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부용서리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낭군만을 해바라기했다. 노인이 어깨를 가볍게 짓누르자 낭군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천근만근의 철퇴가 자신을 짓이기는 것만 같았다.
“오늘로 이틀째다. 앞으로 사흘 정도만 더 고생하면 혈도는 뚫릴 것이야. 클클. 그 후엔 처음부터 다시 내공심법을 익혀야겠지. 무공을 전부 상실했으니…… 정파 놈들 정말로 용서할 수가 없군. 감히 내 애제자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즉살마가 백호영의 상의를 벗겨냈다. 보면 볼수록 희귀한 옷이라 벗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제자가 좋아하는 옷인 것 같아 내버려 두었으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고 맘먹었다.
백호영의 몸은 적당한 살과 근육으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남자답게 쩍 벌어진 어깨와 가슴, 복부에 걸린 단단한 근육.
부용설리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돌렸다.
‘내 낭군의 몸인데 어때. 하지만…….’
그녀는 끝내 가옥 밖으로 나가버렸다.
“왜 옷을 벗기고 지랄이야, 이 미친 늙은이야!”
백호영은 발버둥치며 벗어나보려고 애썼지만 괴력의 늙은이 앞에선 쥐새끼보다 못했다. 즉살마가 아혈을 짚자 그는 놀란 토끼마냥 눈만 껌뻑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늙은이가 뭐 하려고……? 큭! 말도 안 나오는군. 정말 미친 세상이다! 내가 정말 미쳐버린 것인가!’
백호영은 믿기지 않는 상황의 연속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장 등 뒤로 밀려드는 엄청난 기운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등골을 뚫고 흘러들어온 정체불명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전신을 휘도는 듯했다. 피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가끔씩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관절이 끊기고 근육이 파열되는 듯한 극통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이 흐르고 난 뒤엔 또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타닥
즉살마의 타혈소리와 ‘앗! 앗! 크윽!’ 하는 백호영의 신음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第4章 4인의 마피아
침통한 심정을 그대로 표출하듯 부용검파 본가 위의 하늘만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낙비를 뚫고 유유히 달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곧장 부용검파 본가로 들어섰다. 총 다섯 명이었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노인이 문주각으로 향했다. 부용검파의 식솔들 중 그 노인을 알아본 이들은 즉시 예를 갖추며 물러섰다.
노인과 나머지 네 명의 풍모는 대단했다. 얼핏 평범한 무인으로 보였는데 가만히 서 있어도 거인처럼 보였다. 그것을 위엄이라 한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정순하였고 밝게 빛나는 안광을 지녔다.
노인이 내실로 들어서자 문주 부용지와 멸사장으로 명호를 바꾼 송해이검이 그를 맞이했다. 부용지는 황산파 장로 황산진명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얼떨떨하였다.
“어서들 오시오.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은 생각도 못 하였소. 마중을 나가지 못한 점 용서하시오.”
“별말씀을요. 소식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사마인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 변고를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선 함구해주시오.”
“흠, 그러지요.”
부용지는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또다시 곱디고운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미 없이 자랐음에도 어찌나 예쁘고 바르게 컸는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다. 그런데 그 쳐 죽일 놈의 사마인이!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진정하십시오, 문주님.”
안색이 붉어진 멸사장은 문주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상심이 컸던지 딸을 잃은 후 엿새 동안 잠 한숨 자지 않았다. 흰머리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문주의 머리가 눈에 띄게 희끗희끗했다.
“문주님, 죄송합니다.”
“아니오. 헌데 황산파에선 어찌 발걸음을 하셨소?”
황산파의 장로가 네 명의 소협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들은 무림맹에서 나온 화산의 명의진검, 무당의 벽장천력, 소림의 사멸쌍장, 곤륜의 오의청검입니다.”
부용지는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과연 명문정파의 제자들답게 기도가 걸출하고 눈빛도 한없이 그윽했다. 모두 이십대 후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협들이었으나 고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들 잘 왔소. 본인이 이 부용검파의 문주 부용지요.”
“안녕하십니까.”
“아미타불.”
“문주를 뵙습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모두들 한마디씩 인사말을 건넨 후 뒤로 물러났다. 황산진명이 포권하며 말했다.
“이번 일은 문주께 말씀드려야 옳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소문주께서 사마인의 괴변에 이끌려 불복폭포로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부용지의 침통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문주께서도 아시겠지만 무림맹은 정기적으로 불복폭포 밑으로 사람을 보내왔소. 이십여 년 전 혈수장의 사부 즉살마가 그곳에 떨어졌음을 문주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오.”
“잘 아오. 혈수장을 본문에서 잡았지요.”
오 년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은 이삼 년에 한 번씩 불복폭포 밑으로 사람을 보냈다. 물론 불복폭포란 악명에 걸맞게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나, 혈수장의 사부 즉살마를 잡는다는 이유로 무림맹은 계속해서 사람을 내려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오 년 전에 끝난 일.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무의미한 짓을 벌이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다! 내 딸…… 내 딸이 불복폭포 밑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저들이라면……!’
부용지와 송해이검은 네 명의 소협들을 바라보았다. 정기로 가득한 안광이 물결쳤다. 믿음직스러웠다.
“무림맹에서 나온 이 네 명의 소협들은 모두 각 문중에서 일제자의 위치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만큼 무공과 지략이 뛰어난 영웅 기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해서 불복폭포로 내려가기 전에 미리 문주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오, 명문정파의 일제자들!’
부용지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돋았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직접 내려가고 싶었지만 사문에 딸린 식솔들만 오십인지라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명문정파의 일제자들이라니!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곤륜파와 소림사의 제자들까지 왔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끝내고자 하는 무림맹의 의지가 엿보였다.
“그렇소? 허나 소협들은 모두 알고 있는지요? 이십여 년 동안 불복폭포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단 한 명도 없소.”
“예, 잘 아옵니다. 허나 이십여 년 전에 그곳으로 떨어진 즉살마란 마인은 극악사인(極惡邪人)이라 들었습니다. 그런 자가 다시 세상으로 기어 나온다면 이십여 년 전 이곳 황산에 불었던 혈겁의 폭풍이 다시 몰아칠 것입니다. 무림맹주와 본문의 문주께서는 그 점을 심히 걱정하시어 후배들을 보내신 겁니다.”
화산파 명의진검의 낭랑한 목소리가 내실에 울려 퍼졌다.
“과연 명문정파의 제자 분들이라 믿음직하오. 잘 부탁하오. 진심이오.”
“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소협들은 정중히 포권하고 문주각을 빠져나갔다.
무림맹의 파견고수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황산진명이 입을 열었다.
“무림맹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일제자들을 보낸 듯싶습니다. 소문주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엿새밖에 지나지 않았소. 설령 저들이 찾지 못한다면 본좌가 평생을 바쳐 찾아다닐 것이오. 신경 써줘서 고맙소이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본문의 문주께서도 안부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황산문주께서?”
“예, 그럼…….”
“여봐라, 이분들을 산문밖까지 편히 모셔라!”
부용지가 내실 밖의 무사와 시비들에게 외쳤다. 그들은 황산진명을 비롯한 네 명의 명문정파 제자들을 호위하며 문주각에서 멀어져갔다.
부용지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구대문파 중에서도 선봉을 지휘하고 있는 네 명문정파에서 일제자를 보냈다면 해볼 만했다.
“잘된 일입니다, 문주. 불복폭포로 명문정파의 제자들이 간다면 믿음직합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한 번 저들을 믿고 기다려봅시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예…… 하온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멸사장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말씀해보시오.”
“이 년 정도 강호를 유람하고 싶습니다. 이번 사마인의 일 때문에 저는 명호까지 바꿨습니다. 강호를 유람하며 모든 사마인들을 철저히 징벌하고 싶습니다.”
“장로…….”
“허락해주십시오, 문주.”
멸사장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사마인 덕분에 십이제자 중 둘을 잃었고, 친딸처럼 여겨온 소문주까지 잃었다. 본가에 들인 사마인의 눈빛은 애초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놈처럼 눈에 독기와 살심을 가득 품은 인간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좋소, 정 그러시다면…… 허나 속히 돌아오셔야 하오.”
“감사합니다, 문주.”
멸사장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마인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백호영은 벽에 기대어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미친 노인에게 옷을 벗기는 수모를 겪은 후엔 고급 마사지를 받은 것처럼 온몸이 가뿐하고 정신 또한 맑아졌다.
‘마사지 하나만큼은 끝내주는군, 훗.’
곁에 달라붙어서 자신을 응시하는 부용설리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돌렸다. 백호영은 싱겁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벌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휙휙
멀리서 들려오는 공파음에 저절로 발길이 이끌렸다. 미친 늙은이가 지랄병이 도졌는지 뭔가를 하고 있었다. 바위 뒤로 숨어 노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한순간 그의 입이 쩍 벌어지고야 말았다.
휘익
즉살마는 파육정묘검법을 시전 중이었다. 마치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고양이처럼 사나운 검결이 이어졌다. 검극이 요동치며 허공을 가를 때면 그 검로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몸을 굽혔다 펴며 검을 수직으로 치켜들기가 무섭게 다시 내리꽂는 동작에선 육신이 모두 파열되는 것 같았다.
즉살마의 수련 모습을 지켜보던 백호영은 어느새 식은땀을 흘려댔다. 노인의 파육정묘검법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친 노인의 저 모습은……? 그래, 고양이다! 그것도 천 년의 원한이 뼛속 깊숙이 사무친 고양이.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복수에 불타는 귀신!’
왠지 미친 노인의 검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앗!”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미친 늙은이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것이다. 허공에서 몸을 휙 돌린 다음 머리를 땅으로 향하여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맨땅에 박치기하려는 미친놈처럼. 그러나 검을 앞세워 사방팔방으로 베고 찌르며 내리꽂는 모습이 고양이의 사나운 발톱을 연상시켰다.
노인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곧장 튕기듯이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검극으로 땅을 긋다가 흙을 튕겨 내자 사방이 금세 자욱한 먼지로 뒤덮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갑자기 그 속에서 튀어나와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허리를 완전히 굽혀 하방에서 상방으로 일자 베기를 하는데 백호영은 얼이 빠져 연신 눈을 비벼댔다.
“대, 대단하다!”
어찌 보면 살풀이춤을 추고 있는 것도 같았다. 원한이 사무친 고양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듯했다. 상대를 죽도록 쫓아 달려들기도 하고, 눈알을 캐내기도 하며, 발로 모질게 할퀴기도 한다. 상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뒤에도 원독이 다 풀리지 않아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잔악학 살풀이춤!
“저거라면……!”
백호영은 자신이 중국으로 버려지기 전의 일이 생각났다. 쿠데타 조짐을 간파하고 들개의 사무실을 급습한 그는 SIG P―305로 일거에 배신자들을 제압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상대의 수가 워낙 많았다. 옆방에서 줄줄이 뛰쳐나오는 십여 명의 총알받이들 앞에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토록 독일에서 몸을 키우고 피나는 수련을 거듭했건만!
‘저거라면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그의 눈에 환희의 살기가 어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들개 그 개자식을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들개 놈이 자신의 가족을 몰살하는 장면이 눈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 뒷덜미가 쩌릿쩌릿했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폭주하는 살심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즉살마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마살(魔殺)!’
즉살마는 백호영을 슬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에서 흉흉한 살기를 읽을수 있었다. 그만큼 백호영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여 시뻘겋게 충혈된 채 혈광을 폭사하고 있었다. 백호영을 응시하고 있던 즉살마가 불현듯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크하하하! 그 눈!”
즉살마는 한순간 섬뜩했다. 제자의 눈을 보고 섬뜩하다고 느끼다니! 그는 더욱 통쾌했다.
‘저놈의 눈! 원한에 찌들어 살심을 이기지 못하는 고양이의 눈! 마치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괴수가 되어버린 눈! 저 눈이라면 광묘혈장법과 파육정묘검법을 십 성까지 연성할 수 있으리라! 완공한 장법과 검법을 어서 빨리 보고 싶구나.’
즉살마는 갑자기 백호영에게 달려가 힘껏 껴안았다.
“크캬! 너라면 해낼 것이다. 사부의 무공을 완공할 것이니라. 크크크!”
영문을 모르는 백호영은 깜짝 놀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즉살마가 팔을 풀어주고 난 후에야 그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미친 노인네! 힘도 더럽게 세네. 도대체 뭘 처먹었기에. 그런데……?’
깜박 잊고 있었다. 저 미친 노인네가 하늘을 날듯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던 장면.
그는 즉살마를 똑바로 응시했다. 산발한 백발백염만 보면 영락없이 미친 노인이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풍기는 위엄과 매서운 눈빛 그리고 무한히 커 보이는 저 맹렬한 기운!
백호영은 왠지 소름이 돋아 즉살마를 뒤로하고 동쪽으로 걸었다. 제자가 사라지자마자 즉살마는 검을 버리고 장법을 연공하기 시작했다. 백호영은 귀를 틀어막으며 걸었다.
정말 출구는 없는 것일까? 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출구를 찾아 헤매던 중 눈앞에 즐비한 무덤을 접했다. 이십여 개의 무덤이었다. 비문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백호영은 괜히 섬뜩했다. 저 미친 노인이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여기 파묻은 게 아닐까? 미쳤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는 무덤가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그 옆에 또 다른 가옥 한 채가 있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