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목표를 찾았으니 이제 설득만 하면 될 일이다. 그 전에 나는 커다란 바위를 발로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작난 건 내 다리일 뿐, 당연하게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신음을 지르며 붕대를 꺼내들었다.
― 붕대감기(초급)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144/144)
― 붕대감기 초급을 마스터했습니다. 붕대감기 중급 스킬북을 구입해 주세요.
― 붕대감기를 마스터하여 경험치가 2640 올랐습니다.
나인이 그런 나를 보더니 ‘상처 잘 나서 좋겠습니다. 약골마법사’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할 수 없잖아요!”
“스킬북 살 돈은 있어요?”
그 말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나인이 방긋 웃었다.
“오늘은 특별히 사부가 사드리도록 하죠.”
그러고는 길드 돈주머니를 짤랑짤랑 흔들었다. 처음보다 절반은 줄어 있는 돈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기왕 덤터기 쓸 거, 써 보고나 죽을랍니다.”
내 말에 나인이 환하게 웃었다.
4.
― 붕대감기(중급) 스킬을 배웠습니다. 이제 붕대를 직접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붕대 만들기(초급)
옷감이나 가죽으로 붕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옷감과 가죽의 성능에 따라 붕대의 효과가 결정됩니다.
숙련도(0/144)
이 스킬을 배우고 나서 추가로 스킬북 하나를 더 샀다.
붕대 만들기 레시피(기초)를 배웠습니다.
염소풀로 약한 해독의 붕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리넨천으로 기본 지혈 붕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양모로 강한 지혈 붕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충 이렇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생명연장의 꿈을 이루겠다는 내 바람이 그대로 나타난다.
― 아이언 실드를 배웠습니다.
나인 말로는 말이 좋아 아이언 실드지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종이 실드라고 부른단다. 검사 칼질 한 방이면 찢어진다는데 그래도 한 대 안 맞고 시작하는 게 어디냐.
― 프로즌을 배웠습니다.
바닥을 치면 주변이 얼어붙는다. 적의 발을 묶고 도망치는 데 쓰는 스킬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마법사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마법이다. 내친김에 옛날부터 사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못 샀던 스킬북도 질렀다.
― 초급 봉술을 배웠습니다.
그렇다. 몸으로 못 막으면 지팡이로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력이 없으면 때려서라도 잡아야 한다. 그렇기에 마법사에게 봉술은 생명과도 같다고 나인이 말했다.
듣고 나니 또 그럴 듯해서 이참에 하나 샀다.
스킬북으로 배부른 건 또 처음이다. 나인이 말했다.
“어째 빛의 진영 마법들은 방어 쪽이 많군요.”
황혼의 마법사의 특징이 그런 건지 두 쪽 마법서 모두 다 익힐 수 있었다. 엿 같은 체력과 지구력도 이 순간만큼은 용서가 되었다.
우리는 추가로 물약도 잔뜩 샀다. 돈이 넘치니 몸 지키는 데 돈을 아끼지 않게 된다. 둘 다 회복마법을 못하니 붕대도 잔뜩 사재꼈다.
“뭐, 이 정도면 중무장이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을 그렇게 나서려던 찰나 그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던전에 가기 전에는 퀘스트를 받아야죠.”
“아.”
“레인 시티에는 밴시의 탑에 관련된 퀘스트들이 많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집집마다 돌아보니 거기에 아이가 없어졌다는 둥, 아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밴시의 하녀 20마리를 잡아 증표를 가져오라는 둥의 퀘스트들이 많았다.
“이대로라면 던전 한 번 돌고 나면 40레벨 그냥 넘겠는데요.”
“후후후, 그래서 경험 있는 사부가 중요하답니다. 이참에 히든 퀘스트도 해볼까요?”
히든 퀘스트?
일반 공략집이나 포럼에는 알려지지 않은 퀘스트. 보상은 착하나 난이도는 꽤 어렵다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알고 있어요?”
“네. 지금의 자이하 군이라면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남들은 모르는 퀘스트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왠지 전설의 기사님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마을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에서는 베틀 소리가 달칵달칵 들렸다. 나인은 턱짓을 했다. 혼자 들어가보라는 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문을 끼익 열었다.
한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옷감을 짜고 있었다. 그녀는 기묘한 멜로디를 흥얼거렸는데, 자장가 같았다.
‘이 여자 미친 것 같은데?’
머리에 꽃만 안 꼽았다 뿐이지, 전형적인 미친년의 패턴을 따르고 있었다. 그대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헉! 미친 여자랑은 절대 눈 마주치면 안 된다는데.’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나를 인식했는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노인의 얼굴인데도 미소는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사위?”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총각한테 웬 사위? 나는 퀘스트를 위해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이 나쁜 놈아아아앗!”
밝고 순진했던 미소는 어디 가고 이 자리에는 악귀만 남았다. 노망난 할머니는 다짜고짜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내 딸 내놔라! 이놈아! 내 딸 내놔라! 아이고! 미친놈아!”
미친 건 할머니잖아요.
에고고, 뭔 놈의 할머니가 손아귀 힘이 센지 다짜고짜 나를 패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칠까 싶어 문을 봤다. 그런데 나인 놈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쾅 닫는 게 아닌가?
할머니의 구타는 계속됐다.
― 출혈상태에 빠집니다.
아, 망할 놈의 종이 체력. 할머니한테 맞았다고 출혈상태야.
나는 몸을 웅크리고는 그저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도망을 치던지 되레 할머니를 때렸을 상황.
나는 도망도 못 가고 차마 할머니를 때릴 수도 없어 그냥 맞고만 있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분이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
“도망친 네놈이 돌아왔으니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거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지? 당장 가서 데려와!”
딸을 데려오라고?
문득 나는 벽에 걸려 있는 피 묻은 웨딩드레스를 발견했다. 그랬다. 이 할머니의 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혼식 날 소박을 맞은 모양이다.
“딸은 어디에 있는데요?”
내 물음에 할머니가 창밖을 가리켰다.
그 순간 내 몸이 얼어붙었다. 할머니는 밴시의 탑을 가리켰다. 물론 거기까지는 예상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손가락 방향이 문제였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탑의 꼭대기, 그러니까…….
“밴시?”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보스몹?
5.
[미친 할머니의 부탁]
할머니의 구타를 꿋꿋이 버틴 당신, 덕분에 히든 퀘스트를 얻게 되었으니 전화위복.
딸의 결혼식 날, 하나뿐인 사위는 다른 여자와 눈 맞아 도망쳤고 딸은 자살해서 밴시가 되었다. 할머니는 그 사실에 그만 미쳐 버리고 만다. 지금은 미쳐 버렸지만, 옛날에는 북의 마녀 클라레스로 불리던 몸. 딸을 성불시켜 주면 그녀의 보물을 선물해 주겠다고 한다.
-보상 : 겨울의 로브(희귀), 냉기의 지팡이(희귀)
-밴시 사망 시 퀘스트 실패
그녀는 이 퀘스트를 부탁하며 내게 오카리나를 건네주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걸 봐서는 보통 물건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해? 가봐! 가보라고!”
할머니는 나를 문 밖으로 내쫓았다.
나인은 상처투성이가 된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퀘스트 잘 받았어요?”
“이렇게 쳐맞을 거 알고 데려온 거죠!”
“하지만 저처럼 가녀린 사부가 대신 맞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를 굴려먹었다?
이 사악한 인간아.
내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나인은 방글방글 웃으며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게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요. 히든 퀘스트는 보상도 짭짤하답니다?”
이건 누가 봐도 광랩 노가다 코스다. 쌓여 있는 일반 퀘스트나 히든 퀘스트를 봐서는 던전을 돌고 나면 45레벨은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여섯 명이서 경험치 나눠 갖는 걸 지금 나 혼자서 해야 하니까.
나인이 말했다.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거예요. 남들보다 좀 빡센 코스거든요.”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저 혼자 해도 되는 거예요?”
“컨트롤의 마법사 아니겠습니까. 요령을 알려드릴게요.”
이상하다. 나인이 절대로 이렇게 친절한 놈이 아닐 텐데? 그리고 보니 아까부터 스킬북도 알려주고 히든 퀘스트(?)도 알려주고 아주아주아주아주 친절했다.
그게 어쩐지 더 불안했다.
물 없이 식빵만 삼킨 것처럼 가슴이 퍽퍽해졌지만, 불안함을 안고 일단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밴시의 탑 입구는 꼭 무슨 지옥문 같았다.
6.
밴시의 탑은 가운데에 나선 계단이 있고 10층이 꼭대기다. 원래라면 1층부터 차근차근 도전해서 레벨을 쌓아 10층까지 올라가는 게 순서, 그런데 나인은 난데없이 나를 4층으로 데려갔다. 몹 이름이 죄다 시뻘겋게 보이자 무지하게 겁났다.
“나 평타 두 번 맞으면 죽을 텐데요?”
“아이언 실드까지 합치면 세 번이죠.”
두 번이나 세 번이나 다를 건 없다. 단지 죽는 시간이 한 2초 더 느려졌다 뿐이지.
4층에서 보이는 인간들은 갑옷도 전부 반짝반짝한 게 마법이 걸려 있는 것들뿐이었다. 이런 여섯 사람이 힘들게 잡는 걸 나 혼자 잡아야 하다니.
솔직히 불가능해 보였다.
“저, 정말로 가능한 거죠?”
“제 말만 들으면 된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가슴을 땅땅 치는 게 아닌가! 저걸 보고 있으니 더 불안해졌다.
나는 우선 아이언 실드를 시전했다. 나인이 말했다.
“지금부터 알려줄 테니까 그대로 해보세요.”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나가는 밴시의 하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스 애로우.”
“내가 원하는 힘, 작은 물의 분노. 아이스 애로우!”
밴시의 하녀에게 직격, 나인이 말했다.
“클러치!”
내가 주먹을 쥐며 주문을 외우자 하녀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 밴시의 하녀가 멍해짐에 저항했습니다.
“다시 아이스 애로우.”
“네?”
“늦으면 죽어요. 아이스 애로우!”
“내가 원하는 힘, 작은 물의 분노. 아이스 애로우!”
― 밴시의 하녀가 느려짐에 저항했습니다.
역시나 던전 몬스터, 마법 저항 자체가 달랐다.
“크, 클러치!”
― 밴시의 하녀가 밀려남에 저항했습니다.
― 밴시의 하녀가 멍해짐에도 저항했습니다.
이제 그녀와 나 사이에는 세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그림자같이 시커먼 몸체와 붉은색 눈이 섬뜩했다. 그녀가 식칼을 내게 날리려는 순간, 나인이 소리쳤다.
“뭐해요! 프로즌! 블링크!”
나는 땅을 치며 소리쳤다.
“프로즌!”
그녀의 몸이 굳었다. 동시에 나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시공의 뒤틀림. 나의 의지. 블링크!”
내 몸이 뒤로 훅 밀려났다. 나인이 내게 다시 얼음 화살을 날리라고 했다. 그 순간, 그가 시키려는 게 뭔지를 깨달았다.
아이스 애로우, 클러치, 프로즌 연계기만으로 죽이라는 말이었다. 던전 몬스터를…….
“그,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저항이라도 뜨면 즉사라고요!”
그 말에 나인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라, 프로즌 풀렸네요.”
이런, 그 사이에 마법이 풀려서는 나한테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주문을 외웠다. 아이스 애로우가 명중했다. 클러치를 외치자 그녀의 몸이 쭉 밀려났다.
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저항이 안 떴다.
나는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마법사도 이동하면서 주문 쓸 수 있었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매번 주문을 외울 때마다 가만히 붙어 있어야 하니…….
주문을 마치고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이스 애로우!”
― 밴시의 하녀가 아이스 애로우에 저항했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몬스터가 밀려남이나 느려짐 같은 효과가 아니라 마법 자체에도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기다가 마법이 저항 뜨고 나면 이어지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밴시는 나를 향해 식칼을 내리꽂았다.
“아이고,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