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냥 갈 것인가? 아니면 인질을 만들 것인가?’
백호영은 피를 흘리고 있는 부용설리를 내려다보며 잠시 갈등했다.
이곳이 한국 조직과 연결된 중국 마피아라면 빠져나가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소녀를 찬찬히 훑어보니 비단옷을 입고 눈빛 또한 꽤 고고한 것이 이곳 보스의 딸이 아닌가 싶다.
“같이 가줘야겠어.”
백호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이미 그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
첫째,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다만 중국의 어느 지방일 것이라는 추측뿐이다.
둘째, 이곳에 득실거리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장검과 대도로 위협하며 은도까지 빼앗아갔던 자들. 분명 한국 조직과 연결된 중국 마피아일 것이다.
셋째,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고, 중국어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든 방법은 있을 것이다.
“가자.”
그는 부용설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미 정신이 가물가물해져버린 그녀는 제대로 반항조차 못하고 힘없이 이끌렸다. 그녀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힘을 쓰지 못하자 백호영은 손을 놓았다.
‘제길. 아까 그 이상한 놈들이 오기 전에 어서 가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려가는 것도 위험하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년을 인질로 잡아가야 한다. 그리고 어디서든 자동차를 훔쳐 타야 한다. 도심으로 가면 그때부터는 영어가 통할 것이다. 우선 북경으로 가자. 그곳 한국대사관에 가서 내 신원을 밝히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부용설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중국에 버린 놈들! 이 몸이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모두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내 아버지가 이룩한 모든 것을 빼앗아간 들개!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어. 날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크크크.”
의미심장한 괴소였다.
설부(雪膚)에 백치(白齒). 눈처럼 한없이 깨끗한 피부와 치아.
그러나 부용설리의 눈빛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몸조차 부들부들 떨어대니 안쓰럽기도 하련만, 백호영은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싸늘한 안광. 그리고 폭사하는 살기!’
소녀는 정말이지 그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리면 마음은 편하겠으나 그래도 고통을 참아낼 수밖에 없다. 고통은 심했다. 무언가 살을 꿰뚫고 들어와 연골을 파고드는 극통!
부용설리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체할 수 없다. 어서 가자.”
백호영이 다시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신음 소리에 미칠 지경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그 괴상한 놈들과 마주칠 것이다.
오토잭나이프와 SIG P―305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소했다. 어쩌면 그자들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서둘러야지. 가자니까.”
음향(蔭香)이 짙게 배인 어투에 부용설리의 몸은 점점 더 떨렸다. 그녀는 일찍이 사마인이라는 자들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이자는 극악한 사마 그 자체야. 아버지!’
소녀의 눈물에 약해질 법도 한데 백호영은 막무가내였다. 손목을 세차게 잡아당기자 총알에 뚫린 그녀의 허벅지가 짓뭉개졌다. 부용설리는 극통에 또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꺄아악!”
“제기랄, 닥쳐!”
백호영은 그녀의 뺨을 내리치려다 그만두었다.
‘생긴 게 반반해서 봐준다.’
어색해진 손을 내리며 곧장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가슴에 안긴 그녀의 목에 오토잭나이프를 들이대며 뇌까렸다.
“닥치라고! 네년이 여자라고 봐주진 않아.”
칼날이 번뜩이며 음험한 살기를 흘렸다. 부용설리는 이 사마인의 말뜻을 대충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 소리를 삼켰다.
‘마인들은 절대 악이라더니! 아버지, 구해주세요.’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뺨을 매만졌다. 정말이지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사마인의 은도가 자신의 눈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백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계집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가슴어림에 묻었다. 왠지 가슴에 온기가 퍼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싸늘해졌다.
‘안전한 곳에서 이 계집을 버려야겠어. 지금은 인질일 뿐이야.’
그는 부용설리를 안은 채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직까지는 사람들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조용했다. 두리번거리며 도망칠 곳을 찾았다.
‘산을 타자.’
계집을 안은 채 내리막길을 탈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곧장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풋풋한 소나무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인적이 드문 곳인지 제멋대로 자라난 풀잎들이 발걸음을 귀찮게 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백호영은 급히 서두르며 잡초들을 짓밟았다.
부용설리는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과다출혈로 지금까지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했다. 그녀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내력을 끌어올리자 정신이 약간은 맑아지는 듯했다.
‘어떻게든 이 사마인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송해장으로 사마인의 안면을 그대로 내려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자의 살기 어린 눈과 마주치자 도저히 장을 펼칠 수가 없었다. 부용설리는 도망치고 싶었다.
“살려주세요.”
백호영은 계집이 뭐라고 지껄이자 신경질적으로 잡초들을 짓밟으며 노려보았다.
“조용히 하라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떼놈말 따위는 듣기 싫어!”
그가 뺨을 갈길 듯한 시늉을 하자 부용설리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서럽고 무서웠다. 뜨뜻한 눈물이 뺨을 흘러내렸다.
이 사마인은 경공을 익히지 않은 듯했다. 잡부들처럼 둔탁한 발걸음에 숨넘어갈 듯 헉헉대는 체력. 금방이라도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먹을 듯한 눈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암기만 잘 다룰 줄 아는 모양이지? 그럼…….’
그녀의 양손이 출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사마인에게 바짝 안겨 있기에 이처럼 좋은 기회도 없었다.
송해장은 부용검파의 유일한 장법이다. 소나무의 절기를 담아 조사인 송해검장 부용천양이 창시하였다. 부용검파는 검문으로 유명할 뿐이지 장법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편이었다. 송해검법만이 안휘성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을 뿐이다.
무학으로서도 송해장은 그리 좋은 장법이 아니다. 음과 양의 조화나 내력의 운기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그런 송해장일지라도, 갓 열아홉 살의 연약한 여자가 펼치는 송해장일지라도, 십 년의 내력으로 정확하게 타격만 한다면 이류무사 정도는 충분히 혼절시킬 수 있으리라!
부용설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천천히 쌍장을 펼쳤다. 그때였다.
‘헉!’
백호영과 눈이 마주쳤다. 부용설리는 찔끔하며 급히 양손을 내렸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양쪽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차마 백호영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온몸이 쩍 얼어붙어버렸다.
폭출하는 사기와 마기! 사마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핏 환각까지 보였다. 끈적끈적한 선혈이 흘러내리는 송곳니를 드러낸 채 정신없이 육신을 뜯어먹는 식인고양이! 그녀는 일순 오금이 저렸다.
백호영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산을 내려가니 힘든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계집을 안고 있으니 속도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고, 억센 잡초들까지 거치적거려 금세 힘이 빠져버렸다.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한 번씩 들썩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금발이 시야를 가렸다. 앞머리를 뒤로 젖히자 짙은 용미와 오뚝한 콧날,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드러났다. 눈은 광적으로 충혈되어 살쾡이 같았다.
‘뭐지?’
백호영은 멀리서 들리는 외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차 하는 생각으로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계집에게서 흘러나온 선혈이 지금까지 내려온 산길을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닌가!
철썩
일순 부아가 치밀어 그녀의 뺨을 갈겨버렸다.
“제기랄!”
계속해서 산을 탔지만 끝은 보이지 않고, 내려오기 전에 보았던 십여 명의 재빠른 중국인들이 시시각각 뒤쫓고 있는 상황. 꼼짝없이 붙잡혀 개죽음을 당할 판국이었다.
산 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백호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길을 재촉했다.
부용설리는 두려움과 희망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이중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와 장로들 그리고 십이제자가 곧 구해주리라. 그러나 더 이상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허벅지를 관통한 암기. 극심한 고통! 그녀는 끝내 정신을 놓아버렸다.
백호영은 불안한 눈길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자들의 발자국소리가 한층 더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다. 마침내 숲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거목을 에돌아 막 숲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이, 이게 뭐야!”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눈앞은 떨어지면 뼈도 못 추스를 것 같은 캄캄 절벽이었다. 맞은편 숲까지는 수백 보가 넘는 거리였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다. 절벽 밑으로 흐르는 새까만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어질어질 해졌다.
“여기서 죽는 건가? 두 번 죽을 순 없지. 중국 마피아 놈들! 들개 그 개자식을 죽이기 전엔 절대 먼저 죽지 않아.”
빵
SIG P―305를 숲 쪽을 향해 격발했다. 거대한 총소리가 산을 울렸다.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퍼덕거리며 숲을 뒤흔들었다. 산을 타내려오던 중국인들도 일순간 숨을 죽인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의 움직임이 다시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나타났다!’
예상했던 대로 그가 내려온 방향으로 뒤따라온 자들이었다. 십여 명의 청백포를 걸친 자들과 팔 척 장신의 중년인.
“다가오지 마. 흐으!”
괴소를 흘리며 부용설리의 목에 오토잭나이프의 칼날을 들이댔다. 그대로 덮쳐들 것 같던 중국인들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갑자기 중년인이 고함을 쳤다. 천둥소리 같았다. 산야를 쩌렁쩌렁 울렸다. 백호영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네놈들이 우리 가족과 삼촌 가족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이까짓것은 일도 아냐. 아니지, 네놈들이 아니지. 어차피 네놈들은 그 개자식들과 공범일 테니까! 더 이상 다가오면 전부 죽는 거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살기를 극한으로 머금은 얼굴. 금방이라도 광자로 돌변할 것만 같았다. SIG P―305를 중국인들 쪽으로 겨누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귀(邪鬼) 같았다.
“제기랄! 이런 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어! 다 죽여 버릴 거야!”
살기 돋친 고함소리에 중국인들은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각각의 손에 들린 병기 역시나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크하하하! 크하하하!”
드디어 미쳐버렸는가. 백호영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그야말로 미친놈 행색이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바로 중년인의 장검이었다. 그곳에서 은은한 청기(靑氣)가 감돌고 있었다.
백호영이 왼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애들 장난감 칼까지 들고 왔군. 떼놈들이란!”
콧방귀를 뀌며 슬쩍 뒤쪽을 쳐다보았다. 높이조차 추정할 수 없는 캄캄 절벽. 그러나 흐르는 강물에 뛰어든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으리라. 이대로 중국 마피아에게 붙잡힌다면 그것처럼 멍청한 짓도 없지. 입가에 슬그머니 냉소를 그렸다.
불안하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느꼈다. 그때였다.
빠앙
SIG P―305에서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천번지복할 굉음과 함께 화약 냄새가 자욱했다. 중국인들 가운데 하나가 가슴팍에 총알을 맞고 뒤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백호영은 재빨리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품속엔 여전히 부용설리가 안긴 채였다.
“흐흐흐!”
사마인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절벽 밑으로 꺼져갈 때 십이제자 중 삼제자 역전한의 신형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솟구친 붉디붉은 선혈이 청백포를 벌겋게 적셔갔다.
“으아아아아!”
그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중국인들은 모두 광인으로 돌변했다.
부용지와 십이제자 중 살아남은 십제자는 모두 복수귀(復讐鬼)가 되어버렸다. 폭발할 것 같은 분노로 애꿎은 송림을 휘저어댔다. 그때마다 휘몰아치는 원한과 슬픔의 광풍은 뜨겁디뜨거워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들의 안광은 적색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누구에게 이 원한의 화살을 퍼붓는단 말인가! 모두들 허탈했다. 흑혈강으로 뛰어내리는 짓은 자살 행위! 사실상 달려드는 그 순간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흑혈강은 워낙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마땅히 그 끝자락엔 천 길이 넘는 시커먼 혓바닥을 드리운 폭포가 있다. 불복폭포!
이십여 년 전 혈수장의 사부 즉살마가 소림사와 무당파, 화산파 등 삼대문파의 추살령에 의해 쫓기다가 불복폭포로 떨어졌다. 일찍이 그 폭포로 떨어졌다가 살아 돌아온 자는 없었다. 즉살마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림과 무당, 화산은 신진고수들을 주기적으로 불복폭포에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수차례 반복된 행위는 비로소 오 년 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삼대문파도 인정한 것이다. 불복폭포는 한번 삼킨 자를 절대로 다시 살려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부용지는 검디검은 강물을 내려다보며 치를 떨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본가 밖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기 위해 수색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편 본가에서는 사마인의 암기에 대한 담론이 한창이었다.
수리검, 쌍비단도, 자고, 죽침, 철침, 비단검…… 모두 아니었다. 단조로운 모양으로 기울어진 원형의 철일 뿐.
암 노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마지막 시체에서 무언가를 뽑았다. 놀랍게도 살을 모두 후벼 파고 뼛속까지 깊숙이 파 들어가야 그 정체불명의 암기가 나왔다. 단순한 원형의 철일 뿐인데 이토록 깊이 박혀버리다니! 암 노인은 세구의 시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찍이 이런 암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것은 암기가 아니다! 암기가 아닌 구형의 철을 이렇게 단골까지 박아버릴 지력의 소유자가 누구란 말인가. 암기술이라면 사천성의 사천당문이 으뜸이라지만, 이 암기의 주인 앞에서는 그들도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암기가 아니오!”
암 노인이 비명처럼 내뱉었다. 정말이지 암기라고까지 할 것은 아니었다. 앞머리가 약간 뾰족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살을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그것을 던진 암기술이 월등했을 뿐이리라.
“무슨 말이오?”
이장로 송해이검이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