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오...
낮게 울리는 소리에
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무릎에 닿은 따뜻한 느낌
제의 묵색 눈동자에 충녕이 드리웠다.
제는 자신의 손을 뻗어 충녕을 쓰다듬었다.
"세자라......"
텅빈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경회루를 떠돌았다.
애써 공허를 채우려는 듯 제는 술잔을 기울였다.
조선의 모든이의 부모가 되는 자리
모든이들이 부러워하는 자리
하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을 위해 자신의 혈육도
무참히 버려야하며,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여인도 지키지 못하는
허울뿐인 자리다.
나에겐 이런 자리는 필요없다.
오늘따라 유난히 감상적이다.
알싸하게 온몸을 파고드는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향수에 빠지게 하는 바람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가 자신의 상념에 빠져있을 때
충녕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형님.,..."
"깼느냐? 조금 더 누워있거라 일어나면 더 아플 것이다."
충녕은 자신이 제의 무릎에 누워있단 사실에 벌떡 일어났다.
"아닙니다!!.형님 죄송합니다.아우가 형님을 불편케 한 것은 아닙니까.?"
제는 비틀거리는 충녕을 잡아 다시 눕혔다.
"누워있거라."
충녕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명이다. 누워있거라."
"안됩니다.어찌 형님의 무릎을 벨 수 있단 말입니까?"
"네가 잠깐 누워있다고 닳지는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거라."
습기가 가득 찬 목소리에 충녕은 잠자코 고개를 들어 제를 바라보았다.
이런 힘이 없는 제의 모습은 낯설었다.
자신이 알던 제는 이런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형님...제가 혹시 결례라고 범했습니까?."
"아니다..아무 일도 없었다."
"....왜 이렇게 어두우신 겁니까? 슬퍼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고개를 돌려 충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그래 네가 있구나 ...충녕 고맙다."
제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말 없이 제를 바라보던 충녕이 입을 열었다.
"형님 제가 형님을 위해 한 곡조 올리겠습니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충녕은 어디선가 비파를 꺼냈다.
충녕이 비파의 줄을 골랐다.
이내 충녕의 고운 손 아래에서 비파줄이 서러워 흐느꼈다.
충녕의 손이 줄을 지나갈 때 마다
제의 영혼은 무엇인가를 추억하듯 추억속의 저편에서 홀로 흐느끼고 있었다.
충녕은 연주를 하며 자신의 형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형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듯 하였다.
자신의 연주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일까?
충녕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 혹여 제 연주가 형님의 심사를 더 어지럽히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열린 입 사이로 억눌린 과거의 감정이 올라왔다.
안된다... 이 이상의 동요는 아니된다.
제는 자신의 입술을 꽉 물었다.
"........"
"형님?"
겨우 감정을 다 잡은 제가 말했다.
"훌륭했다. 내 들은 연주중 최고의 연주였다. 고맙구나 충녕."
제의 칭찬에 들뜬 표정을 한 충녕이 비파를 다시 잡았다.
"형님 그럼 한 곡조 더 할까요?."
제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충분하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있고 싶구나..."
바람이 불었다. 제의 억눌린 감정을 대신하듯 서럽게 서럽게 바람이 울었다.
'휼아........'
닿지 않는 제의 바람이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퍼져갔다.
***
낮동안 밝게 빛나던 태양이 제 힘을 잃고
어둠이 자신의 품으로 하늘을 품고 있을 때
강녕전(왕의 침소)에도 어둠이 내려 앉았다.
세상을 호령하는 왕의 얼굴에도 예외는 아니라는 듯 어둠은 역시 왕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후.....세자는 오늘도 강연은 뺀 것이오?"
왕의 습기 어린 한숨이 침전을 에워쌌다.
시강원(세자 교육기관)의 일원인 듯한 사내가 대답하였다.
"송구하오나..그렇습니다. 영민하셨던 세자께서 언젠가부터...."
"........"
사내의 말이 끝나자 침전은 무거운 침묵으로 뒤덮였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왕이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인가.....이렇게 될 지는 몰랐거늘.."
왕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만약 자신이 그때 세자의 삼촌을 죽이지 않았으면..
세자가 삐뚫어 지지는 않았을까?....아니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하더라도
자신은 똑같이 할 것이다. 모두 세자를 위한 것이다.
왕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왕의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세자께서 이번에는 월궁을 하였다 하옵니다."
왕이 머리를 부여 잡았다.
세자 그래 다 나를 탓해라 모두 너를 위한 것이다...
마음으로 말을 삼킨 왕은 지친듯 말했다.
"알았네 오늘은 그만 듣고 싶네 이만 물러나게나."
잠시후 고요함만이 남은 강녕전
"세자... 다 너를 위한 것이늘 왜 몰라주는 것이냐.." 왕의 긴 한숨에 화답하듯 촛불만이 일렁이며 타올랐다.
***
어스름한 달빛이 도성에 내려앉았을 시간
제 는 도성의 담벼락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훈아..순라군(도성안의 도둑 화재를 막기 위해 경비를 돌던 조선시대 군인)은 지나갔느냐?."
그의 나직한 부름에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나타나 대답했다.
"순라군은 지나갔습니다. 허나 저하 매번 이렇게 월궁하시는 것을 들키신다면 문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뒤에 서있는 훈을 향해 제는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쉿...시끄럽지 않느냐 너는 내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냐?"
"하오나... 오늘 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못 나가십니다."
"어허...익위사(세자의 경호를 맡는 기관)는 세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기관이 아닌가?"
잠자코 따라오라는 무언의 압력이 훈의 어깨를 짓눌렀다.
안된다.이번만큼은 안된다. 더이상의 월궁은
저하께 득 될 것이 없다.
오늘만큼은 막을 것이다
훈은 결심한 듯 표정을 굳혔다.
"아니되옵니다. 오늘만큼은 저하를 위해서라도 나가시면 아니되옵니다."
"녀석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이냐?."
제는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이내 걸음으 멈춘 제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훈아 너가 지켜야할 존재는 누군가?"
갑작스런 질문에도 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저하 이시옵니다."
"다시 묻겠다. 너는 내가 어디에 가던 무엇을 하던 나를 지킬 것을 약조할 수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신 저하께서 어디에 가던 무엇을 하던 저하의 옆자리를 지킬 것을 약조하옵니다."
날카롭게 보이던 제의 눈매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잠시후
타다다다다.......탁
듣기 좋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제는 담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담 뒷편으로 소리쳤다.
"훈아 나를 무슨 상황에서도 호위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더냐? 넘어올 지 말 지는 네가 선택하거라"
"저하!!!"
"시끄럽다!! 너 때문에 내가 문책 받으면 좋겠느냐? 나는 이만 가보겠다 선택은 네가 하거라."
제는 말이 끝나자 걸음을 옮겼다.
제의 그림자가 담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멀어지고 멀어질 때 그를 따르는 발이 바빠 보이는 그림자가 새로 생긴 것은 하늘에 달만이 알 것이다.
***
반 시진후 (1시간)
자시 무렵(오후 11시)
제와 훈은 나란히 도성에서 벗어나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호수의 물에는 달빛이 흐르고 있었고, 근처의 나무에는
얼마 남지 않은 잎을 바람이 간지르고 있었다.
제는 갑갑한 궁궐과 다른 이곳이 좋았다.
막힌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이곳에만 오면 아릿한 어린날의 향수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벌써 이곳에서 돌아다닌 지 반시진이나 흘렀건만 제는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이 솟았다.
"저하 이제는 돌아가셔야 합니다.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탓에 기분이 언짢은 듯 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아무런 방해 없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달빛이 내려앉은 제의 옆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훈아 기억나느냐? 내 어릴 적에도 많이 왔었다. 그리고 사라진 나를 찾으러 너도 이곳에 많이 오지 않았더냐?."
"기억하옵니다.저하꼐서는 항상 사라지시면 저 나무아래에 계시곤 하였습니다."
제가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저 나무야....저 나무구나...휼이가 있었던 나무가..."
"저하...이제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여인 입니다. 잊으셔야 합니다."
제의 눈 아래가 가늘게 떨렸다.
"훈아 잊으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잊으려고 하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을 어찌하란 말이더냐!! 잊고 싶단 말이다!!!"
바람이 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가지에도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흩날렸다.
바람이 제의 얼굴을 보듬고 지나갔다.
하지만 과거의 시간에 얽매인 제의 표정은 쓰다듬는 바람이 무색할 만큼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