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전의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제는 하품을 길게 하며 중얼거렸다.
"이른 시각부터 움직이니 노곤하구나.."
그래도 성과가 없지는 않아 다행이다.
숙부를 볼 수 있는 정당한 핑계도 생겼기 때문에
하지만 온몸을 노곤히 누르는 피곤만큼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건 그렇고 아바마마께서는 숙부얘기만 나오면 낯빛이 어두워지시는데..."
깊게 생각하던 제가 이내 도리질을 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아닐거다 아닐거야.. 이대로 한 숨 푹 잤으면 좋겠구나."
얼마즈음 누워있었을까?
고요한 적막 가운데 졸음을 깨우는 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조강 시간이옵니다."
"....."
"저하 일어나셔야 하옵니다. 문학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알겠다."
그럼 그렇지 피곤하다고 조강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제는 노곤한 발걸음을 질질
끌고 걸음을 옮겼다.
***
동궁전의 비현각(세자가 공부하는 곳)
"....이건 이러하옵니다. 이해하셨사옵니까?"
"......"
"세자 저하.."
졸렸던 탓일까? 문학의 목소리가 마치 듣기 좋은 자장가를 듣는 듯 제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하겠습니다."
벌써 끝인가?시간이 어떻게 간 지도 모르겠군.
마지막 말을 마친 문학이 예를 올린 후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하암"
동창을 바라보던 제가 긴 하품을 내뱉었다.
열린 동창을 통해 느른한 햇빛이 포근히 제를 감싸안았다.
"정말 자야겠구나."
이내 몇번 몸을 뒤척이던 소리가 들리고,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
얼마나 잔 것일까?
눈을 비비며 제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 해가 떠 있으니 그리 오래잔 것은 아니리라.
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개운하구나 개운해"
제가 기지개를 피던 그때였다.
"형님 예서 주무시면 아니되옵니다."
제의 뒷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란 제가 소리쳤다.
"아아.. 형님 놀라셨습니까?"
제를 바라보며 웃으며 소년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직 흐린 눈을 다시 비비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보기좋 은 미소를 머금고 있고,항상 웃고 있는 호선의 눈매를 가진 소년.
낯선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의 동생인 효령이었다.
"형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지 않습니까?"
효령의 눈매가 더욱 호선을 그렸다.
"네가 여긴엔 무슨 일이냐?"
"제가 여기 있는 것이 이상하십니까?"
제를 바라보며 효령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예 있는 지 어찌 알고 왔느냔 말이다."
"형님이 계신 곳은 어디든 알고 있습니다."
효령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다 하고 왜 나를 깨우지 않은 것이더냐?"
"형님이 너무 곤히 주무시길래 깰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동생에게 자는 모습을 보이다니 이게 웬 추태란 말인가?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제가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그저 형님을 보러 왔습니다."
이 녀석이 아무 일도 없이 나를 찾아 왔을 리가 없다.
제는 이유를 찾으려 머리를 굴리고 굴렸다.
그런 제를 바라보던 효령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실은 말입니다.."
효령이 제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형님이 월궁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입니다."
듣는 귀를 의심하며 제는 모르는 척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
"휴우 다행입니다. 설마 형님께서 월궁하셨겠습니까?"
쉽게 넘어가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제에게 효령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형님 궁밖은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았다. 별이 쏟아지고..."
급히 입을 막은 제는 효령을 바라보았다.
효령의 입가에 미소는 더욱 더 짙어졌다.
"형님"
"...."
제는 불안한 눈길로 효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로 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효령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형님 아우가 부탁이 있습니다."
효령의 목소리에 제는 일순 굳어버렸다.
무슨 부탁일까?
좋지 않은 느낌에 심장이 요동쳤다.
그사이 가까이 있던 효령이 더 가깝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제의 얼굴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웃으며 말했다.
"왜 이리 굳어 계십니까?형님 이 아우 이상한 부탁은 하지 않습니다."
효령의 햇빛을 품은 포근한 웃음에 제는 저도 모르게 아우를 의심했던 미욱한 자신을 탓했다.
그런 제를 향해 효령은 햇빛을 닮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저도 데리고 나가주십시오."
***
자신의 침소로 돌아온 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습관처럼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얼굴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저하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제의 옆에 서 있던 훈이 나직히 물었다.
"아무 일도 없다."
"아무일도 없사오신데 그리 어두워 보이십니까?"
"그리 어두워 보이느냐?"
"이제 것 제가 본 가운데 가장 어두우십니다.무슨 연유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나이까?"
"정말 아무 일도 없다."
자신있는 대답과는 다르게 얼굴의 수심은 더욱 더 깊어져갔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제가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은 끌던 제가 천천히 훈을 바라보며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월궁한 것을 들킨 것 같구나."
훈은 제의 말에 자신이 살아왔던 삶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감을 느꼈다.
자신이 익위사로 임명되던 때부터 월궁을 하던 날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해 문책을 받는 날까지...
제가 굳은 훈을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훈의 얼굴은 아까의 제의 표정보다 더 어두워졌다.
"저하.."
"괜찮다고 하지 않았더냐? 월궁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효령이다."
"효령왕자님 말씀이시옵니까?"
"효령이 함구하기로 하였다. 다만..."
잠시 말끝을 흐린 제가 훈의 표정을 살폈다.
월궁을 들켰다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효령이 같이 나간다는 말을 하면
저 표정이 더 심각해지리라..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머릿속에서 미래의 훈의 표정을 털어내듯 제가 머리를 흔들며, 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훈이 무엇인가 수상쩍은 눈매로 제를 살폈다.
무엇인가 수상하다..
제의 입가에 무엇인가를 뱉으려다 사라진 그 순간을 훈은 놓치지 않았다.
"정녕 아무것도 아니시옵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훈의 물음에 제가 애써 딴청을 피웠다. 훈은 눈초리를 거두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저하..소신 저하를 믿사옵니다."
"믿거라 내 너를 곤란케 한 적이 있더냐?"
예 정말 많사옵니다.
"...없사옵니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참은 훈이 조용히 읊조렸다.
제가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선선히 자신의 귓가를 쓰다듬었다.
잠시후, 제가 입을 다시 열었다.
"그건 그렇고..찾았느냐?"
저번 여인에 대한 물음이었다.
"찾았사옵니다.."
"정녕 찾았느냐?"
찾았다는 말에 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찾았사옵니다."
"어찌 이리 빨리 찾은 것이냐?"
대답을 촉구하듯 제의 시선이 훈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나머지 익위사들에게 저하의 호위를 맡기고 밤새 제가 찾아보았습니다."
"..고생하였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것이 내 명 때문이었다니..
괜히 미안해 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미안한 마음을 떨치려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흠흠..그래 어디사는 누구라 하더냐?"
"중추부사 곽선의 얼녀 휼이라고 하옵니다."
"휼이라 듣기 좋은 이름이구나."
이름을 되내이던 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 이름도 알았고 사는 곳도 알았으니 흐르는 슬픔만 닦아주면 되겠구나."
제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그런 제를 바라보며 훈이 물었다.
"저하.. 설마 오늘도 나기시려는 것이옵까?"
"당연한 것 아니냐? 너도 약조하지 않았더냐?"
훈이 입가에 느껴지는 쓴맛을 삼켰다.
"알겠사옵니다..정말 이번만이옵니다?"
"알겠다. 나를 믿거라."
'하하하.. 정말 미안하구나 훈아
다음번에도 잘 부탁한다. 다음에는 한 명이 더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
거뭇거뭇한 어둠이 온 세상에 내리 앉았다.
밤의 어둠사이로 어제보단 작은 하얀 달이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이 내리는 궁궐의 담자락 두 사내가 어둠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하 이제 가시면 될 거 같사옵니다."
훈의 말에 제가 자신의 옷을 털며 걸음을 옮겼다.
"이것도 몇 번 해보니 생각보다 재밌구나 그렇지 않느냐?"
제의 말에 동의를 못하듯 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옵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알겠다 하지 않았느냐? 빨리 넘어가자꾸나."
제가 담벼락을 넘으려 할 그 때였다.
'촹'
훈이 돌연 칼을 뽑아 온 길을 바라보았다.
곧, 구석의 담벼락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훈이 낮게 입을 열었다.
"게 누구냐 조용히 나오거라"
훈의 날선 물음에 일순 정적이 일었다.
순간 정적을 깨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야옹"
갈색의 털을 가진 평범한 고양이..
훈은 순간 기운이 탁 풀림을 느꼈다.
고양이 때문이 이 난리를 치다니..
"무엇이더냐?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냐?"
멀리 제의 물음에 훈은 붉게 물든 볼을 감추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저 고양이 한 마리였습니다."
"그래? 별일 아니지 않느냐 서둘러 가자꾸나."
서두르라는 말을 남긴 제는 담벼락을 넘었다.
"이상하구나 이상해."
훈이 겸연쩍은 듯 다시금 응시하다 이내 자리를 떠났다.
***
제와 훈이 떠나고 얼마즈음 지났을 때 고양이가 나왔던 조용한 담벼락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효령이었다.
"다행이구나."
제가 넘어간 담벼락을 바라보며 효령이 중얼거렸다.
다음번에 나갈 때에는 자신과 같이 나가기로 약조한 형님께서 이리 또 몰래 나가시다니..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다.
담벼락을 바라보던 효령이 짙은 미소가 걸렸다.
"형님 제게 말도 안 하고 가시다니 분명 무엇인가가 있겠지요?"
효령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궁금하군요 궁금해..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습니다. 허나 다음은 함께 일 것입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