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가?
나는 매일같이 정파 놈들을 저주했다. 놈들이 찾는 게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내 나이 오십여 세. 그러나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늙어버렸다. 빠져나가지 못해서 갇혀 있는 게 아니다. 나 스스로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다. 극음(劇蔭)의 혈장(血掌) 광묘혈장법과 극도의 날카로움을 지닌 파육정묘검법에 심취한 탓이다. 내가 이 장법과 검법을 창안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즉살마. 나의 명호다. 이 명호를 얻는 데 공헌한 혈마교의 적마장과 악묘검법(惡猫劍法)이 광묘혈장법과 파육정묘검법의 근본이다.
고양이! 날렵하고, 매끈하고, 예리하고, 치졸하고, 세밀하고, 사악하고, 두려우며 소름 끼치는 동물. 혈마교의 악묘검과 적마장이놈의 성질과 몸짓에 근본을 두었듯 내 장법과 검법 역시 그러하다.
고양이란 참으로 신묘막측한 동물임이 틀림없다. 범인들이 영물이라며 두려워하는 이유는 놈의 소름 끼치는 안광과 움츠린듯하다가 달려드는 폭발적인 몸놀림에 있다.
나는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정파 놈들은 끊임없이 본가의 가보를 노렸다. 그래서 나는 즉살마가 되었다. 놈들이 노리는 가보를 지키기 위해, 놈들에게 붙잡힌 내 제자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나는 광묘혈장법과 파육정묘검법을 대성해야만 한다.
나는 이토록 독했다. 기필코 가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독해져야만 했다. 가보를 빼앗기 위해 본가를 마가(魔家)로 치부해버린 정파 놈들…… 크크크.
놈들이 원한 대로 본가는 마가가 되어 혈마교와 혈천교의 수발을 들었다. 가보인 검환(劍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검환은 애초 검환의 주인이었던 의검황 정검대협의 신공이 숨겨져 있는 ‘천문(天門)’의 위치를 알려주는 물건이다. 또한 주인의 의지대로 길이가 일 장 정도 되는 가느다란 세검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강호에 정검대협의 신공은 전설로만 남아 있다. 다만 전설일 뿐 믿는 자도 없었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림을 통일하고 모든 마귀와 마수를 다스렸으며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검대협. 그러나 그는 실존 인물이다.
나는 정검대협이 신공을 남겨두고 우화등선한 천문의 위치를 알려주는 검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천문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나머지 두 개의 비기(秘器)가 더 있어야 한다. 정파 놈들이 그 사실을 알고 본가를 마가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즉살마가 거처하는 가옥은 사람 혼자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튼튼했다. 벌을 키우는지 주위에 벌 떼가 윙윙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즉살마는 백호영과 부용설리를 가옥 안에 눕혀놓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크크. 제자가 돌아왔다. 제자가!”
눈에 광기가 그득했다.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던가.
십수 년 전 불복폭포 밑으로 떨어졌을 때 복사뼈를 크게 다쳐 함부로 밖에 나갈 수 없었다. 때문에 정파맹에 쫓기다가 헤어진 제자 혈수장을 찾아 나서지도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제자 혈수장 양염공이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즉살마는 솟구치는 환희를 주체할 수 없어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였다.
“끄아아아!”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훕훕훕!”
광묘혈장법과 파육정묘검법을 시전하기도 하였다.
잠시 후 그는 바위에 우두커니 앉아 곰곰 생각에 잠겼다.
‘제자가 돌아왔어. 그런데 분명 십 년 이상이 지났을 터인데 제자의 내력은 높아지기는커녕 백지 상태야. 크흠! 그리고 또 저년은 누구지? 제자의 아내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다만 분명한 건 아직 내 애제자의 눈빛만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어젯밤…….’
간밤의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즉살마는 아직 아물지 않은 귓가의 상처를 매만졌다. 태어나서 그렇게 빠른 암기는 처음 보았다. 마치 전설의 비호가 뛰쳐나온 것만 같았다. 벼락같았다. 까딱 잘못했다간 제자의 장난에 골로 갈 뻔했다. 한순간에 가까스로 피했기에망정이지 하마터면 피를 볼 뻔하지 않았는가.
‘크흣. 그런데 또 이상하군. 내 제자가 왜 저런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지? 크극! 폭포 위에서 정파 놈들에게 당한 것이 분명해. 하지만 걱정 말아라, 제자야. 이 사부와 다시 만났으니!’
즉살마는 바위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도 간절히 그리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제자가 돌아왔다. 제자가!
광묘혈장법과 파육정묘검법을 전수받을 제자가 돌아온 것이다. 비록 정파 놈들에게 모진 수모를 당했을 테지만,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기필코 초고수로 만들고야 말겠다.
굳은 결심으로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나 눈가에 가득 맺힌 광기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눈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입가엔 광소가 끊이지 않았고, 전신이 형용할 수 없는 동작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뚝 멈추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제자야. 염공아, 일어나보거라. 이리 사부를 만나지 않았느냐.”
즉살마가 백호영을 향해 부드럽게 읊조렸다. 백호영은 어젯밤 그에게 점혈을 당한 이후로 줄곧 혼절해 있었다. 그보다 먼저 깨어난 건 부용설리였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죠?”
온몸이 상처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크극. 나도 모르지. 크크. 나도 몰라. 그러는 넌 누구냐.”
즉살마가 반문했다.
“저요? 나? 내가……?”
“그래, 너 말이다. 너는 왜 내 제자와 같이 있는 것이냐?”
“나…… 내가 누구지? 나는 누구지?”
“이런 망할! 네가 누군지 모르느냐? 너는 내 제자의 아내가 아니더냐. 내 사랑스러운 제자 염공의 아내가 아니냔 말이다. 옆을 보거라. 네 낭군이 곤히 잠들어 있다.”
즉살마가 흉소를 흘리며 백호영을 가리켰다. 그는 이미 부용설리를 제자의 아내로 지각해버린 것이다. 그런 그를 부용설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이 없다.”
그녀의 정신 상태는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는 게 전혀 없었다.
“내 이름…… 어르신, 제 이름을 아십니까?”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가만 보자. 생각해보니 내 제자 염공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그래, 가연리라고 했구나. 아마 네 이름이 가연리 인가 보구나. 크크. 재미있구나.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냐? 미친 것이군. 미쳐버렸어.”
“가연리…… 가연리…… 이게 내 이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수많은 악귀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듯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그녀는 그대로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눈앞이 어지럽기만 하였다.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분이 제 낭군……?”
백호영을 응시하던 그녀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즉살마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원앙 같은 두 부부를 바라보았다. 제자가 아내를 데려왔으니 조만간 떡두꺼비 같은 아이도 낳을 것이다. 홀로 외로이 살았던 나날들. 비록 광묘혈장법과 파육정묘검법에 골몰한 세월이라 해도 외로움은 털어내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외로울 까닭이 없다. 제자가 다시 품 안으로 돌아왔으니. 또한 사문을 멸문시킨 정파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도 주어졌으니!
즉살마는 백호영을 일으켜 앉혔다. 등을 돌려 자신이 바라보게 만든 다음 그 희괴한 옷을 벗겨 상체를 노출시켰다. 제자의 단전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범인처럼 텅 비어 있었다. 즉살마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백호영의 등판에 타혈을 하기 시작했다.
타타탁 타탁 탁탁
잠시 후 백호영이 한 움큼의 흑혈을 토해냈다. 몸속에 뭉쳐 있던 고혈이 즉살마의 내력에 의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즉살마는 곧바로 자신의 내력을 백호영에게 불어넣어 운행시켰다. 그러나 혈문이 완전히 막혀 있어 즉시 거둬들여야만 했다.
“뭔가! 어떻게 된 건가! 무공을 완전히 잃은 것인가? 버러지 같은 정파 놈들! 감히 내 제자를 이렇게 만들어놓다니! 혈문까지 꽁꽁 막혀버렸어. 혈문까지!”
그는 백호영을 완전히 자신의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눈에 흰자위만 가득 드러낸 채 광포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러나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다시금 심마를 다스리며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혈문이 막혔다면 뚫어야지. 제자야, 참거라.”
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백호영의 등을 수없이 점혈하다가 ‘합!’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쌍장을 대었다. 그의 쌍장에서 청기가 어른 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흡수되다시피 백호영의 등 안으로 스며들어 즉살마의 통제 아래 혈도를 따라 움직였다. 천혈문(天血門)을 시작으로 두문(頭門), 수문(手門), 족문(足門)에 이르기까지 몸 구석구석을 관통했다. 그때마다 백호영은 무의식중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즉살마는 어느 순간 기운을 역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나 한시바삐 제자의 혈문을 뚫어야겠다는 조급함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기를 역으로 돌리며 아물려는 혈문을 다시 뚫었다.
정말 제자의 혈문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단단히 막혀 있었다. 보통 혈문을 뚫기 위해서는 스스로 수년을 노력하든가, 아니면 1갑자 이상의 고수가 열흘 정도 운기를 시켜줘야만 한다.
즉살마는 마지막 운기를 끝낸 후 백호영의 등에서 쌍장을 떼어냈다.
“닷새 정도면 뚫을 수 있겠어.”
굵은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호흡을 다스렸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어찌하면 무공을 익힌 자의 혈문을 이리도 단단히 막아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정파 놈들의 지독한 손속에 치를 떨었다.
‘아무튼 제자를 찾았으니 됐다.’
그는 백호영을 다시 침상에 눕히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절벽이 사방팔방을 가로막고 있어 모든 게 손바닥만하게 보였다.
그러나 오늘의 하늘은 왠지 달랐다. 빈틈없이 총총히 박힌 별들 역시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즉살마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늘을 향해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제자가 왔다고! 제자가! 내 제자 염공이 왔다고! 크크크크! 다들 내가 부럽지? 정파 놈들아! 내가 부럽지 않느냐? 크캬캬캬!”
미친 노인의 광포한 웃음이 병풍 같은 절벽에 메아리쳤다.
“으음…….”
백호영은 눈을 비비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축 늘어지고 뻐근하던 몸이 웬일인지 가뿐했다. 상쾌한 정기가 몸속을 가득 맴돌고 있는 듯했다.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순간 흠칫했다.
“제길, 맞아! 어제 그 미친 노인네가 나를 덮쳤어.”
이제야 생각이 났다. 급히 허리어림을 더듬었다. 다행히 오토잭나이프는 뒷주머니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그는 은도를 빼 들고 고양이처럼 상반신을 바짝 웅크렸다. 방구석에 SIG P―305와 백색 점퍼가 처박혀 있었다. 곤히 잠든 중국 마피아의 딸도 보였다.
방구석으로 달려가 황급히 점퍼를 걸쳤다. 점퍼 안주머니에 가득 들어찬 총탄의 무게감이 듬직했다. SIG P―305와 오토잭나이프를 양손에 나누어 쥐었다. 그런데 막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중국 마피아의 딸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는 게 아닌가! 백호영은 재빨리 쉿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갖다댔다.
“낭군님…….”
부용설리가 그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확실히 낭군의 눈동자는 눈에 익었다. 사기가 철철 흘러넘친다는 점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그의 얼굴이 눈에 익숙한 것을 보니 낭군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의 낭군이 사도를 걷는 자임을 간파한 것일까? 그녀의 얼굴에 약간 실망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뭐라는 거야? 조용히 하라고!”
백호영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뇌까렸다. 젠장,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이마를 찌푸리며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야생의 만화(萬化)들이 가득 차 있었고, 벌들이 그 주변을 한가로이 윙윙거렸다. 절벽 사이사이엔 노송이 우거졌고, 천공에서 쏟아지는 한줄기 양광이 앞뜰을 환히 비추었다.
“헛!”
문득 고개를 돌리다 뭔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백호영. 그 미친 노인네가 바위에 앉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희죽거리고 있었다. 백호영은 부용설리의 입에서 손을 떼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뎠다. SIG P―305의 총구는 미친 늙은이의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걸음을 떼자마자 이쪽으로 고개를 팩 돌리는 즉살마. 백호영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큭! 재수도 더럽게 없어. 바로 걸려버리다니.”
뇌까리며 SIG P―305의 손잡이를 굳게 그러쥐었다.
‘근데 여긴 어디야. 왜 저 미친 늙은이가 나를 공격했던 거지? 혹시 저 늙은이도 마피아인가? 설마 저런 늙은 노인이? 하지만 몸놀림은……!’
“오, 제자야 깨어났느냐!”
반가운 표정으로 바위에서 일어난 즉살마가 그에게 다가서려 했다. 그러나 백호영이 움찔하며 권총을 겨누자 그도 동작을 멈추었다. 지난밤에 저 위험한 암기의 위력은 충분히 보았다. 아무리 철부지 제자의 장난이라지만……!
“제자야, 어디서 그런 암기를 얻었는지 몰라도 이제 그만 하거라. 크크크.”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이 미친 떼놈아! 어디 움직이기만 해봐라. 바로 갈겨버리겠어. 내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다 없애버리겠다고!”
광기가 가득 흐르는 백호영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을 일견한 즉살마가 훗 하고 미소했다. 그때였다.
휙휙휙
백호영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눈앞에 있던 미친 늙은이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탁
SIG P―305를 쥐고 있던 오른손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백호영은 자기도 모르게 SIG P―305를 떨어뜨려버렸다. 흠칫 놀라며 다시 주우려고 했다. 그런데 SIG P―305가 어느새 미친 늙은이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늙은이는 잠시 수중의 쇳덩이를 바라보다 뒤로 던져버렸다.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