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Prologue
1.
모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성 바스카빌 수도원의 3만 명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초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린 성기사가 물었다.
“‘그들’이 올까요?”
“올 거다.”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는 힐끗 자신의 어린 후배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승리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상대로는 특히나…….
그래도 3만 명이었다. 3만 명의 성기사에 성녀는 두 명이나 있다. 늙은 기사는 소년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그 순간, 망루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거대한 본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이쪽을 향해 활강했다.
“왔다! 놈이다! ‘그들’이 왔다!”
‘그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다섯이었다. 그때 늙은 성기사는 본 드래곤 머리에 있는 붉은 옷의 마법사를 보았다. 그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누구라도 마나 섞인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메테오!”
전설의 9서클 주문. 인간의 몸으로 어둠의 진영에 들어간 자. 어둠에게 먹히지 않고 마침내 그들을 지배한 자!
구름이 도넛모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거대한 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처럼 붉은 운석은 거대한 울음을 토했다. 늙은 성기사는 전멸을 예감했다. 성기사는 죽음 앞에서 마지막 저주를 퍼부었다.
“자이하! 대대손손 저주가 있으라!”
2.
“……자이하 씨? ……지하 씨?”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들어 깨웠다. 나는 그제서야 침을 쓰윽 닦았다.
“아, 네, 넵!”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면접 번호를 부르고 있던 조교가 한심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면접 대기하시면서 졸 정도면 붙을 자신이 있으신가보네요. 기대하겠습니다.”
역시나 주변이 웃음바다가 됐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잠결에 지하를 자이하로 들은 것 같았는데?’
잘못 들었나?
어쨌거나 이상한 꿈이었다.
Chapter 1. 사나이의 길
1.
김지하, 21세. 내신은 1등급이고, 결석 하나 없는 출석부다. 수능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3년 내내 수시 서류 전형에서는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게도 딱 하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지하 씨? 김지하 씨?”
“아, 네, 넵.”
“자네, 질문에 대답 안 하나?”
교수님이 짜증스러운 어투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 목이 꽉 막혔다.
너무 긴장해서 질문을 못 들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진짜로 머저리 소리 들을 게 분명하니까.
“대, 대, 대, 대, 대답은…….”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젖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왼쪽 다리를 덜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한쪽 손으로 다리를 꽉 찍어 눌렀다.
주변에서 저마다 불쾌한 듯 속닥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대답은?”
“저, 저, 저, 저, 저, 저는…….”
그들의 눈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혀왔다. 공기가 내 가슴을 꽉 누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 참다못한 교수가 책상을 치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난해 유니세프에 자원봉사한 이유가 뭐냐고!”
아, 그걸 물어봤구나.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알 수 있어서. 나는 안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저는 고교생으로서 가난하고 힘든 아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방학 동안 직접 유니세프에 나서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 말에 교수님들이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으면서 저는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눠준다는 것이 뭔지 배울 수 있는 기회였죠. 저는 그 점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면접관들은 너무 감탄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보다 너무 오래, 아주 오래?
나는 그제야 그들이 감탄한 게 아니라 놀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그 순간 깨달아 버렸다. 내 입에는 엄지손가락이 물려 있었다는 걸. 이빨은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면접 내내…….
나는 너무 놀라서 왼쪽 다리를 떨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덜덜덜…….
2.
면접 장소에서 나오자마자 부산에 계신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내년 수능 정시에서도 떨어지면 군대에서 부른다는 걸 친히 상기시켜 주셨다.
대학문은 넓다. 하지만 소위 명문대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게 또 현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매번 중간, 기말고사마다 철저하게 시험을 봤고 그 후에 있는 수능도 필사적으로 봤다. 종로에 있는 학원뿐만 아니라 노량진 학원가도 전전했다.
하지만 학원마저도 이 소심증을 고쳐주지는 못했다.
언제나 수능점수가 좋지 않은 나에게는 수시가 전부다. 그리고 그 수시는 더욱더 면접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14년을 사교육비 부어 공부시켰는데, 욕심 낮춰 지방대 가는 걸 부모님이 용납하실 리 없다.
결국은 바뀌어야 했다.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
이 바람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폴더를 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선배. 안녕하세요!]
“으응, 잘 지내지?”
[당연하죠. 선배 저희 학교 면접 보셨다면서요! 어때요? 잘 보셨어요?]
그녀는 방금 면접 본 S모 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선배는 소심한 것만 고치면 최고일 텐데……. 우리 학교가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
그렇게 쿨하게 말해 버리고는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그 웃음소리에 나는 오늘 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선배, 그쯤 되면 병인데요? 정신과 가서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 갔지. 그렇지 않아도 어제 상담 받았어.”
[뭐래요?]
“치료법으로 가상현실 게임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 상담과 함께 병행하면 효과가 있을 거래.”
[아, 맞아요. 그걸로 자폐 아동을 치료했다는 기사를 본 적 있어요.]
그녀가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익명성을 이용해 내면을 표출하는 거잖아요. 좋은 치료법이라고 생각해요. 아참, 그 게임, 친한 선배님이 하고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일단 가상현실 게임을 하려면 게임 캡슐을 사야 하는데, 그 말인즉 부모님이 주신 학원비를 캡슐 사는 데 써야 한다는 것. 뒷수습이나 할 수 있을지.
[선배, 지금 학원 더 다녀서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어요?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면접이 떠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가 딱딱 떨려왔다. 무리다. 정말로 무리다. 이제는 뒤로 도망칠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부모님은 절대로 이해해 주지 않으신다. 게다가 이미 세 번이나 물먹은 몸이다. 같은 방식으로 해봐야 네 번째도 박살나는 건 당연한 일.
‘해볼까. 정말로 이제는 의사 선생님 말처럼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수밖에 없을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친한 선배? S대학교?”
[네, 굉장히 유명해요. TV에서도 몇 번 나왔대요.]
“나이는 어떻게 되는데?”
[음, 학번만 아는데……. 일단은 학교 졸업하셨어요.]
그 말에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명문대 졸업하고도 게임폐인이라. 남들은 가정을 걱정하고 취직을 생각할 때 속편하게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다는 뜻. 왠지 그런 타입은 친해지기 꺼려진다.
[소개시켜 드릴까요?]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그 정도 고수면 뭔가 도움이 되겠지 싶었다. 하다못해 아이템이라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나는 이 생각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참, 게임캡슐은 어느 기종으로 하실 건가요?]
“어느 기종이라니?”
내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그녀가 맑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이자 12개월로 싸게 나온 거 있는데 그걸로 사실래요? 엔진은 G-Force12000에 발열량은…….]
그녀는 이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본체니 개조니 하는 말까지 접어들자 결국 항복했다.
“그래, 그걸로 주문해 줘.”
[오케이! 걱정 마세요.]
3.
그녀가 고른 캡슐은 흰색 타원형에 반들반들한 재질이었다. 설치하시는 분이 안목이 좋다고 칭찬하는 걸 봐서는 꽤나 유명한 메이커인 모양이다.
설명서를 읽기 전에 일단 접속해 보기로 했다. 간단한 회원가입을 끝내자 이윽고 주변이 깜깜해졌다.
― 하나, 둘……. 접속했습니다.
그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이윽고 그리스 조각상 같은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 트리키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자님, 저는 당신의 수호신 테티스입니다.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티 한 점 없이 투명한 피부였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미모에 당황한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생성합니다.”
― 종족을 골라주세요.
그 순간 내 주변에 열 개의 거울이 떠올랐다. 거울에는 엘프나 다크엘프, 드워프가 된 내 모습이 나타났다.
“인간으로 할게요.”
― 인간으로 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간단한 머리색과 얼굴 그리고 문신을 만들 수 있는 창이 나타났다.
‘역시 달라지는 게 좋겠지.’
솔직히 이런 말하기 싫지만, 나는 내 얼굴이 컴플렉스다.
그렇다. 좋게 말하면 깔끔한 인상이고 나쁘게 말하면 흐린 인상. 오죽하면 1년 함께한 담임선생님도 내 얼굴을 보며 ‘너 우리 반이었니?’ 라고 할까.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일단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나는 눈매를 날카롭게 다듬었다. 문신도 할까 하다가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 싶어서 ‘확인’을 눌렀다.
내 수호신이라는 아가씨가 말했다.
― 외모는 성향과 매력수치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니 이 점 기억해 주세요. 캐릭터 이름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나는 문득 어제 면접 때 꾼 꿈이 생각났다. 어색하게 꿈에서 들은 이름을 발음해 봤다.
“자이하.”
― 자이하로 하시겠습니까?
남에게 자이하라는 이름을 들으니 그 이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이하.”
― 캐릭터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차원의 문을 엽니다.
그 순간, 오프닝 동영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 명의 여신이 거대한 대륙 위에 서 있었다. 한 여신은 쇠사슬에 묶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남은 두 여신은 각각 검은색 날개와 흰색 날개를 펼치며 서로를 향해 공격했다.
미래의 여신, 라엔. 빛의 수호자.
그녀가 창을 뻗자 하늘에서 번개가 쏟아졌다. 엘프, 드워프, 인간 등 수없이 많은 종족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검은 날개의 여신이 활을 꺼내 그녀를 공격했다.
과거의 여신, 엘룬. 어둠의 어머니.
수인족, 다크엘프, 벰파이어 같은 종족들이 무기를 꺼냈다.
빛과 어둠의 진영이 부딪친다. 땅이 울리고 바닥이 흔들렸다. 거대한 대륙에는 바람의 강이 생겼다. 그 순간, 쇠사슬에 묶인 남은 여신이 눈을 떴다.
현재의 여신, 엘라엔.
날개 없는 여신은 인간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루비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꼼짝도 못하고 여신의 눈에 붙잡혔다. 왜 나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동영상일 뿐이야. 동영상일 뿐이야.’
아마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유저를 쳐다보게끔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바람을 울렸다.
Twilight 황혼의 슬픔을
Dusklight 부서진 대지를
모래 위로 그리움 남기네.
빛과 어둠의 여신이 엉키자 두 대륙이 부딪쳐 엉켰다. 그러나 현재의 여신이 있는 대륙은 점점 멀어져갔다.
오프닝 영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이 진공청소기로 쭉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뜨니 초록색 잔디밭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잔디밭 위에 떨어지는 중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가 뻐근해졌다.
“크으, 이거 충격도 그대로 전해지네.”
가상현실, 가상현실 하는데 이쯤 되면 진짜 현실이랑 뭐가 다를까 싶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있던 시절, 이른바 고전게임 정도는 해봤지만, 게임이 이렇게 진화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