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여기는 어디지……? 아!”
사내는 뭔가 기억이 난 듯 탄성을 발했다.
“크으. 그 괴상한 중국옷을 입고 있던 자들. 그자들 집인가? 훗.”
코웃음을 치며 중국풍 건물의 내부 구조를 유심히 살폈다. 채 가시지 않은 고통을 참아내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던 사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까닭 없이 잡혀온 것만도 원통한데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
“하하.”
어느덧 중천에 뜬 태양빛이 중국풍 창문의 얇은 한지를 뚫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내는 상체를 깊숙이 구부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강렬한 햇빛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내는 창밖을 보았다. 포효와도 같은 힘찬 기합소리의 대상은 송림(松林)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기합소리가 약간 거슬렸지만 그곳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사내는 경계심을 늦추며 방문으로 보이는 곳을 가볍게 밀어젖혔다. 밖으로 나와서 보니 확실히 이 가옥은 중국풍 건축물이었다. 사내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크, 크하! 중국인 것 같기도 하군. 아니, 정말로 중국인가? 제기랄. 그 개자식들! 나를 중국에 버린 거라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사내는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찔러버릴 듯 살기가 가득 실린 사안(邪眼)으로 오토잭나이프를 높이 쳐들었다. 주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은도의 칼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사기를 번뜩였다. 날카로워진 주인의 눈매만큼 오색 빛깔의 오토잭나이프에도 사악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야. 단지 난 중국 땅에 폐기처분된 건가? 제길.”
사내는 갈팡질팡했다. 이곳이 중국인지, 아니면 건물만 중국풍으로 지어져 있는 한국의 야산 한 귀퉁이인지.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한쪽 방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했다. 오토잭나이프를 쥔 오른손으로 전방을 경계하며 문을 밀었다. 끼익 하는 경첩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지만 사내는 신중했다.
“전화기…… 전화기.”
주인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도자기. 대나무와 난초가 그려져 있는 어느 고인의 명화, 용필의 서체,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간간히 퍼지는 꽃향기…….
그러나 사내가 찾는 전화기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뿐만이 아니었다. 전기제품은커녕 전선 가닥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내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옥 뒤쪽으로 돌아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사람 하나 숨기 딱 좋은 거암 뒤로 몸을 움직였다.
사내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훗. 내가 스파이라도 되는지 아나보지?”
바위 뒤에서 조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던 방이 훤히 내다보였다. 사내는 사방을 경계하며 앉아 있다가 선혈에 절은 옷을 보며 뇌까렸다.
“쳇.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찝찝해 죽겠어.”
그때였다.
터벅터벅
어디선가 발자국소리가 들려오자 사내는 콧등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누구지? 좋아. 이곳이 어딘지 족쳐야겠군.’
다행히 다가오는 인물은 소녀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착의였으며, 역시 고대중국풍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양쪽으로 땋아 귀밑으로 흘려 내린 두 가닥의 머리가 몸이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거렸다. 출중한 미색이었으며 소녀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화향이 퍼지는 듯했다.
그러나 사내는 소녀의 미색에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중요한 건 신변의 안전이었다. 소녀는 거암을 돌아 그가 누워 있던 가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열 걸음…… 다섯 걸음…… 됐어!’
소녀가 막 바위 앞을 스쳐 가는 찰나였다. 사내는 잽싸게 뛰쳐나와 뒤에서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상처가 난 곳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사내는 크윽 하고 신음하며 고통을 억눌렀다.
흠칫 놀란 소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눈빛이 심하게 격동했다. 사내의 손길이 워낙 거친데다가 자신의 뺨에 닿은 오토잭나이프의 감촉이 너무도 섬뜩했다.
“잘 들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 고운 뺨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길 것이다.”
진심이었다. 사내는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천천히 비껴냈다. 그리고 소녀의 뺨에 오토잭나이프의 칼날을 들이댄 채 앞으로 돌아 나왔다. 잠시 흔들리던 소녀의 눈동자가 사내를 직시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중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고, 또 나를 데리고 온 너희들이 누구인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피를 보게 해주겠어. 그리고 만에 하나 소리라도 지르면 죽을 줄 알아라.”
사내는 섬뜩한 육성으로 뇌까리며 눈에서 살기를 가득 뿜어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정말로 이년의 뺨을 그어버리리라. 사내는 거침이 없었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邪魔人(사마인)…….”
“쳇, 또 중국어군. 그럼 이 말은 알아듣겠지? Who are you? Why captivity me?(왜 나를 감금했지?)”
“邪魔人.”
다시 흘러나온 대답 역시 중국어였다. 사내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강렬해 보이는 눈빛인데 신경질적으로 변하자 사마의 기운이 폭사되는 듯 섬뜩했다.
“제기랄. 여기는 정말 중국인가?”
“邪魔人.”
“뭐? 알아듣게 말해!”
사내는 참지 못하고 마침내 폭발했다.
철컥
사내는 오토잭나이프의 칼날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소녀의 등을 떼밀며 앞으로 가라는 몸짓을 취했다. 소녀를 돌려보낸 뒤 곧장 산을 타고 내려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등을 떠밀린 소녀가 갑자기 휙 뒤돌아서더니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게 아닌가!
“왜? 훗, 곱게 보내줄 때 가라.”
사내는 연신 코웃음을 쳐댔다.
“뭐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눈에 비치는 현란한 움직임! 사내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는 단지 양팔을 휘저으며 원을 그릴 뿐이었다. 그런데 전신을 꽁꽁 옭아매는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소녀는 그렇게 양손으로 원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마치 비호같았다. 원을 그리던 소녀의 쌍장(雙掌)이 사내의 가슴팍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쉬이익
아찔한 순간이었다. 연약해 보이는 소녀의 가냘픈 손이 활짝 펼쳐진 채 사내의 가슴을 스쳐 갔다. 사내는 어렵사리 소녀의 손을 피한 후 휘청거렸다. 놀라운 반사 신경이었다.
사내는 힐끗 자신의 상반신을 훑어보았다. 피에 절은 하얀 점퍼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나마 이태리제 까만 쫄티가 찢어지지 않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내는 소녀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살짝 씰룩였다.
“뭔가를 믿는 구석이 있었군. 무술인가?”
“邪魔人.”
소녀가 여전히 중국어로 뭐라고 뇌까렸다. 사내는 즉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계집이라고 내가 너무 얕잡아봤나? 역시 경험이란 소중한 것이지. 후후.’
사내는 양 무릎을 깊숙이 구부렸다. 도약할 자세를 취한 채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오토잭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죽여 버리겠어.”
저 강렬한 눈빛, 사악한 기운, 여느 때와 똑같은 태양인데 온통 살기로 자욱한 햇빛!
“꺄아아악!”
소녀는 사내의 눈에서 폭사되는 섬뜩한 혈기에 움찔하더니 비명을 토해버렸다. 강맹한 기운으로 쌍장을 내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겁에 질린 연약한 소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쳇!”
사내는 입 안에 응어리진 마른침을 퉤 뱉었다. 소녀가 빽 소리를 쳐버린 이상 누군가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사내는 생각할 것도 없이 산을 타고 도망치려 했다. 막 몸을 돌려 산 밑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훼엑
난데없이 뭔가 시퍼런 것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눈부신 청포(靑布). 송림의 기상을 한껏 과시하는 청솔 무늬!
사내는 반사적으로 오토잭나이프를 내지르며 왼손으로 허리춤에 꽂힌 SIG P―305를 꺼내려 했다.
“꺽!”
그러나 명치어림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또다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문주님, 이번 일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잘못했다간 소문주님이 큰 화를 당하실 뻔했습니다. 마침 제가 근처에 있었기에망정이지.”
푸르른 소나무 한 그루가 멋들어지게 그려진 청포를 걸친 자였다. 부용검파의 이장로 송해이검(松海二劍) 장연이 붉게 노한 얼굴로 문주 부용지에게 따지듯 말했다.
부용지는 이십여 년 전 혈수장(血水杖) 양염공이 발광했을 때 이후로 이토록 성난 이장로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는 곤히 잠든 딸과 이장로를 번갈아보다 태사의에 앉았다.
“저 사마인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습니다. 문주께서는 잊으셨습니까? 이십 년 전 혈수장의 일을…….”
일장로 뇌뇌오까지 이장로를 거들고 나서자 부용지는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굳이 저 외인을 도와야 하는 까닭은 없으나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그 외인의 눈빛! 그 눈빛이 너무나 닮았다. 십여 년 전에 죽은 아들과…….
“문주님!”
“어허, 왜들 그러시오. 그럼 이렇게 하오. 저자의 상처가 완치되면 그때 하산시키지요.”
“저 사마인은 소문주님을 해치려한 자입니다.”
“나도 아오. 하지만 해치지는 않았잖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장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토록 소문주를 애지중지하던 문주가 이렇게 나오다니.
‘크흐!’
그는 문득 십여 년 전에 죽어버린 제일소문주가 떠올랐다. 주화입마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광자(狂者)가 아닌 온전하고 당당한 소문주로서 죽었더라면!
문주 부용지는 죽은 자식 생각이 났는지 약간 성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눈에 힘을 줬다.
“더 이상 말하기 싫소. 이만 나가보시오. 모두!”
“……모두 나갑시다.”
일장로는 이장로를 비롯하여 정좌하고 있던 십이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문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문주의 고집 탓에 모두들 찜찜한 표정으로 내실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간 방 안엔 곤히 잠든 소문주의 숨소리만이 간간했다.
소문주 부용설리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이각 후였다. 어느덧 창밖의 천지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파르르 눈을 깜빡이던 부용설리는 자신을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
“그래, 정신이 좀 드느냐.”
“예…… 그런데 그 사마인은?”
“뇌옥에 가둬놓았다.”
부용설리는 얼핏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괴인이 자신의 쌍장을 어렵사리 피한 후 신형을 추슬렀다. 그때 그 눈빛!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
태어나면서부터 무공을 접한 부용설리로서는 왜 자신이 일순간 그 눈빛에 제압당해 소리를 지르고 정신마저 잃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몹시 자존심 상하고 치욕스러웠다.
“그 눈빛…… 잊을 수가 없어요. 정말 사마인이 틀림없어요. 눈빛에 사기가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뭘요?”
부용설리는 분홍빛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 괴인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다. 이 아비 생각으로는…….”
“그런 사마인은 당연히 황산파로 보내야죠!”
“황산파라…….”
구파일방에 속하지는 않아도 이곳 황산의 제일문파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황산파에 보낸다는 것은 정파맹의 뇌옥에 처넣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용검파에서 황산파로, 다시 황산파에서 정파맹으로 압송된 사마인의 최후는 결국 죽음뿐일 것이다. 사마인은 죽어야만 한다.
부용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어서 그자를 황산파로 보내요.”
“그래…….”
부용지의 목소리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한 일문의 수장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죽어버린 아들을 회상하는 연약한 아비에 불과했다.
“그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황산파로 보내자꾸나. 어차피 암 노인이 치료를 거의 마쳤으니 몇 시진 후면 몸을 추스를 수 있을 게다.”
몇 년을 묵힌 것인지 썩은 내가 풀풀 나는 짚더미와 감옥 안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횃불.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이 숨 막힐 듯한 적막.
“훗.”
사내의 콧등이 달싹거리며 왼쪽 입술이 살짝 치켜져 올라갔다.
“또군. 또 잡혔어. 이 백호영이 또 잡혀버렸어.”
스스로를 백호영이라 칭한 사내는 감옥 내부의 정경을 바라보며 기가 막혔다. 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목재로 만들어진 감옥에 기름횃불이라니!
백호영은 콧방귀와 함께 비웃듯 연신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곧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썩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짚 속을 미친 듯이 뒤적이는가 하면,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헤집어대는 꼴이 몹시 불안정해보였다.
“은도! 내 은도! 내 은도 어디 갔어!”
그의 폭발한 외침은 광인의 고함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제기랄! 이놈들 다 죽여 버리겠어!”
눈동자에 광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에게 있어서 오토잭나이프는 자신감이며 자아이며 분신이다. 은도를 잃어버린다 함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광적인 집착이었다.
“진정하자.”
백호영은 스스로에게 한마디 툭 던지며 끓어오르는 가슴팍을 쿵쿵 두들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지인이 죽었을 때의 분노보다 몇 갑절 극한 감정이 치솟았다.
퀴퀴한 냄새가 사방을 잠식한 살풍경한 감옥. 보이는 것이라곤 멀리서 어른 거리는 횃불뿐.
“진정하자, 진정…… 놈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군.”
백호영은 중얼거리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본래 그의 호주머니엔 면도칼과 라이터가 들어 있었으나 지금은 라이터뿐이었다. 면도칼은 어디선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기로 쓰일 만한 것은 놈들이 가져간 모양이다.
“훗. 병신 같은 놈들! 가져가려면 이걸 가져갔어야지.”
백호영은 살기가 가득 내려앉은 눈웃음을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댔다. 이 서늘한 느낌! 둔탁하면서도 미끈한 손잡이. 번뜩이는 금빛 총구와 유혹적인 곡선을 자랑하는 방아쇠. SIG P―305!
백호영은 38구경 권총을 바라보며 한동안 눈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탄창엔 이미 열 발의 총알이 가득 차 있는 상태. 점퍼 안주머니에 든 팔십여 발의 총탄도 듬직했다.
백호영은 어느 순간 돌연 웃음을 멈추고 자신을 가둔 감옥의 거목들을 매만졌다. 굵기가 성인남자 두세 명을 합쳐놓은 정도니 웬만한 강철보다 강하리라.
그러나 백호영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뭔가를 주시했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놈들이라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감옥 문을 꼭꼭 조인 쇳덩어리 같은 자물쇠에 기가 막혀버렸다. 구식 중에 구식. 아니, 구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원시적인 자물쇠.
백호영은 총구를 자물쇠에 겨누었다. 빵 하고 쏘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터져나가리라.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SIG P―305를 다시 허리춤에 끼워 넣고는 벽에 기대앉았다.
‘총소리가 나면 떼거리로 몰려들 거야. 이 좁은 곳에서……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결국은 다시 붙잡히고 말 거야. 소리가 안 나야 해. 소리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