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사야지존
작가 : 나민채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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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작성일 : 16-11-16     조회 : 525     추천 : 0     분량 : 6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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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안광이 적색으로 불타오르는 듯하다. 충천하는 살기에 타다닥 하며 장작불이 터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백호영은 몸의 중심을 밑으로 내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귀를 몇 번 매만지다 건너편 거목 뒤로 몸을 날렸다.

 SIG P―305의 울음소리는 실상 태산이 무너지는 소리보다도 더 컸다. 수십 번을 쏴봤지만 SIG P―305의 굉음은 역시 음마(音魔), 귓바퀴를 짜르르 울리며 고막을 후벼 파는 음마!

 “너무 조용해.”

 주위의 정적 탓인지 귓속에서 맴도는 SIG P―305의 여운이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백호영은 피식 입꼬리를 놀렸다. 거목 뒤쪽의 수풀을 헤치며 조심스레 나아가다 흠칫 멈춰 섰다. 총부리를 전방으로 겨눈 채 신경이 바짝 곤두선 그는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쏴버릴 태세였다.

 다행히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자그만 토끼 새끼였다. 놈이 반대편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설사 정말로 중국 땅이라 할지라도 대체 그 넓은 대륙의 어디쯤이란 말인가. 중국이 어디 한국처럼 손바닥만하더냐. 심지어 한국의 웬만한 소도시는 가본 적도 없잖은가.

 ‘먼저 은도를 찾아야 해. 내 은도를!’

 비스듬히 경사진 숲이라 아래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백호영은 몸을 숙인 채 잠시 경황을 살폈다. 작은 가옥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역시 고대중국풍 가옥.

 ‘경제가 나날이 발전하여 고층 빌딩들도 많다더니만, 크크.’

 그는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이곳은 민속촌인 모양이군.’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인 그곳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백호영은 일단 내려가 보기로 마음먹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잡초들이 어깨까지 오는 원시림이었다.

 숲의 끝자락에 도달할 무렵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가옥 뒤편이었다. 그런데 웅성웅성하던 소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백호영은 산자락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가옥의 담벼락에 붙어 섰다. 담장 위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그의 전신에서 강한 살기가 뻗쳐올랐다. 등을 벽에 밀착시킨 채 고개만 돌렸다. 절반쯤 트인 시야에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십여 명 정도였는데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청백포(靑白布)를 걸친 채 검과 도를 그러쥐고 있었다.

 그들이 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급히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검과 도가 양광에 번뜩거렸다.

 ‘환각?’

 백호영은 눈을 비볐다.

 “뭐, 뭐지?”

 그는 분명히 보았다. 청백포를 걸친 사람들이 달리는 속도가 갑자기 배가되었다는 것! 쉬쉬쉭 하고 거센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숲 속으로 들어가더니 곧 시야에서 벗어났다.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급하게 산을 오르는 그들은 분명 총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것이리라.

 놈들이 내려오기 전에 은도를 찾아야 한다. 백호영은 입술을 깨물며 SIG P―305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눈에 익숙한 것들. 거암과 널찍한 창!

 그렇다면 저곳은 맨 처음에 자신이 혼절한 채 누워 있었던 곳이다. 백호영은 웃었다. 사이한 웃음이 심상치가 않았다. 사악한 음기가 그의 뒷덜미에서 아지랑이처럼 어른 거렸다.

 백호영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내달렸다.

 타타탁

 자신이 이전에 눕혀 있었던 방의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투박한 나무창 틈으로 보이는 방 안엔 놀랍게도 사람이 들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백호영은 긴장하였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순간 소리를 지르며 권총을 난사할 뻔한 충격을 받았다. 욕지거리를 뇌락(牢落)처럼 질러버리고 싶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인질로 잡았다가 우습게도 도리어 공격을 당하고 만 바로 그 소녀였다.

 그런데 뛰어난 미색을 지닌 그 가냘픈 여자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물건은 왠지 조금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백호영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은도! 분명 저년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내 은도다!’

 백호영은 조심조심 가옥을 돌아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밀쳤다. 소녀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오토잭나이프의 손잡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녀가 은도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챙

 순간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오색 빛깔의 다이아몬드 코팅 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멋!”

 소녀가 기겁하며 은도를 떨어뜨렸다. 백호영은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백호영의 눈과 소녀의 눈이 한순간 짧게 마주쳤다. 오토잭나이프를 향한 열망만이 가득 들어찬 백호영의 눈은 광기 그 자체라 소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소녀의 왼손엔 어느새 기다란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웬만한 성인남자의 팔뚝만큼이나 굵직한 장검이었다. 백호영은 소녀가 장검을 들고 일어서려하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빵

 SIG P―305가 내지른 폭발음은 가옥을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한 기세였다. 끔찍한 굉음을 뿌리며 날아간 총알이 소녀의 오른쪽 허벅지에 박히고 말았다. 봉숭아물이 터지듯 사방으로 튀는 붉은 선혈이 소녀의 시야를 현란하게 흐트러트렸다.

 소녀는 총알을 맞았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SIG P―305가 내뿜은 굉음에 먼저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이토록 큰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것이다. 천신(天神)의 호통소리가 이럴까!

 소녀는 허벅다리에서 철철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후 정신이 약간 돌아오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흑!”

 ‘내가 사마인의 암기에 당했구나!’

 비록 일문의 소문주라 해도 아직은 나이어린 소녀인지라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제길. 참지 못하고 또 쏴버리고 말았군.”

 백호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이미 그의 손엔 오토잭나이프가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또다시 총을 쏴버린 덕분에 곧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럼에도 은도가 다시 자신의 수중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백호영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히죽거리는 그를 바라보는 부용설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미친 사람마냥 산발한 금빛 머리카락을 콧등까지 늘어뜨린 사마인! 말로만 듣던 북해빙궁의 사람들도 입지 않을 것 이라고 확신할, 부푼 설인(雪人)의 거대한 의복인 사마인! 희괴하고 민망스러운 청색 하의에 왼손엔 기이한 단검!

 아직 강호 경험이 많지 않은 소녀로서는 백호영의 외모와 그 웃음은 광자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공이라면 어렸을 적부터 배워 초입 단계엔 들 정도였지만, 부용설리는 왠지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웬 괴음이냐!”

 그렇잖아도 소문주 부용설리가 갑자기 사마인의 단검을 들고 사라져버려 정신이 어지러울 때 굉음까지 들리다니!

 그 소리는 분명 송소산의 지하뇌옥 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곳은 사마인이 갇혀 있는 곳!

 부용검파의 십이제자 중 이제자 심전영은 소리가 들려온 송소산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송소산에서 이곳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이토록 강렬하고 선명하게 들리는 괴음이라니!

 심전영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송로로 뛰어오르는 그의 눈엔 불안한 빛이 어른 거렸다. 지하뇌옥 입구에 거의 도달했을 때 반대편에서 누군가 솟구쳐 올랐다. 칠제자 진진명이었다.

 흡사 사인(邪人)의 인상을 가진 그였다. 귀 쪽으로 길게째져 올라간 눈초리와 거친 피부, 날카로운 콧날에 뾰족한 턱 선까지. 진진명은 언제나 외모에 대해 논할 때면 기를 펴지 못했다.

 “사형!”

 그가 심전영을 향해 외쳤다.

 “아, 사제도 방금 그 소리를 듣고 올라온 것인가?”

 “예, 어서 들어가 봅시다.”

 “그래.”

 심전영은 지하뇌옥의 철문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철문. 둘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왠지 불안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철문을 벌컥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들은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향(香)! 익숙한 향!’

 심전영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이십여 년 전에도 그는 부용검파 내에서 촉망받는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당시는 초년의 나이로 현재 소문주 부용설리 정도의 연배였다.

 안휘성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혈수장이 황산파의 추격을 받다 부용검파로 들어선 일이 있었다. 문주 송해일검, 장로 송해이검, 송해삼검, 일제자 뇌각조, 암 노인 그리고 심전영. 이렇게 다섯이서 전력을 다해야 명을 움켜쥘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심전영의 칼에 목이 잘려나간 혈수장. 머리가 공중으로 붕 떠서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에서 엄청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비록 혈수장의 사부는 삼대문파의 추격을 받다가 흑혈강에서 실종되었지만 그곳에서 살아나온 자는 전무후무했다.

 혈수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 과거의 심전영과 지금 심전영의 표정이 똑같았다.

 ‘향! 엄청난 혈향!’

 그는 초년의 나이 때 맡아보았던 짙은 혈향이 떠올라 심장이 터들듯 두근거렸다.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다.

 “사제, 서두르게!”

 “예, 사형!”

 이제자 심전영과 칠제자 진진명의 나이 차는 이십여 세다. 흡사 부자지간의 모습을 보는 듯한 그들은 내남없이 긴장했다.

 텅텅텅

 두 사내의 발자국소리가 지하뇌옥에 육중하게 울려 퍼졌다.

 칙칙한 음영에 어른 거리는 시야. 누군가 쓰러져 있다! 심전영과 진진명은 눈앞에 서서히 드러나는 광경에 침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혈향이 짙어질 수록 그들의 추측은 점점 분명해져갔다.

 시야가 차츰 확보되었다. 안력이 어둠을 꿰뚫어가면서 쓰러진 사람의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감옥 안은 혈강이었다. 쓰러진 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약간의 경사면을 따라 보이지 않는 구석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토록 출혈은 심했다.

 “헉!”

 심전영은 재빨리 쓰러진 자의 신원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자의 몸을 돌려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천 년빙설의 분신이라 해도 믿을 만한 표정!

 칠제자 진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심전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혼란이란 혼란은 다 겪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어갔다.

 제일(第一), 혼란.

 제이(第二), 천재(天災)를 직면한 표정.

 제삼(第三), 아수라와 아귀를 직면한 모습.

 그러나 혼란과 공포가 교차하던 표정도 잠시, 심전영은 곧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진진명은 소름이 쫙 돋았다. 일찍이 사형이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심전영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으으!’ 하는 침음성만 흘릴 뿐이다.

 “사제! 사제!”

 심전영이 쓰러진 자의 몸을 붙들고 부르짖었다. 진진명은 순간 흠칫했다.

 ‘사제라니? 설마……!’

 그는 심전영이 가린 시야를 벗어나 쓰러진 자의 안면을 확인하였다. 순간 그의 표정 역시 심전영과 비슷해졌다.

 “사형!”

 바닥에 쓰러진 자는 십이제자 중 육제자 진초룡이었다. 진진명 자신의 바로 윗배인 그는 평소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었다. 핏줄로 이어졌다 해도 그보다 더했을까! 진초룡은 한없이 자애롭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진진명은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연신은 눈을 비벼댔다.

 “사형! 사형!”

 그는 진초룡의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사형!”

 “사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떠나버린 자는 속세와의 인연도 끝나는 법이다. 진초룡의 몸은 싸늘했다. 선혈이 덕지덕지 굳어버려 몰골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심전영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제, 그만 일어나게.”

 그러나 진진명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광인 같았다. 심전영이 두 눈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그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철썩

 “크윽!”

 진진명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사제, 진정하게. 이래선 안 되는 것이야.”

 “사형…….”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지 진진명의 음성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 가슴속은 극도의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친형 같았던 진초룡 사형!

 “자, 진정…….”

 사제를 달래는 심전영이었으나 그 역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장박동소리가 지하뇌옥을 들썩이는 듯했다. 심장이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사제는 여기서 진초룡 사제를…….”

 심전영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지하뇌옥 깊숙이 들어갔다. 짙은 암흑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보였다.

 “사형.”

 진진명은 시신을 향해 힘없이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호탕하게 웃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뚜벅뚜벅 사라져가는 심전영의 발자국소리만 들릴 뿐이다.

 진진명의 눈에서 복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뜨거웠다.

 심전영은 어느새 사마인을 가두어 두었던 감옥 앞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초룡과 마찬가지로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싸늘한 시신.

 지하뇌옥을 지키던 수하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의 신분에 비할 자가 아닌지라 그리 두터운 친분을 쌓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소중한 사문(師門)의 식솔이 아닌가.

 심전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간수의 눈을 감겨주었다.

 “사마인! 네놈을 가만두면 내 사람이 아니다!”

 얼음처럼 차갑게 짓눌러놓은 내면의 광기가 불쑥 튀어나왔다. 뜨겁다 못해 열화 같았다.

 멀리서 진초룡의 시신을 붙든 채 울고 있던 진진명도 사형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화룡(火龍)이 내뿜는 뜨거운 입김처럼 울울하게 여울지며 퍼지는 고함소리.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언제나 차분하기만 하던 사형.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진진명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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