가 묻는 게 먼저이지 않겠는가? 인정사정없는 오빠는 예전 큰오빠가 돌아가실 때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동생도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표정이다.

 

 [칡 캐다 다쳐서 사람들이 돌봐줬...]

 

 다 쓰지도 못했는데, 성현은 아픈 여동생을 밀쳤다. 그리고 발로 여러 군데를 차고 밟았다.

 

 “얼마나 걱정한 줄 알어?”

 

 그게 걱정인가? 분노인가? 웅크린 혜진은 쥐죽은 듯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다 맞았다.

 

 “인나라, 아픈 혜숙이 놔두고 어디 돌아댕기지 마라!”

 

 온다던 날짜도 훨씬 넘겼으면서 고작 하는 핑계가 동생이다. 혜진은 절뚝거리며 오빠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보자기를 내어놓았다. 감자와 밀가루가 담겨있었고, 즉시 취사반을 담당한 삼촌이 가져가 버렸다. 혜진은 서둘러 혜숙에게 갔다.

 

 “언니 인자 온 겨? 나놔두고...”

 

 혜진은 몰래 안쪽 주머니에 숨겨온 육포를 주었다. 먹으라고 입에 넣어주던 것까지 씹지 않고 가져온 것인데, 동생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언니만 좋은 데 갔다 왔는갑네... 참말로 이런 고기도... 실컷 먹고 왔는갑구만. 난 난생 첨 먹어보는거여.”

 [몰래 먹어, 들키믄 안되야.]

 

 혜진은 동생에게 손글씨로 당부를 했다. 무슨 뜻인지 안다. 혜진의 주머니에서 나온 초콜렛도 혜숙이의 입에 다 들어갔다. 아팠던 혜숙이가 나았으니 다행이었다. 정작 자신은 오빠와 동생의 말 한 마디에 무너졌다. 삼촌들은 혜진이 돌아왔다는 말에 모두 나와 혜진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다들 쓴소리를 하고서, 총을 들고 누가 쫓아오는지 경계를 강화하러 나갔다. 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경계를 나섰던 이들이 모두 돌아오고, 겨우 혼자 있는 시간이 되자, 안쪽에 숨겼던 책을 꺼내어 읽어보았다. 성경이라고 써있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숨어서 읽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깊게 볼 수도 없었다. 한참을 읽고 있는데 작은 오빠가 불쑥 들어오더니 책을 뺏는다.

 

 “이기 뭐여? 뭔 책이여? 성경? 야, 니 조국의 위대한 혁명에 이딴 사상이나 읽고...”

 

 하며 책을 빼앗았다. 혜진은 작은 오빠의 바지 춤을 잡고 돌려날라고 악을 썼다.

 

 “어어어... 거...”

 

 목에서 쉰 목소리가 나오도록 사정했으나 작은 오빠는 그 책을 장작불에 넣었다. 혜진은 장작불에 들어가듯 해서 책을 빼려고 했지만, 성현이 가만 두질 않았다. 읽기 어려운 그 책이 얼마나 소중한 책인지 혜진은 불에 손이 익을 만큼 뜨거움을 견디고 책을 빼냈으며, 작은 오빠는 그런 혜진에게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서둘러 비트를 옮겨야 해!’

 

 그 밤에 작은 오빠는 손에 입을 대며 새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훠~ 훠~”

 “훠~ 훠~”

 

 긴급한 신호임을 인근의 부대원들이 다 직감하고 짐을 꾸렸다. 이제 이곳을 떠야 한다는 신호였다. 다음 갈 곳은 한 번 국군에 의해 토벌된 곳이다. 잠깐 새에 20여 명되는 부대원들이 다 집합했다.

 

 “인자 여그 떠야 합니다. 아무래도 위치가 노출된 듯 합니다.”

 

 가만 놔둬서는 혜진이 사라질 것 같았다. 뭘 해준 것도 없고, 해줄 것도 없지만 같이 있어야 하는 책임감만 강했다. 게다가 평생 숨어 지냈던 감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불안했다. 실상사를 비롯해서 함양, 산청 쪽은 아우성인데, 성현이 있는 곳은 약탈보다는 산에서 직접 채취한 약초를 인월장에 내어놓았고, 그걸로 생계를 꾸려갔었으니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편할 때 위기를 준비하고, 위기에는 기회를 찾아야 하느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은 편할 때 게을러지고, 위기에는 어쩔 줄 모르니,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라! 모든 위기는 편안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늘 준비를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신 말씀이다. 요즘 들어 자주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호통이셨다. 일전에도 서울로 보내지 않았으면 용흥사에서 죽었을 목숨이었다. 아버지처럼 천기(天氣)를 볼 순 없어도, 지금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전이 시방 막 끝났는디 또 어디 간다요?”

 

 부대원들은 성현의 그런 결정이 맘에 들지 않았다. 공적이야 많지만, 나이도 어리고 독단의 결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혜진, 혜숙을 놔두고 다녀온, 1951년 7월 15일 작전은 남부군 500여명이 장수 장계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하여 포로로 30여명을 잡아 경찰들과 담판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정말 오래간만에 남부군이 모여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인근 3개 부락을 해방구로 인정해 달라는,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자는 것이었으나, 그곳의 경무주임이 상부에 보고해서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 시간을 지체하자, 이미 된 일로 생각하고 마음껏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었다. 남부군 그들에게는 엄청난 성과였지만, 지역주민들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안방까지 쳐들어오고, 닭이나 오리 등은 묻지도 않고 가져갔다. 동네 여인들을 희롱하고 겁탈하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성현은 약탈은 최소화하여 무고한 인민에게는 해를 끼치지 말자 했건만, 이미 늦었다.

 

 ‘이거이 과연 잘헌 일이여?’

 

 성현은 꺼림칙했다. 형과 부모에 대한 복수로 시작했던 일이다. 혁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처음 공산당에 입적할 때만 해도 선언문을 다 외울 정도로 투철했지만, 지금은 정도를 너무 벗어났다는 생각이다.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남김없이 다 털어가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불한당이었다. 성현은 자기 부대만이라도 서둘러 복귀하도록 했다.

 

 “아따 우리 소대장님은 맴이 여려가꼬...”

 

 불만이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군수물자와 식량 약간만 챙기고 다시 나눠주고 오라 하였다. 자신은 빨치산의 행동이 싫어서 했었지만, 이 일은 이현상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패배나 승리 없는 휴전이 선포된 것이다. 싫든 좋든 이제 싸움을 정리해야 했다.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협정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나버렸다. 북으로 올라가면 뜨겁게 환영받을 일만 기대했던 빨치산은 어이가 없었다. 그대로 전쟁이 끝나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신들은 죽을 목숨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미 죽이기로 작정된 그들이었으며, 죽기로 작정한 그들이었다. 살 길이 딱히 보이질 않았다.

 

 “동지들, 북에서도 우릴 버렸단말여...”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당가? 위대한 조국해방은 어떻게 되는거여?”

 “그것이 지령이 왔는디... 쪼까 암울허요...”

 

 그들은 북에서도 버려졌으며, 남에서도 죽여야 할 죄인들이 되어갔다. 주변 민가에도 너무 많은 약탈로 입지는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그곳에서 약탈하고 사는 것도, 북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실로 곤궁한 처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염병할... 살 길이 안보이네...”

 “그렇다고 죽으란 법도 없제. 부지런히 살 길을 찾다보믄 언젠간 북에서도 받아줄거여...”

 

 남한은 그들을 외면하겠지만 북에서는 자신들을 받아줄 것이라 믿었다. 자신들은 맨 처음 지령에 충실했고 그렇게라도 믿어야 속이 편했다. 누군가 조용히 인민해방가를 불렀으나 씩씩한 군가가 처연한 가락이 되어 구슬프게 들렸다. 이제부터는 제각기 살 길을 모색해야 하지만 동지들을 배신하고 내려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현의 부대원들은 서둘러 남원 대강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떠난 다음날엔 토벌대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대강으로 가는 그 길도 험난했다. 당연히 남들의 이목을 피하려면 산 능선을 따라 몰래 가야 했지만, 토벌꾼들을 어디서 만나게 될 지는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남원 뚫고 가블자고!”

 

 다들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요천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요천은 남원 시내를 휘어감아 순창으로 이어진 하천이고, 주변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곳이었다.

 

 “새 옷 입고 가믄 누가 알아보겄어?”

 “그라제, 다들 가족처럼 하고 댕기믄 되야!”

 

 자기들만의 생각이었다. 자기들이 새 옷이라 생각한 옷은 그리 새 옷도 아니었을 뿐더러 누가 봐도 얼굴에 산에서 나온 티가 많이 났다. 자신들도 힐끔힐끔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사람들도 자신들을 쳐다보았다. 더군다나 광한루 앞에는 초소가 있는 자리라 시내를 가로질러 움직여야 했다. 누구 하나 말도 한 마디 없이 그 길을 지나고, 손과 발도 맞지 않게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는데, 특히 혜진은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원이라, 혜진이 외웠던 지명이다. 바로 자신을 간호해주었던 아저씨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주소는 성경책에 넣었는데 함께 불에 타버려 너무 안타까울 뿐이었다. 혜진은 혜숙의 손을 꼭 잡고, 자기에게 쏠린 경계만 분산되길 바랐다.

 

 ‘아, 여기는...’

 

 처음 보는 동네가 아니었다. 저 쪽 모퉁이 쪽에 아저씨 집이 있었다. 입이 바짝 마르고 걸음이 더뎌지자, 다들 눈치주기 여념이 없다.

 

 “아이, 니 뭐허냐? 빨랑 가제...”

 

 그 순간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모두 흩어졌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혜진은 혜숙의 손을 잡고 죽자고 뛰었는데, 하필 호각을 불며 나타난 순경은 혜진의 뒤를 쫓았다.

 

 ‘잡히면... 헉헉... 안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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