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계단을 밟았다.
시커먼 어둠이 5층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복도식인 4층과는 달리 탁 트인 광장이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내 말에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보니 그랬다. 원래라면 한창 파티사냥을 할 때였다. 그런데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니 몬스터들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나는 4층에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냥하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발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는 어딘가 기괴했다.
세실 님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자이하 군 사부입니다.”
나인이었다. 다행이도 그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의 머리에는 큼지막한 혹이 나 있었다.
로브 밑으로 살인자의 눈동자가 비치자 세실 님이 겁에 질렸는지 내 뒤에 바짝 붙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혹은 뭐예요?”
“그게 관광하다가 넘어졌거든요. 덕분에 아직도 머리가 울려요. 아웅…….”
그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그나저나 이 층,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거죠?”
내 말에 나인은 아하! 하고는 뭔가 깨달았는지 손바닥을 찰싹 부딪쳤다.
“그게 넘어지면서 후드가 벗겨졌거든요. 누군가가 카오스 로드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전부 도망쳐 버렸지 뭐예요.”
그 순간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오스 로드라고라. 얼굴이 드러났다고?
“저기 그 말은…….”
“조금 있으면 빛의 진영 정예들이 포스(1포스=6파티, 1파티는 6인으로 구성) 만들어서 몰려올 거랍니다. 데헷.”
지금이 ‘데헷’ 할 때냐……. 으득.
세실 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카, 카오스 로드라고요?”
아, 이런. 설명이 필요했다.
“아, 저, 저기 그렇게 나쁜 분, 분은 아닙니다. 그, 그냥, 제, 제, 제 사부…….”
틀렸어. 이래서는 원숭이도 설득 못 시켜!
사나이는 강철 주둥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렇게 그녀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행여나 또 말을 더듬을까봐 단숨에 말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은 있지만, 자칭 사부입니다.”
“자, 자이하 님 사부라고요?”
순간, 버릇처럼 손톱을 씹고 싶어졌다. 나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꽉 잡아 내렸다.
나인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사부 맞습니당.”
그녀는 내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맙소사, 그녀는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내게 의지했다. 그만큼 카오스 로드는 악독한 존재인 모양…….
그 순간, 그녀는 내 어깨를 밟아 올라가더니 단숨에 제비처럼 날아가 나인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나인이 기다렸다는 듯 양손을 교차하며 가드했다. 그녀의 신발에서 수십 개의 침이 날아갔다. 나인의 팔을 벌집으로 만들려는 찰나, 그가 발을 쿵, 하고 굴렸다. 그러자 하얀 뼈들이 벽처럼 솟아오르며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아닌가.
나인이 말했다.
“아하하하, 오랜만이에요. 얀 님.”
얀? 방금은 세실이라고 했잖아.
그녀는 자신의 뺨에 손을 얹더니 이윽고 얇은 비닐 같은 것을 뜯어냈다. 그러자 본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순진무구하던 여린 소녀는 어디 가고, 날카로운 눈매의 여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까의 아가씨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기습도 안 통하는군요.”
그러고는 갑자기 바리톤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이 괴물 같은 자식아.”
나인이 웃었다.
“아아, 보기 좋게 통했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로브 왼쪽 소매를 찢었다. 그러자 네크로맨서답지 않게 근육 잡힌 팔이 드러났다. 그녀의 침이 스친 부분에는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독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말했다.
“제자를 이용하면,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녀 너무 아쉽답니다. 이 개새끼야.”
한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의 변화는 남달랐다.
문득, 파티창에 ‘세실’이라고 써 있었던 게 얀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디를 속일 수 있다. 그건 단 하나의 직업만이 가능한 일.
‘암살자.’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집어 던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나인이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절 죽이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했군요.”
“호호, 네크로맨서한테는 마법화살이 안 박히잖아요. 덕분에 익숙하지도 않은 총기 익히느라 고생했답니다. 이 새끼야.”
그렇게 말하고는 다짜고짜 내 머리통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게 아닌가.
“자이하 님?”
“아, 네, 네에?”
그녀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하 님은 정말 제 타입이랍니다. 이런 일만 없었다면 제가 먼저 집적댔을지도 몰라요. 아시죠?”
어디서부터가 진심일까.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가 후후 웃었다.
“하여간 과묵하시긴. 어쨌거나 저기 사랑스러운 사부한테 무장 좀 풀고 제자를 위해 좀 죽어주실 수 있냐고 물어봐 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자이하 님 이마에 바람구멍을 내는 건 저도 바라지 않아요.”
나는 양손을 든 채로 물었다.
“처음부터 절 이용하신 겁니까?”
“동물농장 길드 사태 때부터 쭉 지켜봤답니다. 이미 소문 빠른 사람들한테는 자이하 님은 유명인사라고요. 천하의 카오스 로드가 애지중지하는 제자라던데.”
그러면 그렇지. 이놈의 인생에 무슨 횡잰가 싶었더니 이럴 줄이야. 내가 또 대답 없이 한숨만 쉬자 그녀는 처음 봤을 때 그때의 그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 저, 죄송해요. 하지만 자이하 님이 마음에 든 건 정말이에요.”
물론, 그녀는 이 와중에서도 총을 내 머리에서 떼지 않았다.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나인에게 다시 물었다.
“어쩔 거냐. 개자식아.”
나인이 대답했다.
“우리 제자는 여자를 주워도 어쩜 그리 싸이코 같은 것만 줍는 겁니까. 이 스승은 마음이 찢어집니다.”
내 최고의 싸이코는 댁이야.
어쨌거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나인 녀석이 나를 위해 희생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인 놈은 뼛속까지 악당이니까.
그렇다고 저 아가씨가 아무리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안 쏠 것 같지도 않았다.
‘아까운 스탯이 날아가는구나.’
그저 체력 스탯치만 어떻게 좀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인이 뼈다귀 벽을 해제하고는 양손을 머리 뒤에 두는 게 아닌가?
“어라, 끔찍하게 아끼는 제자라는 게 정말이군요. 참, 귓속말 하지 마요. 입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녀석만 개죽음이니까.”
그 순간 나인과 내 눈이 마주쳤고, 그의 눈동자가 뭔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자기 몸도 못 지키는 놈이 어디 사내겠습니까?’
그 순간, 피가 거꾸로 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바닥을 후려쳤다.
“프로즌!”
콰앙!
얼음이 삽시간에 퍼져가더니 그녀의 발을 묶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이, 이게 무슨!”
그녀는 당황하며 내게 총을 쏘았다.
―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아 아이언 실드가 깨졌습니다.
― 출혈상태에 빠졌습니다. 3초 후에 멍해집니다!
보호막은 종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괴성을 지르며 그녀의 가슴팍으로 돌진했다.
“프리징!”
차가운 마력이 그녀의 가슴팍에서 터졌다.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
나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발을 구르자 뼈 벽이 다시 만들어졌다.
“이래야 내 제자죠.”
숨이 가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다.
내가 사람을 치다니, 내가 사람을 치다니!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멍해졌다.
“아아, 아파요. 자이하 님, 너무 매정하시네요.”
심장에 직빵으로 마법을 먹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털고 일어났다. 그녀의 가슴을 감고 있는 강철 코르셋이 조금 찌그려져 있었다.
나인은 품에서 보라색 구슬을 꺼내 깨뜨렸다.
“빙의.”
그 순간, 거대한 기사의 영혼이 튀어나와 나인의 몸에 들어갔다. 나인의 눈동자가 폭발할 것 같은 붉은 빛을 띠었다. 그리고는 단검으로 중독당한 오른팔을 잘랐다.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피가 튀었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듯 총알을 갈겼다.
그러나 나인은 급소만 피할 뿐, 총알을 그대로 받아냈다. 고수들의 싸움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 사람의 동작이 물처럼 이어졌다.
“제물, 악마의 상자.”
이윽고 그는 자신의 팔을 떨어뜨렸다. 팔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 그것은 그그그 진동을 일으키며 주변을 삼켰다.
내가 놀라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나인의 섬뜩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지 마세요.”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무서워졌다.
검은 막이 닫혔다. 그리고 막이 열렸을 때는 이미 얀 님은 죽어 있었다.
……가 내 예상이었다.
까앙!
검은 막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균열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균열 사이로 총성이 울렸다.
“라엔이 원하는 빛, 여명의 바람!”
낭랑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균열 사이로 나인의 얼굴이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균열은 점점 더 커졌다. 그 순간, 은빛 총알이 장막를 빠져나와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장막은 사기그릇처럼 단숨에 깨져 버렸다.
그녀는 나인의 손아귀를 피해 표범처럼 창문으로 뛰어 올랐다. 그녀는 무슨 짓을 당했는지 한쪽 팔이 짐승에게 잡아 뜯긴 듯 너덜너덜거렸다.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빡세네요. 자이하 님, 우리 다음에 봐야겠어요. 친구추가 해둘 테니 다음에도 연락해 주실 거죠?”
그 순간, 장막 속에서 뼈 작살이 솟구쳤다. 누가 실로 조종이라도 한 것처럼 그건 정확히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작살을 피하고는 다른 손으로 그걸 잡아 허리 탄력을 이용해 나인을 향해 되쏘았다.
그녀는 나인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펴고는 창밖으로 번지점프를 했다. 오 층이나 되는 높이지만 솔직히 그녀가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인은 작살을 되받아치며 쿡쿡 웃었다.
“아아, 이거. 재미있는 아가씨군요.”
그의 눈동자에 불이 꺼졌다.
옥죄어오던 살기도 사라지자 나는 푸핫, 숨을 내뱉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두 고수의 전투에 내 등 터질 뻔했다.
그때 알림음이 들렸다.
― 얀 님이 친구 신청했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그 아가씨, 진심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