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사야지존
작가 : 나민채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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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
작성일 : 16-11-16     조회 : 730     추천 : 1     분량 : 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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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第1章 이계(異界)의 지하뇌옥

 

 

 

 

 

 울창한 숲 속.

 “크윽!”

 한 사내가 신음을 흘린다. 허리까지 부푼 하얀색 점퍼와 군데군데 찢어진 구제 청바지를 입은 청년. 주변엔 그가 격렬하게 발광한 듯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얀색 점퍼는 온통 새빨간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애초부터 적색 점퍼가 아니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청바지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 찢어진 틈으로 보이는 맨살은 걸레쪽 같았다.

 “울컥!”

 사내는 한 움큼의 선혈을 토했다. 선혈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기 위해 두 팔을 내저었다. 핏물로 흥건한 땅바닥을 짚고 일어서다가 다시 쓰러지는 행위를 반복한다.

 오백만 원을 호가하는 로렉스 순금시계가 번쩍 빛을 발했다. 사내는 얼핏 시계를 쳐다보다가 풋 하고 웃어버린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군.”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하고 뚜렷한 미남형이다. 하늘로 휘감기는 듯한 강인한 인상의 용미(龍眉), 날카로운 턱선, 한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칠흑 같은 해안(海眼).

 사내가 눈을 한 번씩 치켜뜰 때마다 ‘나는 천하지존이다!’라는 오만함이 발광(發光)했다. 사마(邪魔)가 들린 듯한 강렬한 눈빛!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젖히자 황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에서 염색약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지금은 피가 굳어 잔뜩 엉클어진 볼품없는 머릿결이지만 지난 삼 년간 일류미용실을 제집처럼 드나든 사내다. 십자가 모양의 순금목걸이가 머리카락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사내는 일어나는 걸 포기한 채 이리저리 눈길을 돌려 전신을 훑었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핏덩이와 흙먼지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옷이 더러워졌잖아. 큭!”

 짜증과 함께 또다시 한 움큼의 선혈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사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듯한 형편없는 몰골. 그러나 추하지는 않았다. 사내는 잘 다듬어진 육체를 가졌다. 핏물에 절은 점퍼 속의 까만 쫄티가 균형 잡힌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내주었다. 무척이나 강인해 보이는 가슴 근육과 단단한 복부.

 사내는 그렇게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생전처음 보는 무명(無名)의 숲 속이었다. 쫓기던 몸이라 그나마 안심이 되었으나,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야수의 울음소리에 흠칫하기도 하였다.

 사내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재빨리 주머니 속의 잭나이프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잠잠해지면 ‘산에 웬 야수들이 이렇게 많지?’ 하며 손을 놓았다.

 사내의 잭나이프는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면 자동으로 칼날이 튀어나오는 최신식 오토잭나이프였다. 사기(邪氣)가 스민 듯한 날카로운 칼날이 강렬한 은빛을 발해 ‘은도(銀刀)’라 칭했다.

 지인(知人)들 중 하나가 독일의 잭나이프 장인이었다. 사내는 그를 통해 다이아몬드를 조합한 강도 깊은 은도를 특수 주문제작할 수 있었다. 도신(刀身)에 배합된 다이아몬드 가격만 해도 시가 오억을 웃돌았다. 그래서 사내는 아버지가 물려준 강남의 호화주택을 팔아넘겨야만 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독일 장인으로부터 오토잭나이프를 넘겨받는 순간 연신 ‘이건 미친 짓이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은도는 사내의 자신감이었다. 그 다이아몬드 칼날을 바라볼 때면 사내의 모습은 온몸에 사마가 낀 듯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누구도 섣불리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전율스러운 위엄이 새어 나왔다.

 사내가 은도를 들고 있을 땐,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어느 순간 그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살인자로 전락하는 것쯤은 별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한 사내의 눈빛에 소름이 돋곤 하였다.

 사내에게 사악한 기운을 더해주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SIG P―305. 시그사에서 출시된 38구경 최신형 권총. 총신이 황금으로 도금돼 있으며 물속에서도 격발이 가능하다. 이것이 사내의 두 번째 자신감이다. 은도에 비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총기 밀거래가 쉽지 않은 한국인지라 상당한 웃돈을 먹였다.

 

 이튿날 아침.

 사내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무명의 숲 속이었다.

 그러나 한결 좋았다. 어제보다는 사지를 조금씩이나마 더 움직일 수가 있었다.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주변 정황을 살피고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콧등까지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무슨 생각에선지 SIG P―305 대신 오토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사내는 사이(邪異)한 웃음을 흘리며 발자국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촤라락

 츠츠츳

 잡초가 거칠게 젖혀지며 발자국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명이었다. 괴상한 옷차림의 장년남자와 소녀. 둘 다 고대중국의 의상을 걸쳤다.

 사내는 그런 옷차림을 본 적이 있다. TV의 시대극이나 무협 영화에서.

 사내는 웃음을 지우고 오토잭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옷차림이야 어떻든 경계심을 늦출 까닭은 없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먹인다.”

 사내는 오토잭나이프를 쥔 오른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

 그런데 장년남자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높은 억양과 연속된 단어의 나열…… 중국말이었다.

 ‘이건 또 뭐야!’

 일찍이 독어와 영어를 습득한 사내였지만 중국어엔 문외한이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가오지 마.”

 착 가라앉은 음성을 토한 사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오토잭나이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챙

 청아한 금속성과 함께 오토잭나이프의 손잡이에서 날카로운 오색 빛깔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

 순간 장년남자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부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잠시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내에게 다가섰다.

 “죽여야겠군.”

 사내는 진심이었다.

 ‘이미 범법자, 살인자로 낙인찍힌 인생!’

 휘익

 오토잭나이프의 칼날이 막 장년남자의 몸에 닿을 무렵 사내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잘 다듬어진 오른팔 근육이 일순 움찔하며 전방으로 힘을 분출하려는 찰나였다.

 “헛!”

 장년남자의 눈동자에 맺혀가던 자신의 영상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뒤돌아보았다.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끄으?”

 

 안휘성 황산(黃山).

 천상을 찌를 듯한 위용의 봉우리들은 곧은 절개의 표상이다. 광양(光暘)이 황산의 기봉 준령들에 날카롭게 내리꽂히고 있다.

 준령의 이마를 꿰뚫고 내려앉은 풍운에 의해 시야마저 가물가물한 곳. 세월의 모진 풍파를 끌어안은 천 길 단애. 사시사철 백설이 녹지 않고, 거친 석벽들은 칼끝처럼 험난하다.

 그중 우뚝 솟은 천도봉은 주봉으로서 흡사 일국의 군주인 양 위엄이 넘쳤다.

 온갖 거암들로 휩싸인 흑선문, 만 가지 거목으로 빽빽이 가려진 만목장, 검을 위해 산다는 북두제검부. 모두 황산에 자리 잡은 문파로 그중 단연 으뜸은 연화봉, 광명봉, 천도봉의 세 봉우리 정중앙에 위치한 황산파다.

 

 부용검파의 본가가 위치한 천도봉 등허리의 소나무 하나하나가 반듯하고 짙푸르다.

 “아버지, 이 괴인은 누구일까요?”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細腰), 피부가 눈처럼 희다 하여 설부(雪膚), 그런 세요설부의 용모를 지닌 여인. 그녀의 청명한 눈망울이 혼절한 채 드러누운 한 괴인에게 맺혀 있었다. 문주, 아니 아버지의 명으로 이자를 데려오긴 했지만 부용설리(婦容雪悧)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부용검파의 문주 송해일검(松海一劍) 부용지는 고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괴인을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다.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오는 강렬한 눈빛. 게다가 삼국시대의 미염공(美髥公)의 수염이 이랬을까? 가슴까지 흘러내린 부용지의 검붉은 수염은 황산제일의 미염이라는 위명을 얻기에 충분했다.

 “아버지.”

 부용설리의 아련한 음성이 들려오자 부용지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리야, 우린 이만 나가자꾸나.”

 “하지만, 아버지…….”

 부용설리는 망설였다. 듣자 하니 강호에 거대한 혈풍이 불어 닥쳤다고 하였다. 이자가 그 혈풍을 일으킨 혈마교의 마인(魔人)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혈마교의 마인들 가운데 괴상한 인물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혼절한 괴인을 내려다보았다. 괴인의 인상착의는 괴상하다는 한마디로 간단하게 표현할 정도가 아니었다. 반짝거리는 백색의 부푼 상의와 상반신을 노골적으로 감싼 흑포(黑布), 목에 걸린 황금빛 금속…… 청색의 하의 역시 생전처음 보는 괴상한 옷이었다.

 그나마 의복뿐이라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황금처럼 싯누런 저 금발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금발뿐이라면 또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저 괴인이 오른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병기였다. 웬만한 암기라면 음암자(陰暗子) 암 노인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이 병기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단지 단도와 비슷하게 생겼을 뿐.

 “어허, 설리야. 눈을 떼거라.”

 “아…….”

 부용설리는 볼에 홍조를 띠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빠져나간 빈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괴인을 바라보던 부용지 역시 자리를 떴다. 그가 나오자마자 시녀 하나가 따라붙어 수발을 들었다.

 “암 노인께 저자를 돌봐달라고 하거라.”

 “예.”

 시비는 대답하고는 금세 송로(松路)를 따라 사라졌다.

 “아버지.”

 부용설리가 그녀의 아버지를 나직이 불렀다.

 “왜 그러느냐.”

 “저 괴인을 왜 본가에……? 마인일 수도 있잖아요.”

 “마인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겠구나.”

 “허나 아버지…….”

 “그만 하거라. 자, 그만 가보거라.”

 “예…….”

 

 부용검파는 이른 아침부터 웬 괴사내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웠다. 문주의 등에 업혀온 괴인을 목도한 제자와 시비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의복과 머리! 그들이 괴사내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부용지가 문주각에 들어서자 이미 부용검파의 여러 장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장로 송장(松掌) 뇌뇌오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문주를 맞이했다.

 “문주님, 이제야 오십니까.”

 “일장로, 무슨 일 때문에 이리 많이 모였소?”

 부용지는 네 명의 장로와 십이제자까지 모두 모인 것에 대해 놀라워하며 물었다.

 모두들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이따금 부용지와 눈이 마주치면 황망히 고개를 돌리곤 하였다. 그들은 문주 앞에서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장 배분이 높고 고령자인 일장로 뇌뇌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

 부용지를 추궁하는 듯 바라보고 있는 뇌뇌오의 음성은 그윽했다. 초년의 나이로 이곳에 들어와 지금껏 일문의 수발 노릇을 해온 그는 무공 이외에 학식에도 뛰어나 부용검파의 제자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선망과 두려움이 같이하였다. 그의 수련 방법은 무척 지독하여 분골쇄신의 극한 고통까지 이끈다. 하지만 바로 그 수련 때문에 지금의 십이제자가 존재하지 않은가.

 “혹 본인이 데려온 자 때문에 그러시는 게요?”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강호가 어지러울 때 조사도 해보지 않고 그런 자를 불쑥 본문에 들이시다니요. 듣자 하니 그자의 행색이 사마의 잡배들과 다를 바 없다던데…… 아니, 그보다 더하다 들었습니다.”

 일장로 뇌뇌오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앞장서서 말하자 십이제자와 다른 장로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강호는 강호일 뿐. 마인이 이 황산까지 들어오지는 않소. 웬 마인이 겁도 없이 황산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하겠소.”

 “하지만 왠지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어쩌오. 그자는 죽음에 임박한 행색이었소. 그 문제는 나중에 그자가 깨어난 후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소.”

 부용지의 음성 한마디 한마디엔 권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천만 근의 바위가 짓누르는 듯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위엄이었다.

 

 가물가물한 시야. 눈앞에 구름이 내려앉은 듯 사내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희뿌연 광경뿐이었다. 눈을 깜빡이다 두 손으로 한참을 비빈 후에야 초점이 잡혔다.

 “크윽!”

 사내는 신음 소리와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검정 쫄티는 다행히도 방수 처리가 되어 있었기에 선혈이 묻지 않았다. 쫄티를 타고 흘러내린 선혈은 모두 애꿎은 청바지만 흠뻑 적셨을 뿐이다.

 “아!”

 사내는 탄성과 함께 급히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오토잭나이프의 촉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직접 봐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윽한 오색 빛깔을 뽐내는 섬뜩한 칼날! 오토잭나이프를 세게 틀어쥐자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다시 손잡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사내는 금방 다시 오토잭나이프의 칼날을 발출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처음 보는 곳이다. 몸을 감싼 담요를 걷어내고 눈앞의 이국적인 가옥 구조를 주의 깊게 살폈다. 바닥 재질부터가 전혀 생소한 것이다.

 사내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를 부라렸다. 흡사 성난 매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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