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쾅
갑자기 지하뇌옥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백호영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산발한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번쩍이는 그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야생고양이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내 은도를 찾겠어. 공범자는 다 죽여 버리겠어!’
백호영은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넘실거리는 횃불 밑으로 희미하게 그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 손에 음식으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었다.
그자 역시 고대중국풍 복장이었으나 청색이 아닌 백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위협이라도 하려는지 허리어림에 사람 다리만한 대도(大刀)를 차고 있었다.
그자가 감옥 안으로 슬며시 음식을 밀어 넣었다. 백호영을 한 번 힐금 쳐다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도망치듯 달아나버린다.
“이것도 음식이라고……! 내가 개냐?”
빠악
백호영은 개밥처럼 보이는 음식에 심한 불쾌감을 느끼고 대뜸 사기그릇을 걷어차 버렸다. 벽에 부딪친 사기그릇이 요란한 음향을 흘리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조각조각 깨져버린 그릇…….
‘맞다! 총소리가 안 나게 할 수 있지.’
백호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반색했다.
부용설리. 내 이름입니다. 한겨울에 태어났다고 해서 할아버님이 그렇게 지어주셨지요.
나는 부용검파의 소문주로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습니다. 그동안 황산 밑으로 몇 번 나가본 적이 있어 사마를 품은 자의 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그자를 본 것은 아버지와 함께 선조의 묘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괴상한 옷차림의 그자는 피를 잔뜩 흘린 채 소나무 숲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으나, 나는 그자가 사마인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다가설 수가 없었습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자였습니다.
아버지가 다가서자 그자는 단검으로 보이는 것을 겨눴습니다. 나는 흠칫했습니다.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자의 눈빛! 그것은 분명 사마인의 것이었습니다.
그자에겐 두려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국의 언어로 몇 마디 중얼거리다가 곧바로 아버지를 향해 단검을 뻗었습니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은 하류의 무위였습니다.
그자는 두부(頭部)의 백회혈을 제압당해 곧바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버지가 그자를 등에 업었습니다.
나는 그자가 제압당하기 전에 그자의 눈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려 조금 가리기는 했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눈은 왠지…… 아버지를 닮아 있었습니다. 차마 사마인의 눈이 아버지의 눈을 닮았다 함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나는 부정하며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그자가 잠들어 있는 객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막 바위 모퉁이를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덮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자의 전신에 충만한 사기가 얼핏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독이며 그자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로.
나는 가볍게 답변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마인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살짝 눈길을 돌려 그자가 들이댄 단검을 보았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단검의 칼날. 오색 빛깔이 번쩍거리며 투명한 칼날. 그 신비한 물건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자가 내 등을 떠밀며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자의 뜻대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사마인이라는 생각에 송해장(松海掌)을 출수했습니다.
그자는 나의 장을 겨우 피했습니다. 나는 다시 그자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자는 야묘(살짝 미소하는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아, 그 사악한 기운!
그자는 무공를 모르는 하류잡배였습니다. 아니, 무공을 배웠다 해도 고작 삼류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자의 눈빛만큼은 식인고양이처럼 강렬하고 끔찍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매의 발톱으로 변해 나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이었습니다.
혈풍의 주역이라는 염라부검의 살기가 그럴까요?
이백을 죽였다는 철퇴사왕이 그럴까요?
혈마교 교주라는 혈천검마이 그럴까요?
인성(人性)을 버렸다는 독비옹이 저럴까요?
나는 무의식중에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얼핏 이장로님의 청포자락이 보이는 순간 내 몸은 땅바닥으로 쓰러져갔습니다.
第2章 사마의 씨를 말리리라!
원형의 강철. 사람을 간단히 죽일 수도 있는 매혹적인 것. 손톱만한 크기의 것이 위력은 태산만 하다.
백호영은 SIG P―305의 총탄을 만지작거렸다. 흠뻑 기름칠이 가해진 듯 보는 것만으로도 매끄럽고 위협적인 총탄의 번뜩임. 그의 사이한 눈빛이 작은 총탄의 외형에 맺혔다.
“시작하지.”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곁에서 누군가 들었다면 소름이 쫙 돋았을 것이다.
백호영은 권총을 허리춤에 빼기 좋게 끼워 넣고는 바닥에 엎드렸다. 퀴퀴하게 썩어가는 짚이 배 밑에 뭉겨졌다.
“으아아!”
짚 위에 누워 있던 백호영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일다경 정도 지학뇌옥 안에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멀리서 철컹거리며 지하뇌옥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호영은 신음 소리를 더욱 크게 지르며 발광을 해댔다.
“으아아아!”
누군가 감옥 가까이 다가왔다. 오전에 음식을 가져다준 자였다. 굵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고, 사람 다리만한 대도가 허리어림에서 덜렁거렸다. 그자는 감옥 문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곤 괴인을 훑어보았다.
‘저자 역시 중국인인가?’
자꾸만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는데 백호영으로선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답할 말이라곤 오직 신음 소리뿐이었다.
“Help me, I‘m sick.”
제아무리 무지몽매한 자라도 영어는 알아듣겠지. 이런 생각으로 신음과 함께 몇 마디 내뱉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자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괴인이 배를 움켜쥔 채 끙끙대자 조금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자는 허리어림에서 꺼낸 대도를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론 열쇠고리를 뒤적거려 자물통에 꽂았다.
철컥
마침내 원시적인 자물쇠가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풀려나갔다. 거목으로 만들어진 감옥 문이 그자의 투박한 손에 의해 서서히 열려졌다. 그자는 여전히 중국어로 뭐라고 지껄이며 괴인에게 다가갔다. 손에 쥔 대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는 점을 경고하듯 바짝 곧추세워진 채 금방이라도 내려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은도를 되찾아야 해!’
백호영은 다시 한 번 전의를 불사르며 그의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이윽고 중국인 간수가 코앞에 당도하자 투박할 정도로 커다란 그자의 손이 한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성인 남자 팔목만한 대도의 손잡이를 잡기에 별 무리가 없어보였다.
그자는 여전히 중국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며 죽을 시늉을 다하는 괴인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서였을까? 무릎을 구부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다!’
“날 가둔 놈들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백호영의 몸이 승천룡(昇天龍)의 기세로 중국인을 덮쳐들었다. 그의 눈과 손은 온통 음침한 마기(魔氣)로 휘감겨 있었으며 더욱이 그의 오른손엔 어느새 SIG P―305마저 들려 있었다.
백호영은 짧은 순간 생각했다.
‘껴안듯 덮쳐들어 복부에 최대한 밀착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밖에까지 들릴 정도의 소리는 나지 않겠지?’
그러나 그의 생각은 중국인의 놀라운 반사신경에 의해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었다.
승천룡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덤빈 백호영이었으나 중국인은 그의 비호 같은 운동신경을 철저히 무시해버렸다. 달려들기가 무섭게 한쪽 구석에 메다꽂고는 쓰러진 그를 멀찍이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백호영은 순식간에 벌어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쓰러진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덤벼든 사람은 나인데 쓰러진 것 또한 나라니!
“邪魔人!”
중국인은 잔뜩 골이 난 표정이었다. 덥수룩한 턱수염을 부들부들 떨어대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꼭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같았다. 그자는 거대한 대도의 칼날을 곧장 백호영의 안면으로 내려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시 보니 백정 같았다.
그런데 무엇이 꺼려지는 것일까. 그자는 끝내 대도를 휘두르지 않고 눈앞의 괴인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다. 흠칫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백호영은 겁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SIG P―305의 총구가 중국인의 심장에 겨누어져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그랬다간 네 인생 조지는 거다.”
백호영은 살짝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데 불현듯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자는 권총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 아냐? 아니면 마약을 잔뜩 처먹고 취했든지!’
백호영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죽일 놈은 죽일 수밖에!
중국인의 대도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였으나 그자는 마치 백호영을 혐오스러운 동물을 쳐다보듯했다. 그자의 눈동자가 백호영의 전신을 훑으며 데구르르 굴렀다.
“훗.”
백호영은 콧소리와 함께 슬며시 조소했다. 극한 사기가 두 눈 가득 어른 거렸다. 그 웃음은 정말이지 식인고양이의 것이었다. 대도를 쳐들고 있던 중국인도 그제야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움직이지 말랬지.”
분명 중국인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다. 확실히 움직인 것이다.
백호영은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빵
굉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느껴지는 스프링의 압축력과 태산북두를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한 거대한 굉음은 몹시 매혹적이었다. 백호영의 미소는 더욱 짙어만 갔다. 사악한 기운을 머금은 자의 웃음이었다.
식인야묘. 살짝 미소하는 식인고양이.
식인고양이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핏줄기를 뿜어내는 상대의 육체를 응시했다.
촤악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중국인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고꾸라져버렸다. 육중한 몸이 쿵 하며 떨어지는 소리 역시 백호영의 흥분을 더해줄 뿐이었다.
심장을 꿰뚫어버린 듯했다. 바로 앞에 쓰러진 중국인의 몸에서 선혈이 뭉텅뭉텅 솟아나왔다. 양이 엄청나 금세 강이라도 이룰 듯했다.
백호영은 슬그머니 바닥에서 일어났다. 옷에 튄 피를 대충 닦고는 중국인을 내려다보았다. 꿈틀거리며 신음하는 것을 보니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식인야묘의 표정을 짓고 있던 백호영은 총구를 다시 중국인에게 겨누었다.
‘마지막이군.’
그러나 그때였다.
“제길! 소리가 들렸어.”
백호영은 지하뇌옥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중국인을 한 번 흘겨보고는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횃불 덕분에 지하뇌옥의 통로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횃불에 밝혀진 통로를 달려 나가는 백호영은 앞을 노려보며 어떤 놈이든 눈에 띄는 족족 쏴버리리라 맘먹었다. SIG P―305의 금빛 총부리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발자국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자가 내뱉는 소리 역시 중국말이었다.
다급한 발걸음이 요란한 가운데 이윽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그는 조금 전에 총으로 쏴버린 중국인과 똑같은 복장이었다.
그자는 갑자기 앞에서 들이닥친 백호영과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둘이 대치하고 선 소로는 딱 두 사람 정도만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비좁은 장소였다.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행동을 개시한 쪽은 백호영이었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SIG P―305를 중국인의 심장에 겨누었다. 둘 사이의 격간은 십여 보 거리였다.
‘이 정도면 백발백중이지.’
백호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SIG P―305의 매혹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호영은 금세 침통해졌다.
“제길! 왜 이곳 새끼들은 모두 총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
앞에 선 중국인은 앞서 죽은 자와 달리 장검(長劍)을 치켜들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곳이 아닌가. 시대극 배우들도 아니고 죄다 대도와 장검이라니!
‘이곳 똘마니들은 꽤나 원시적이군.’
순간 중국인이 살짝 검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잠시 동안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러나 백호영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빵
“멍청한 새끼! 총 앞에서 웬 검?”
당연하다는 듯 중국인은 ‘컥!’ 하는 단말마와 함께 뒤로 날아가 버렸다. 백호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싸늘하다못해 대기와 뒤엉켜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듯한 시린 눈빛이었다.
쓰러진 중국인. 흥건히 고인 선혈. 백호영은 그것들을 뛰어넘어 앞으로 치달렸다. 지하뇌옥의 철문 틈으로 들이비치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슬며시 철문을 밀었다. 얼굴보다 총부리를 먼저 앞으로 내밀며 몸을 잔뜩 낮추었다.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지하뇌옥에서 빠져나왔다. 눈부신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다.
“소리를 듣고 곧 개떼처럼 몰려오겠지? 빨리 뜨자. 우선 그 전에 내 은도부터…….”
백호영의 눈빛이 사기로 이글거렸다. 태양의 광명에 비할 바 없는 야묘의 눈동자!
중국 마피아의 대두는 상해의 칭톈신쯔파라 들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한국 마피아 조직과 연결된 중국의 어느 소조직이란 말인가?
들개! 마피아 한국 지부의 보스인 내 아버지의 권좌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개자식! 네놈이 나를 이곳으로 유배시킨 거지? 내 그 개자식을 꼭 조각조각 찢어 갈아 마셔 버릴 것이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일까? 아버지와 내 가족들마저 모두 몰살한 인간말종이 나 같은 놈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왜?
정신없이 도망치다 어느 강가에서 쓰러졌었지. 그렇다면 놈이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발견했다면 분명 곱게 살려뒀을 리 없는데……?
아아, 모르겠다. 쓰러진 후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놈이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하필 또 중국이란 말인가?
아무튼 마피아 조직과 관련돼 있는 건 분명하다. 물론 그 점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하나만은 무섭다. 저 강렬한 태양과 초록으로 우거진 숲. 그리고 연무소리가 그칠 무렵 밀려오는 한없는 정적.
시간이 멈춰버린 것일까? 작은 미물들의 울음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적에 귀가 먼 내 자신이 무섭다. 귀머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